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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진압하는 경찰관이 되고 싶어요”

선택 사항인 군대를 갈 예정이라는 ‘아주 보통의 한국인’ 이주니
등록 2019-05-28 09:39 수정 2020-05-03 04:29

난민 2세 이주니(19)는 한국어로 꿈을 꾼다. 국적이 한국인 그의 국어는 한국어다.

주니의 기억은 다섯 살에서 출발한다. 집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부모님이 그 공장에서 일했고, 공장에 딸린 작은 방에서 세 식구가 살았다. 주니는 통진읍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녔다. 낮에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놀고 오면 일을 마친 부모님과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부모님은 저녁을 먹으면서 주니에게 하루 있었던 일을 한국어로 물었다. 부모님은 종종 주니가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차크마어’였다. 지난해 대학생이 된 그는 부모의 모국어인 차크마어를 말하고 들을 수는 있지만, 읽고 쓸 수는 없다.

친구들은 그를 “주니야!”라고 불렀지만 그의 성(姓)은 또래들과 달리 조금 길었다. 차크마. 2011년 ‘이주니’로 바꿀 때까지 그의 이름은 ‘패마스 주니 차크마’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인종 학살로 민간인 2만 명 목숨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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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의 아버지 이름은 ‘로넬 나니 차크마’(47)다. 로넬의 고향은 김포에서 3700㎞ 떨어진 방글라데시 치타공이다. 로넬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훨씬 이전부터 그들은 산악지대인 치타공에 삶의 터전을 이뤄왔다.

치타공에서 살아온 11개 소수부족 75만 명을 통틀어서 ‘줌머’라고 한다. 줌머의 사전적 뜻은 ‘화전농을 하는 사람들’이다. 치타공은 인도,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는 방글라데시 남동쪽에 있다.

영국은 1947년까지 인도반도를 지배했지만 줌머가 사는 치타공까지는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의 주류인 벵골인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줌머인은 대부분 불교를 믿으며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줌머인들의 치타공은 영국 식민 지배가 끝나고 파키스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파키스탄 정부는 1962년 치타공 중심에 있는 카르나풀리강에 캅타이댐을 지으면서 치타공의 가장 비옥한 경작지 40%를 수몰시켰다. 이 과정에 줌머인 10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됐다.

줌머인은 강압 정책을 펼치는 파키스탄에 맞서 벵골인들과 함께 싸웠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결과로 1971년 12월16일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독립을 맞았다. 하지만 줌머와 함께 독립을 쟁취한 방글라데시는 줌머인들의 치타공을 지배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무슬림 벵골인들에게 치타공으로 이주를 장려했다. 1978~84년 치타공으로 이주하면 가구당 6천 평의 농토를 주고, 식량도 무료로 줬다. 이 기간에 무슬림 벵골인 40만 명이 이주했다. 1979~97년 무슬림 벵골인 이주민과 방글라데시 군대는 열다섯 번 넘는 대량 학살로 인종청소를 시도했다. 이 기간에 민간인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줌머인들은 주장한다.

치타공 지역에는 방글라데시 무장군인 3만∼4만 명이 배치돼 군사적 긴장감이 높다. 게다가 2만여 명의 불법 민간 무장단체도 있다. 이러한 위협에 맞서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줌머인들은 군대를 조직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주니의 아버지 로넬도 줌머 게릴라군 일원이었다. 줌머의 자치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1986년 방글라데시 정부군에 체포돼 3년간 수감됐다. 로넬은 수감 기간에 각종 고문에 시달렸다. 강한 전기가 흐르는 의자에 앉아 자백을 강요당하는 ‘전기의자 고문’을 수차례 받았고, 여러 명의 군인에게 반복적으로 마구 맞았다. 고문관들은 그에게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도록 강요했다. “그때 고문받으며 생긴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다. 한국 경찰과 군인을 보면 무섭고, 감옥 생활을 하는 악몽도 꾼다.” 로넬은 인터뷰에서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박해받은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털어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04년 난민 인정받자 가족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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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넬은 만 3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밖에 나왔지만 정보기관 감시가 따라붙었다. 목숨 걸어 지키고 싶었던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스님으로 위장해 인도와 라오스, 그리고 타이를 거쳐 1994년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 방문의 해’이던 1994년에 비자가 없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기 쉬웠다. 한국은 로넬이 믿는 불교 신자가 많은 나라이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인종차별도 많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외국인을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해 여름 한국은 몹시 더웠고, 북쪽 지도자가 목숨을 잃었다.

로넬은 미등록체류자 신분으로 경기도 김포 인근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공장을 전전하는 한국살이는 쉽지 않았지만 언제 군부 폭력의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조국에서 사는 것보단 나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던 1997년은 한국 사회에 큰 변곡점이었다. 이곳에 사는 로넬의 삶도 크게 흔들렸다. 한국 사람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던 그해에 한국에서 외국인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김포에 사는 줌머인들은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조차 못하는 날이 많았다.

