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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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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완쾌되고 사회에 내팽개쳐졌다

이경숙씨 섬처럼 외로운 삶… 투병 뒤 회사로 복직했지만

동료들은 냉랭, 퇴사 뒤 일자리 찾지 못해
등록 2019-07-20 14:26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암 생존자 174만 명, 암환자의 5년 생존율 70.6%(2016년 국가암등록통계).
의학기술 발달로 암은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다. 암환자 3명 중 2명 이상은 5년 이상 살아간다. 10년 전(2001∼2005년)에 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생존율 54%보다 생존율이 1.3배 늘었다. 통계는 증가 추세라는 ‘희망 곡선’을 그리는데 그들의 삶도 그러할까. 암 치료 이후 제2의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그 물음표를 안고, 은 암을 겪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좇았다.
암이 완치됐거나 암 치료 뒤 재발이나 전이 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이들을 공식적인 용어로 ‘암 생존자’(Cancer Survivor)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만난 당사자들은 이 용어보다 ‘암 경험자’로 불리기를 원했다. 일반인과 너무 다른 존재로 구별짓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다 그저 암을 경험했다는 의미로 여겼으면 해서다. 그래서 표지이야기에서는 그들을 암 경험자로 적는다. 살아갈 삶이 두렵다는 이경숙(가명)씨, 암 경험을 바탕으로 암 경험자를 돕는 박피디와 황배우 등 암 경험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돕는 사회 복귀 지원책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1부(제1272호)에서는 ‘암 경험자들의 사회 복귀’, 2부(제1273호)에서는 ‘암 경험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다룬다.

“암 치료되면 새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7월11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경숙(44·가명)씨는 잠시 말을 멈췄다. 침묵은 무거웠다. 그는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섬처럼 세상과 단절된 채 집순이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유방암 투병을 했던 경숙씨는 올해 6월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암 경험자인 그는 살았지만 “불안하다”고 했다. 미혼이고, 현재 무직이다. 친구, 회사 동료들과 관계가 끊기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 살아난 그는 사는 게 두렵다.

눈썹까지 빠지고 나니

경숙씨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는 2014년이다. 불행은 연이어 왔다. 3월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른 살에 어머니를 보내고 마흔 살에는 아버지마저 보내야 했다. 석 달 뒤 샤워하다가 가슴에 멍울이 만져졌다. 검사했더니 유방암 진단이 나왔다. “일만 하며 30대를 보냈어요. 마흔이 되던 해 더 늦기 전에 소개팅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회사 건강검진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암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제가 암에 걸릴 줄 몰랐어요. 병원에 가본 적도 잔병치레를 한 적도 없었으니까요. 건강하다고 생각했어요. 암에 걸린 가족도 없었고요. 그런데 제가 암이라니. 그때 처음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나 일은 쉴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하청업체에서 일했다. 2년간 다닌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차장 직급을 달고 3월부터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팀의 수장을 맡았다. “직장 상사에게 암 진단을 받았다고 이야기했어요. 휴직하고 싶다고 했죠. 그런데 제가 맡은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다녀달라는 거예요.” 수술하기 전에 암 크기를 줄이는 항암치료를 받으며 회사를 다녔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다 빠졌다. 모자를 쓰고 출근했다. “외모가 변하니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어요. 그때부터 일반인과 구별되는 거죠. 사람 만나는 것도 꺼려지고요. 사람들은 이상한지 쳐다보고 전염병 환자도 아닌데 제 옆자리를 피하고요.”

경숙씨가 하는 일의 강도는 셌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간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주말 근무에 야근도 잦았다. “프로젝트를 맡긴 큰 회사에 파견 나가 일해요. 프로젝트 계약 기간 내에 일을 마쳐야 하고, 여러 요구를 받아요. 회사가 작고 사람도 많지 않아 한 사람이 일당백을 해야 해요. 한 명이 아프거나 그만두면 프로젝트 진행에 문제가 생겨요.” 그가 암 진단을 받은 해에도 늘 하던 대로 몸을 사리지 않고 일만 했다. 자나 깨나 프로젝트 생각뿐이었다.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원치 않는 회식 자리에도 빠짐없이 나가야 했다. 그것도 업무의 연장이었다.

경숙씨가 맡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회사가 생긴 지 10년 만에 전례가 없는 무급 휴직”을 받았다. 6개월의 휴직 기간이 끝나고 복직했다. 수술과 항암으로 몸이 힘들어 야근이 적은 프로젝트 문서 작업을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회사는 요구를 들어줬지만 그가 파견 나가 일해야 하는 작업장은 지하철로 1시간30분인 걸리는 곳이었다. 다시 회사 일에 적응하는 것도 고되지만 다른 동료들의 태도도 그를 힘들게 했다.

마지막 날, 동료들의 싸늘한 눈빛

“그래도 쉬고 회사에 다시 나왔는데 ‘몸은 어떠냐’ ‘괜찮냐’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들 냉랭하고 데면데면하는 거예요. 나랑 일하기 싫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어요. 내가 아프기 전 차장 진급할 때는 저에게 살살거리며 잘하던 사람도 전과 달랐어요. 끈 떨어진 사람처럼 대했어요. 기껏 저에게 와서 하는 이야기가 이런 거예요, 제가 회사 골칫덩어리가 됐다든 둥 안 좋은 말만 옮기더군요.”

