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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소 이유 통지서가 문학적”

연인관계 주장하며 과거 사진 유포 암시한 시인 ㄱ씨 명예훼손 고소... 1년만에 불기소 통지 받은 유진목 시인

성차별 판결 5건 가운데 3건은 피해자 진술보다 가해자 진술에 더 신빙성 둬
등록 2019-02-16 16:05 수정 2020-05-03 04:29
#미투의 당사자로 나선 유진목 작가. 오른쪽은 남편 손문상씨. 박승화 기자

#미투의 당사자로 나선 유진목 작가. 오른쪽은 남편 손문상씨. 박승화 기자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검사라는 전문직 여성조차 느닷없이 성폭력 피해자가 될 정도로 한국 사회의 성불평등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별세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으로부터 2013년 “한국 최고의 연애시집”이라는 찬사를 받은 의 시인, 유진목 작가가 ‘피해자’가 된 것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피해자’로 만든 것은 2017년 10월 시인 ㄱ씨가 트위터에 공개적으로 올린 게시글이었다.

피해자를 무고죄로 몰아가는 법원

“답변을 주세요. 유진목씨. 자꾸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유진목씨 남편 분과의 통화 녹음 공개할까요 말까요. 2G폰 복구해서 당시 같이 찍은 사진 수십 장 가지고 있습니다. 2000년 8월 부산 여행 사진들이 대부분. 이건 차마 공개 않겠습니다.”

유 작가는 이후 ㄱ씨를 명예훼손, 협박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이후 1년여 수사기관의 수사를 받는 동안 ㄱ씨의 혐의를 가려야 하는 일은 뜻밖에도 유 작가와 ㄱ씨의 연인 관계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로 변질됐다. 유 작가는 20여 년 전 ㄱ씨로부터 당한 일이 스토킹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외국에 있는 지인들을 수소문해 진술서를 받았다.

지난 2월1일 지난한 싸움의 결과가 나왔다. 검찰은 ‘불기소 이유 통지서’를 통해 유 작가가 스토킹 피해자가 아니라 ㄱ씨의 연인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검찰은 스토킹이었다는 유 작가와 제3자의 진술을 모두 배척하고, 연인 관계였다는 ㄱ씨의 진술과 그가 제시한 전자우편 증거를 인정해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진 게시 등으로 협박한 일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유 작가는 불기소 이유 통지서를 받은 이날 비로소 자신의 경험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미투의 자장 속에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데 눈을 떴다고 했다.

“불기소 이유 통지서가 안희정 1심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보인 태도와 너무나 흡사했다. #미투 운동이 법에 호소할 때 사법기관이 판단하는 방식이 나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투 판결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 기소가 되지 못해 법원 문턱에도 가지 못한 유 작가를 만난 이유는, ‘피고인의 이익’을 내세우는 법원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 사실이 부정되는 다양한 젠더 폭력 사례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가 꼽은 성차별 판결 5건 가운데 3건은 피해자 진술보다 가해자 진술에 더 신빙성을 인정한 사례다(표 참조).

2월12일 유 작가가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답답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일종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많이 웃었다. 동행한 남편 손문상씨는 “아내가 사회적으로 발언하기로 결심해서 기쁘다”고 했다. 손씨는 인권 만화 (창비), (창비) 등을 펴낸 바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사만화가다. 유 작가 부부가 ㄱ씨 사건과 관련해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손씨가 이날 인터뷰에 동행한 것은 그 역시 ㄱ씨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형사조정’을 위해 ㄱ씨를 대면한 날, 형사 조정이 결렬된 뒤 ㄱ씨로부터 폭언을 들었다. ㄱ씨는 손씨를 모욕한 혐의로 벌금 1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유 작가는 검찰에서 줄곧 ㄱ씨가 트위터에 해당 글을 올린 목적이 자신에 대한 ‘보복’이라 진술했다고 말했다. 2016년 에 ‘혐오사전’이라는 작품을 실은 일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다. ‘혐오사전’은 2016년 겨울호 특집 ‘#여성혐오―창작’에 유진목 작가가 쓴 작품으로, 그와 함께 6명의 문인이 ‘여성혐오’와 ‘문단 내 성폭력’ 이슈에 대한 문학 작품을 실었다.

