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의 명운이 걸린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 담판이 목표 지점에 가닿기 전에 멈춰 섰다. 그런데 아무도 “결렬”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은 아쉽게 생각한다”는 청와대 논평만이 아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많은 진전을 이뤘으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고 했고,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현시점에서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전용기에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전화를 걸어 “북한과 대화를 통해 타결해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화해서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는 청와대의 발표에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전 야구 선수 요기 베라의 결기를 기억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레이캬비크의 전설’을 떠올린다. 1981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스타워즈 계획’(SDI·전략방위구상)으로 무한 핵군비 경쟁을 주도해 지구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그런 레이건 대통령이 1980년대 중반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세기의 담판에 나섰다.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차 정상회담은 탐색전이었다.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2차 회담에서도 합의에 실패했다. 소련 모스크바와 미국 워싱턴이 들끓었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캬비크의 실패로부터 14개월 뒤인 1987년 12월 워싱턴 3차 회담에서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 서유럽과 소련 서부를 노리는 사거리 500~5500㎞ 지상발사 미사일을 모두 폐기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한 것이다. 냉전의 오랜 빗장을 풀어 탈냉전의 바다로 나아가는 거대한 한 걸음이었다.
적대와 갈등의 세월이 길수록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도 멀고 고통스러운 게 세상 이치다. 하노이의 비보가 ‘평화’라는 새 생명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어머니의 산통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용기와 행운을!
이제훈 한겨레 선임기자 nomad@hani.co.kr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제재 해제 문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결렬됐다.
이번 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국내에서는 ‘스몰딜’, ‘빅딜’ 논란이 무성했다. 그런데 스몰딜도 빅딜도 아닌 ‘노딜’이란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실무협상 등 비핵화 논의의 불씨를 다시 살리기 위한 북-미 후속 회담이 다시 열릴지 한반도 비핵화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회담 뒤 미국 쪽 반응을 보면, 비핵화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회견에서 “북한과 논의를 통해 많은 진전을 이뤘으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면서 “북한과의 핵 담판이 결렬됐지만, 앞으로 몇 주 이내에 합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회담 결렬 소식을 전하면서 “양쪽은 미래에 만날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비핵화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빅딜, 스몰딜 같은 이분법 잣대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불신과 오해의 눈초리도 있고 적대적인 것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우리는 그걸 잘 극복하고 해서 다시 마주 걸어서 261일 만에 하노이까지 걸어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개월 만에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첫날인 2월27일 저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언급한 ‘오해와 불신의 눈초리’의 하나로 스몰딜, 빅딜 논란을 꼽을 수 있다. 이번 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국내에서는 스몰딜, 빅딜 논란이 무성했다. 회담 개최 직전에는 미들딜, 미디엄딜, 굿딜(좋은 딜)과 배드딜(나쁜 딜) 같은 다양한 파생어까지 나왔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결과를 스몰딜, 빅딜이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북-미 정상회담 폄훼 의도인가빅 또는 스몰의 기준이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다보니 빅딜, 스몰딜의 정확한 개념은 없다.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과 북한은 빅딜이나 스몰딜이란 단어를 공식적으로 쓴 적이 없다. 거칠게 정리하면, 빅딜은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통 큰 거래이고 스몰딜은 그보다 낮은 단계의 합의를 말한다. 대개 북한 영변핵과 핵을 미국까지 실어 나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설의 동결·가동 중단에 머물 경우 스몰딜로 평가한다. 합의문에 비핵화 계획표가 들어가지 않거나 이른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의 구체적 조처까지 나오지 않으면 스몰딜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스몰딜, 빅딜이란 논의가 언제 나왔을까? 스몰딜 관련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1월 중순부터다. “북-미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 시민의 안전이다.” 1월11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미국 뉴스채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계기가 됐다. 이후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미국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위협을 없애는 선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나왔다. 빅딜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2월 들어 국내 정치권과 보수 언론이 스몰딜 프레임으로 열리지도 않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비핵화에 대한 실질적인 로드맵이 없는 이러한 스몰딜은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길로 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핵 동결하고 제재 완화를 거래하는 스몰딜이면 우리에겐 최악의 시나리오이고 ‘안보 대참사'라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에서는 ICBM 같은 것을 동결하면서 미국 시민의 안전을 보장받지만 우리에겐 대재앙이란 뜻이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스몰딜에 우려를 밝혔다. 그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첫날인 2월27일 “영변, 동창리, 풍계리의 핵미사일 폐기와 연락사무소 설치 및 종전선언을 바꾸는 스몰딜에 대해 (많은 사람이) 얘기하며 이를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내 아이들이 핵을 지고 평생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듯, 대한민국 국민도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사는 불안한 한반도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며 “이번 회담이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고 한반도 평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추가 정상회담 있는데 굳이 빅딜?이런 주장에 대해 빅딜(선)과 스몰딜(악)이란 이분법에서 벗어나, 스몰딜은 빅딜로 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내에서 지나치게 빅딜과 스몰딜이란 이분법적 접근을 하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조치를 내놓고, 미국이 그에 따른 상응 조치를 제시한다면 그 자체가 ‘빅딜’이다.”(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도 “완전한 비핵화만을 빅딜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당장 이뤄질 수 없다”며 “북한이 영변과 ICBM 및 핵확산 방지를 약속하고, 미국이 대북경제 제재 완화와 양국의 정치적인 종전선언,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 설치 등에 합의를 한다면 이건 스몰딜이 아니라 빅딜”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북한이 우선 핵실험을 하지 않고 미사일을 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큰 안정감을 느끼고 있느냐”고 말했다.
