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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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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아 이상하다?

자본과 보수 언론, 노조 차별 프레임으로 노동자 내 ‘대리전’ 부추겨…

노조에 씌워진 ‘노조다움’ 틀을 깨야
등록 2019-03-12 10:16 수정 2020-05-03 04:29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이 2018년 6월28일 대한항공 비리 조사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이 2018년 6월28일 대한항공 비리 조사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땅콩 회항’ 충격, 박창진 사무장, 한 달 월급이 무려…’.

2015년 2월18일 보도된 인터넷 기사의 제목이다. 당시 언론들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의 피해자인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이 병가를 같은 해 4월10일까지 50일 연장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다. 하지만 일부 경제지 기사에는 한 줄이 더 붙었다. “박창진 사무장은 대한항공 과장 A급 팀장으로 수당을 합친 연봉이 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임금과 저임금을 대비해 임금 격차로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자본과 일부 언론의 전형적인 ‘노조 차별 프레임’이었다.

‘1억 연봉자다’ ‘피해자답지 않다’…

2018년 7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연대 지부를 만들어 초대 지부장을 맡은 박창진 지부장은 3월5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깔끔하고 품위와 품격을 지키면서도 노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길거리에 나와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을 외쳐야만 순수성 있는 노조 활동이 아니다. 삶터에서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노동운동이라고 믿는다.” 박 지부장은 “‘1억 연봉자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땅콩 회항 사건 뒤 노동운동을 하고 노조를 만들려는 내게 일어난 ‘2차 가해’ 유형이었다. 자본과 일부 언론이 만들어낸 프레임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노조를 차별과 혐오의 단어로 바꿔버리더라”고 했다.

‘땅콩 회항’ 사건은 평범했던 박 지부장에겐 ‘노동자에게 노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후 ‘땅콩 회항’에 이어 2018년 3월 조현아씨의 동생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세례 갑질’ 사건으로 같은 해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 선 대한항공 직원들은 여전히 외부와의 연대를 경계했다. 박 지부장은 “당시 대한항공에도 노조가 3개나 있었다. 하지만 역할이 사실상 없었다. 직원들이 자신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으니까. 노조 혐오증과 무용론이 있는 동료들에게도 노동권이 뭔지 알려주고, 자신의 권익을 찾도록 돕는 노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피해자에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처럼, 노조에도 ‘노조다움’이라는 틀이 작동했다. 노조를 바라보는 자본과 언론, 정치권 쪽의 차별적인 시선은 비정규직 대 정규직, 저임금 대 고임금 구도로 ‘대리전’을 부추겼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2월21일 열린 부산·울산·경남·제주권 합동연설회에서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을 떠받치는 자동차산업이 세계 7위로 추락했다”며 “‘귀족노조’의 횡포를 막고 진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7년 홍준표 당시 대선 후보가 대선 후보 초청 토론에서 주장한 ‘강성노조 망국론’에 이어 귀족노조 프레임이 급기야 ‘진짜 노동자’의 권리 유무를 가르는 기준이 된 셈이다.

누구에게는 민주주의 실현이 더 시급

박창진 지부장에게 씌운 노조 차별 프레임은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노조) 네이버지회가 만들어져 기성 노조와 다른 성향을 보이자 한 단계 더 기형적으로 바뀌었다. ‘임금보다 휴가… 네이버 노조의 ‘이상한 쟁의’’. 2월12일치 기사에 달린 제목이다. 네이버지회가 2월11일 쟁의행위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연 다음날 보도된 내용이다. 다른 노조는 ‘임금을 올려달라’면서 쟁의를 하는데 왜 네이버지회는 임금 인상 요구 없이 안식휴가, 유급 출산휴가 등 복지를 늘려달라고만 하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아 ‘이상하다’는 새로운 프레임은 네이버지회가 임금협상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면 ‘대기업 수준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고 주장했을 기존 프레임과 충돌한다. ‘아무나 노조’ 등장에 자본과 일부 언론의 프레임도 스스로 모순에 빠진 셈이다. 박종식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정책위원은 2월26일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노동조합 조직화 사례 연구 워크숍’에서 “보수 언론에서 임금수준이 높은 네이버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사도 내보냈다. 하지만 네이버 사례는 노동자가 단순히 임금과 처우에 대한 불만만으로 노조 활동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고도 했다.

오세윤 네이버지회장은 “네이버 노사는 지금까지 임금협상이 아닌 단체협약을 놓고 협상했다. 일부의 주장은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이 결렬돼 노조가 합법적 쟁의에 들어갔는데도 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논리다. 게다가 임금수준이 높다는 이유로 노조가 단체활동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노조가 필요한 각자의 절박함을 과소평가한 판단이다”라고 반박했다. 임영국 화섬노조 사무처장은 “‘아무나 노조’의 존재 이유를 임금 인상 같은 전통적인 구호로 일반화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노조다움’이라는 편견을 버리니까 직장 내 민주주의 실현 등이 누군가에겐 시급한 문제더라”고 설명했다.

연봉 500억원 미식축구 선수도 노동자

“내 가족의 생계를 보장할 좋은 직업을 원하는가? 누군가 내 뒤를 든든하게 봐주길 바라는가? 나라면 노조에 가입하겠다. 톰 브래디는 노조가 있어 행복했다. 브래디에게 노조가 필요하다면 여러분도 필요한 거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 노동절을 맞아 광역 보스턴 노동협의회에서 연설해 화제가 된 발언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에 “‘톰 브래디’는 연소득이 대략 500억원가량 되는 프로 미식축구 선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굳이 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1년에 500억원 정도 버는 사람도 자신을 노동자라 생각하고 노조에 가입해 도움을 받고 있다. 소득이 많다고 노조가 필요 없다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라고 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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