고스란히 제시된 ‘사회 통념’
지난해 11월 해군 간부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고등군사법원의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시민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지난해 11월 해군 간부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고등군사법원의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시민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무조건 ‘혐오사전’을 내리라고 했다. 그가 트위터를 비롯한 사이버상에서 한 일은 과거에 연인 관계였다 해도 해서는 안 되는 범죄이며, 더구나 연인 관계도 아니었던 여성을 상대로 하는 일은 더 심각한 범죄라고 생각해 아내와 고소를 결심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인의 글에 대한 해명을 하려는 목적에서 게시한 글’이라며 ‘보복’이 아니라 ‘해명’이라고 판단했다.

검찰의 불기소 이유 통지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판결에서 보이는 여러 특성이 고스란히 보인다.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인 사람의 시각이 아닌 막연히 ‘일반적인 시각’ 또는 ‘사회 통념’을 제시하는 게 대표적이다. “2G폰 복구해서 당시 같이 찍은 사진 수십 장 가지고 있다” “이건 차마 공개 않겠다”는 등의 표현에 대해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이 불쾌감과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성적인 맥락’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은 대신 “연인 관계였음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행해졌음에 불과”하다고 봤다.

유 작가는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한 ‘협박’ 혐의에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제시한 판례가 1998년도 판례라는 점을 여러 차례 거론했다. 검찰은 1998년 판례를 예시로 들며 “해악의 고지가 있다고 해도 사회의 관습이나 윤리 관념 등에 비추어볼 때 사회 통념상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면 협박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성적인 사진이 없는데 왜 공포심을 느끼냐고 한다. 나의 공포심은 성적인 사진이 있기 때문에 느끼는 공포심이 아니다. 나는 검색하면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다. 얼굴도 나온다. 내가 어디에 살고 어디서 일하는지도 검색하면 알 수 있는 노출된 사람이다. 불특정 다수가 ㄱ씨와 내가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공포다.”

손씨도 1998년의 사회 통념을 기준으로 ㄱ씨의 게시글이 갖는 범의(범죄임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하려는 의사)를 포착할 수 있는지 반문했다. “1998년의 사회 통념이 뭐냐. 그때는 스토킹이나 불법 촬영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사진이 있다, 차마 공개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악의를 가진 명백한 범죄다.”

‘범의’를 판단할 때 가해자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식은 고등군사법원의 해군 간부 무죄판결에서도 발견된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의 내심의 거부 의사를 피고인이 인식하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폭행·협박을 통한 강제추행과 강간의 범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항거가 불가능한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간과 강제추행으로 인정하는 ‘최협의설’(최대한 협소하게 해석한다는 뜻)에 기반한 것도 문제다.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에서 법무법인 태평양의 이경환 변호사는 “성인지 감수성이 없는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에 대해 내놓는 흔한 모습을 극단적이고 최악의 형태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인 이유를 살인자에게 묻다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부제를 단 인권 만화 (창비)을 출판한 바 있는 손씨는 자신의 성인지 능력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검찰의 판단에 재차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성차별 경험을 그린 만화집 (길찾기)도 펴냈다.

“아내이기 이전에 여성이다. 20여 년 전 갓 대학에 들어간 문학소녀가 대학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아름다운 언어로 썼던 이메일이 있을 수 있다. 선의의 이메일을 빌미로 싫다는데 일방적으로 사귀자고 하고, 그걸 스토킹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선배로부터 수년을 시달렸다. 이 일을 고통당한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가해자의 변명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