70년 넘게 적대 관계인 북한과 미국이 정상회담 한두 번으로 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한방에 모든 걸 해결하는 게 빅딜 아닙니까? 그런데 핵문제가 지금까지 25년이나 해결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악화됐던 문제인데 이걸 어떻게 한방에 해결하겠습니까?”(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회담 개최 전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미 정상회담이 올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더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스몰딜 논란이 격화되자 청와대가 `스몰딜, 빅딜 개념을 기계적으로 분절적으로 쓸 수 없다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2월27일 “스몰딜이 되면 성공하지 못한 회담이고, 빅딜이 돼야 성공한 회담인가”라고 반문하며 그런 평가는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청와대가 생각하는 빅딜과 스몰딜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이같이 답했다. 김 대변인은 “협상 당사자인 북미가 빅딜·스몰딜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며 “우리 언론만 쓰는 개념이며, 그 개념조차 기사마다 다른 기준을 쓰고 있다”라고 전제했다.
협상안 수위보다 이행 과정이 문제그러면서 “설사 그런 개념을 인정한다고 해도,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연속적인 개념이며, 빅딜 안에 스몰딜이 포함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스몰딜과 빅딜은) 입구이자 출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자 세기의 회담, 한반도 운명을 가를 분수령, 결단의 날이란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 두 차례 회담으로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최종 회담까지는 여러 단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스몰딜, 빅딜로 구분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노이 회담이 종착지가 아니라 3차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 결과를 스몰딜과 빅딜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미국의 핵전문가 해커 박사는 비핵화는 10~15년 걸린다고 예상했다. 비핵화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남-북-미 지도자의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1990년대부터 다양하고 많은 합의와 실천이 결국 여러 국제 정치 상황과 북·미 지도자 간의 불신, 약속 파기 등으로 하루 만에 모든 것이 협상 전으로 돌아간 상황을 무수히 경험했다. 결국 아무리 좋은 협상안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협상안이 중간에 깨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이해당사국 지도자들이 이룬 공동의 국가 이익과 상호 로드맵에 대한 대타협이 결국에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이끌어주는 힘이다. 회담은 스포츠 경기처럼 승패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당사국 간의 지속적인 상호 신뢰와 이익 공유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영준 국방대 교수)
‘마이 프렌드’틈만 나면 트위터를 작성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하노이에 와서 첫날 9건의 트위터를 작성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마이 프렌드’(내 친구)라고 표현했다. 회담 결렬 뒤 연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매우 생산적인 시간을 같이 보냈다”면서 “김 위원장, 북한과 계속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김정은 두 정상의 상호 신뢰가 `빅딜로 가는 지름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란 천리길을 가기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걷고 있다. 천리길을 걷는 나그네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길에서 쉬지 않아야 한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 인기기사
수도권 ‘첫눈’ 옵니다…수요일 전국 최대 15㎝ 쌓일 듯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임기만료 전역...임성근 무보직 전역 수순
이재명 무죄, 법원 “아는 것 확인하는 통상적 증언 요청, 위증요구 아냐”
검찰, ‘불법 합병’ 이재용 2심도 징역 5년·벌금 5억원 구형
고려대 교수 이어 학생도…“함께 외칩시다” 시국선언 제안
위기의 이재명, 한숨 돌렸다…민주당 대여투쟁 고삐 죈다
정부여당 일제히 “과거사 타협 없다”…급변침인가 일시적 모면책인가?
새가 먹는 몰캉한 ‘젤리 열매’…전쟁도 멈추게 한 이 식물
“양지마을의 폭행·감금·암매장”…지옥은 곳곳에 있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안 ‘원칙적’ 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