복직하고 두 달이 지나니까 “사람이 한 명 나갔다”며 프로그램 개발 업무를 다시 시켰다. 먼 거리의 작업장에 가고 야근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상 ‘퇴사 종용’이었다. 도저히 회사를 다닐 수 없었다. 경숙씨는 사표를 냈다.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은 저보다 상황이 낫더군요. 유연근무제를 신청할 수 있고 휴직을 할 수 있고요. 그런 상황이라면 계속 일할 수 있었겠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던 날,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날을 말하기 시작하자 경숙씨는 눈물을 흘렀다. 그 싸늘한 공기와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3년 전 이맘때였어요. 제 딴에는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사람들이 점심 먹고 들어오는 걸 기다렸죠. 그런데 다들 제 앞을 그냥 쓱 지나가는 거예요. 마치 없는 사람 취급했어요.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도 난 죄책감이 들었어요. 몸이 아파서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제 탓인 것 같았어요. 진작 조용히 나갔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맴돌았어요. 아픈 게 죄는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그들이 너무 미웠어요.” 그날의 상처는 경숙씨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동안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찾아야 했다.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 한 군데에서만 연락이 왔다. 면접 때 투병했던 이야기를 하고 야근을 할 수 없으니 전 직장에서 받던 연봉에서 1천만원 적게 받겠다고 했다. 다행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회사에 들어가니 날 뽑은 이유가 있었어요. 전 직장보다 더 열악한 회사였어요. 돈은 적게 주고 매일 야근하니 직원들이 계속 나갔나봐요. 당장 새 프로젝트를 할 사람이 없어 날 뽑은 거였어요. 당장 급한 불을 끄려고요. 저도 야근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2주 만에 그만뒀어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만 5년 지나 병원비도 부담

경숙씨는 자신이 일하던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으면 아팠던 것 때문에 좋은 노동환경의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잦은 야근에 쉼 없이 일해야 하는 ‘과로 사회’에서 그가 일할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걸 배우기도 쉽지 않았다. 동네 도서관 아르바이트 자리도 나이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막혔다.

경숙씨는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을 까먹고 있다”고 한다. “암 수술비, 방사선치료, 항암치료 등 비용을 다 합치면 1천만원 정도 돼요. 그렇게 목돈이 나가고 버는 돈이 없으니 아껴쓸 수밖에 없어요. 한 달에 50만원도 안 쓰면서 살아요. 그런데 올해 6월 중증질환자 기간이 만료돼 병원 비용이 많이 들어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갔을 때 10만원 이하 들었는데 이제는 60만원 정도 들 것 같아요.” 암환자 등 중증질환자는 5년간 의료비의 5%만 내면 되지만, 5년이 지나면 의료비 본인 부담률이 100%가 된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경숙씨에게는 병원비가 큰 부담이 된다.

그래도 암이라는 질병은 그에게 다른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게 했다. “방송에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산후우울증을 겪는 여성이 나와 이야기하는데 ‘아, 나도 그랬지’ 공감이 되는 거예요. 나와 상황은 다르지만 차별, 배제,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암으로 신체·정신적 변화를 크게 겪고 나니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하지만 그 생각의 끝에는 항상 우울이 찾아왔다.

지난해 겨울에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내가 왜 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죽고 싶었어요. 암에서 살아났지만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로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이런 시간이 얼마나 이어질까라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경숙씨는 그때마다 블로그에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 일기를 쓰듯 적었다. 암 완치 판정을 받아도 죽음의 공포는 여전하다. 암 환우 커뮤니티에서 어떤 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밀려온다. “죽음을 보고 들었으니까, 그 공포는 항상 있어요.”

앞으로 그에게 주어진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걱정이다. 그동안 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다니며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치료가 끝났으니 병원에 자주 가지 않아도 된다. 요즘에는 장을 보고 그날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주변 둘레길을 걷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추운 겨울이나 미세먼지 많은 날에는 이런 외출조차 어렵다. 더 우울해진다. 그러다 최근에는 일부러 밖에 나갈 일을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친구들도 몇 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더니 힘들어했다. “그때는 서운했지만 생각해보니 걔네들도 무서웠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항암치료하고 머리도 빠지니 제 모습을 보는 게 힘들고 무서웠을 거예요. 저와 상황이 달랐으니까요. 어떤 친구는 뒤늦게 결혼하고, 어떤 친구는 늦둥이를 낳았거든요. 자기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나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다 서로 연락을 안 하게 됐어요.” 친구들은 멀어지고 만나는 사람은 암 환우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몇 분 정도다.

건강하지 않더라도 일할 수 있는 사회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고립감이 커져간다. 사회와 연결된 끈이 다 끊어지는 기분이다. “사회에 첫발을 어떻게 디딜 수 있을까. 그저 힘들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병원에서는 치료만 하면 끝이니 이런 문제에 도움을 주는 곳도 없고요. 이제 완치됐으니 알아서 살라고 내팽개쳐진 기분이에요. 누가 날 이끌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죠. 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사회가 고립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사회와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하다고요.” 경숙씨는 이런 사회적 돌봄이 없는 곳에 있는 자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한다. 노인 고독사가 남의 문제 같지 않다.

3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암환자가 늘고, 투병이 끝나 다시 사회로 나오려는 분도 늘고 있잖아요. 그분들이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해요. 저처럼 암을 겪은 사람뿐만 아니라 임신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해요. 건강하지 않더라도, 몸이 불편해도 그들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해요. 네, 눈치 주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그런 사회요.”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 강조하며 그가 원하는 사회를 이야기했다. 절박하고 절실한 반복과 강조였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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