울산지방법원이 아내를 살해한 20대에게 징역 13년형을 선고한 사건은 젠더 폭력과 관련해 법원이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치우친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판결문은 “피해자가 피고인의 불륜 관계를 정리해달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불륜 관계를 유지하여 피고인과 다툼이 발생하였음에도 피고인에게 성적인 비하 발언을 하여 피고인을 격분하게 한 사정은 일반 감경인자인 ‘피해자 유발’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법무법인 혜명의 오선희 변호사는 “검사 시절, 살인 사건을 조사할 때마다 느꼈던 것은 피해자가 왜 죽었는지는 피고인만 아는데, 사건의 원인을 피고인 진술로만 판단하고 양형한다는 것이었다. 바람피우고 거짓말했다고 하는데,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입증된 적이 사실은 없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유발’했다고 판결문에 적은 것은 문제다”라고 말했다.

유 작가는 수사 과정에서 ㄱ씨보다 자신이 수사받고 추궁당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았다. “‘혐오사전’이 ㄱ씨를 향해 쓴 거냐” “진짜 사귄 거 아니냐”는 질문이 대표적이었다. “나는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수사기관은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다던데’라는 말만 반복했다. 변호사 없이 수사를 받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변호사를 선임했다.”

유 작가는 항고 신청을 했고, 3주 안에 제출해야 하는 항고 이유서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불기소 이유 통지서가 내 시보다 더 문학적”이라며 웃었다. “내가, 그리고 ‘혐오사전’이 공격당하기 시작하면 문단 내 성폭력과 관련해서는 모든 게 막혀버릴 것 같다. 일이 벌어진 이상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직업이 좀더 안전했으면 좋겠다. 단순히 ㄱ씨의 악행을 고발하고 싶은 게 아니다.”

“컴퓨터 파기해 사진 제출 못해”

인터뷰 다음날 유 작가는 ㄱ씨가 자신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한 사건과 관련한 ‘출석요구서’를 경찰서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유 작가는 “문단 내 성폭력 관련 글로 보복성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ㄱ씨는 과 한 통화에서 “‘혐오사전’에 실명은 나오지 않지만 여러 사정으로 미뤄보아 문단 내에서는 나라는 것을 특정할 수 있다. 이것을 인지한 주변인들의 진술서와 함께 고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사귀는 사람끼리 보내는 전자우편이 아니라면 무엇이냐. 내가 2016년 트위터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자 연인 관계였던 것이 수치스러워 부정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2017년 10월 당시 공개하겠다고 했던 사진을 검찰에 제출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2017년 12월에 심경의 변화가 있어 컴퓨터를 파기했고, 제출하지 못했다. 성적인 사진은 찍은 적도 없고, 성적인 사진이라는 뉘앙스를 보인 적도 없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국 사회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투에 한국 사회 전반이 반응했고, 사법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과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선정한 ‘#미투 판결 10’을 보면 그 불가역적인 변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폭력·노동·가족·헌법 분야 전문가 10명으로 꾸린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는 2018년 한 해 나온 젠더 관련 판결들 가운데 성평등 판결과 성차별 판결을 추천했다. 대법원 젠더법연구회와 헌법재판소, 대한변호사협회도 추천에 참여했다. 그 결과 성평등 판결로 16건, 성차별 판결로 10건이 추천됐다. 지난 1월15일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열린 심사위원회는 성평등 5건, 성차별 판결 5건을 선정해, 이들 가운데 최고와 최악을 가리는 자리였다. 최고의 #미투 판결은 지난해 4월 대법원이 내놓은 ‘ㅇ대 성희롱 교수 해임 사건’ 판결이, 최악의 #미투 판결은 지난해 8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에 대한 서울서부지법의 판결이 선정됐다. 은 1부(최고의 판결)와 2부(최악의 판결)로 나눠 #미투를 이해하는 법의 열쇳말을 살핀다. 성평등의 열쇳말은 ‘성인지 감수성’, 성차별의 열쇳말은 ‘위력’이다.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
위원장 김유니스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 소장(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박귀천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신옥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전북대 로스쿨 교수)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전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
원혜욱 인하대 부총장(인하대 로스쿨 교수)
이경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장명선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정구태 조선대 법과대학 교수
최미진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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