때마침 고국에서 반가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자치권 투쟁을 이어오던 줌머 지역정당과 방글라데시 정부가 ‘치타공 산악지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는 소식이었다. 총을 들고 투쟁에 나섰던 줌머인 게릴라군은 무기를 반납하고 속속 일터로 복귀했다. 인도로 망명한 줌머인 6만 명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로넬도 1998년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정부는 철수하기로 했던 군대를 계속 주둔시켰고 평화협정은 이행되지 않았다. 줌머인에 대한 폭력과 박해는 계속됐다. 로넬은 다시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2000년에 태어난 아들과 부인 졸리 데완(40)을 두고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한국에 온 로넬은 더욱 열심히 조국 상황을 알리며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이어갔다. 2002년 4월 줌머인의 고유 명절인 ‘보이사비 축제’를 김포에서 열며 ‘재한줌머인연대’를 출범시켰고, 줌머인 10여 명과 함께 집단 난민 신청을 했다. 2004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로넬은 아내와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줌머인들의 토지를 강제로 뺏고, 나쁘게 했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주니는 아버지 로넬의 망명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돼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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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초등학교와 양곡중학교를 거쳐 양곡고등학교를 졸업한 주니는 의사소통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 로넬은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통역을 할 정도로 한국어와 영어가 유창하다. 보통 난민 부모는 자녀의 한국어 교육에 어려움을 겪지만, 주니의 집은 달랐다.

어릴 때 친구들보다 피부색이 짙었던 주니는 일부 짓궂은 친구들이 ‘검둥이’라거나 외국인이라고 놀렸지만 크게 상처받진 않았다. “장난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친구나 선생님으로부터 차별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학교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평균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한국 가족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부모님이 주니가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로넬이 주니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한국 교육체계를 잘 몰라 자녀과 소통하기 힘들었다. 대부분 난민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느라 아이들과 이야기할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주니는 학교 공부와 관련해 궁금한 게 있으면 친구들과 이야기하거나 학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로넬은 주니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꾸었다. 성은 이씨였다. 아버지는 ‘이나니’, 아들은 ‘이주니’로 각각 바꿨다. 로넬은 자신이 한국인이 되면 앞으로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갈 주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난민 신분인 로넬보다는 한국인 ‘이나니’가 다른 줌머인들을 돕기에도 나았다.

2017년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주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경북 지역 한 대학 경찰행정학과에 합격했다. 중학교 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친절하게 도와주는 경찰관을 보고 주니는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경찰관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태권도 4단인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운동도 꾸준히 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주니 집에서 300만원이 훌쩍 넘는 한 학기 등록금은 적잖은 부담이었지만 다행히 국가장학금을 받아 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주니가 말하지 않으면 그가 외국인인 줄 몰랐다. “사실, 난 줌머 난민의 자녀야.” 이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놀라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릴 때는 줌머 음식과 한국 음식을 비슷하게 먹었는데 나이 들면서는 한국 음식에 더 익숙해졌다. 집 떠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간 뒤로는 줌머식 식사를 할 일이 거의 없다.

주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돼지국밥이다. 가끔 친구들과 소주를 먹고 피시(PC)방에서 게임하거나 노래방에 가는 걸 즐긴다.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김범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도 테러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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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교 2학년이 된 그는 군입대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외국인은 병역이 의무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이지만 주니는 군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에 친한 대학 선배와 친구들이 군대에 가는 걸 보면서 주니는 군 입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냈다. 부모님도 한국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고민한 끝에 그에게 “한국에서 살려면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고 했다.

“이왕 군대에 갈 거라면 병사보다는 리더로서 지휘하는 쪽으로 더 보람 있게 군 생활을 하고 싶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장교로 군에 가는 것이 월급도 더 많으니 도움이 될 것 같다.” 주니는 올해 초 학군단(ROTC)에 지원했다. 한국사 시험, 인지능력 평가, 신체검사, 체력검사, 면접 등 선발 절차를 모두 밟고 8월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학군단에 뽑히지 않아도 꼭 군대에 갈 계획이다. 특전부사관으로 군생활을 마치면 나중에 경찰특공대가 되는 데 유리하다고 해서 그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

지난해 예멘 난민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난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에 주니에게 의견을 물었다. “난민이 유럽 같은 곳에서 테러를 자주 일으켜서 한국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나도 테러가 무섭다. 한국인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한국 사람들은 난민의 테러를 두려워한다지만, 난민의 아들인 주니는 테러를 진압하는 경찰특공대가 되는 꿈을 꾼다.

“어젯밤에 ‘색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교양과목 발표 자료를 파워포인트(PPT)로 만드느라 제대로 못 잤어요.”

초·중·고교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가진 주니도 대학에 들어간 뒤 조금씩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법 관련 과목에 한자가 많이 나와서 힘들고, 교양과목에 글쓰기 과제가 많으면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데 글 쓸 때 단어 선택이나 문장 배치를 많이 고민한다.” 다행히 주변 친구나 선후배들이 주니를 도와주고 있다.

그는 학과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한눈 팔 겨를 없이 분주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 수십 대 일에 육박하는 경쟁률로 유명한 경찰공무원시험도 주니가 앞으로 넘어야 할 큰 장벽이다. “학교에서 공시(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선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걱정된다. 군대에 가더라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공부해 준비할 계획이다.”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우고 눈빛을 반짝이는 아버지 나니는 주니가 당당히 꿈을 이루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는 주니가 난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학군단에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가 꿈을 펼칠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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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친구들이 주니가 난민 2세임을 모르기 바라는 나니는 아들 인터뷰 요청을 몇 차례 거절했다. 기자가 거듭 청하자 마지못해 인터뷰를 허락하면서도 “중간시험 기간이 끝나면 인터뷰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주니는 아버지의 망명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누리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내가 평화롭게 꿈을 펼치며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어렵고 먼 길을 돌아온 아버지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면 꼭 좋은 나라로 여행을 보내드리겠다.”

한국인 나니와 주니 부자는 여전히 평범한 한국인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font color="#008ABD">글</font> 이재호 기자 ph@hani.co.kr
<font color="#008ABD">사진</font>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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