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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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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안 보이게 밀어넣어!

조선총독부 감화원에서 대한민국 사회복지법인까지

부랑인 수용의 역사
등록 2019-01-05 15:02 수정 2020-05-03 04:29
1942년 5월29일 선감학원 개원일 당시, 수용될 아이들이 선감도에 도착한 모습. 이하라 히로미쓰 <아! 선감도> 저자 제공

1942년 5월29일 선감학원 개원일 당시, 수용될 아이들이 선감도에 도착한 모습. 이하라 히로미쓰 <아! 선감도> 저자 제공

감금, 매질, 강제노동이 벌어진 경기도 안산의 선감학원, 충남 서산의 서산개척단, 부산의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정책 역사에서 ‘극단적’ 사례이나 ‘예외적’ 사건은 아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랑인은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대상이자, 착취할 도구였다. 부랑인 정책의 역사를 관통하는 건 ‘건전한 우리’로부터 ‘그들’의 배제다.

“노동할 능력이 있지만 노동하지 않는 자라고 간주된 자, 일정한 직업과 주거가 없는 자들.” 1912년 조선총독부는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라 ‘부랑인’을 검거 단속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정의된 ‘부랑인’은 처음엔 도박, 성매매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를 지칭하더니 1920년대 중반 이후엔 걸식·유랑 아동, 빈민을 가리키게 됐다.

일제, 전시 상황 되면서 수용소 만들기 시작

부랑인과 함께 ‘불량소년’이 등장했다. 1923년 일제는 ‘조선감화령’을 제정해 ‘연령 8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로 불량 행위를 하고 또는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으며 적당히 친권을 행할 자가 없는 자”를 수용 조치하도록 정한다. 절도, 술주정, 부랑, 사상범 등이 한 꾸러미로 묶여 ‘불량소년’이 됐다. ‘불량 행위를 할 우려’는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달렸다.

어떻게 ‘불량소년’이 되나? 1930년대 유전학, 우생학이 확산되면서 원인을 개인의 선천적 요인에서 찾았다. 실제 ‘불량소년’으로 지목된 아이들의 공통점은 가난이었으나 이를 지적하는 글은 신문에서 삭제됐다. 소현숙은 “식민 지배의 모순을 가리고자 일제가 조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뿐 아니라 조선인들도 민족 역량 강화라는 논리로 ‘불량소년’의 수용과 교화를 지지했다. 수용 교화기관인 ‘감화원’을 설치해달라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감화령을 제정했지만 일제가 불량소년 ‘수용소’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전시 상황에 들어서면서다. 1938년 목포학원, 1942년 백세숙, 1942년 선감학원을 차례로 세웠다. 소현숙은 “전시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인적 자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거리의 부랑자와 청소년층에 대한 권력의 감시 통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총독부는 경기도 사회사업협회를 내세워 안산 선감도 전체를 사들이고 주민을 몰아냈다. 완전히 고립된 섬에서 아이들은 매질당하고 달아나려다 숨졌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아이가 징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방과 한국전쟁… “거머리 떼” 격리와 추방

해방이 되자 해외동포가 밀려왔다. 전쟁 뒤엔 인구 절반 가까이 피란민이나 전재민(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이 됐다. 언론은 늘어나는 ‘부랑인’을 “전율 이상의 공포” “거머리 떼”로 묘사했다. 하금철은 “부랑인은 이미 대한민국 내부에서 자생하는 비국민이었다”며 “공론장에서 ‘부랑’이란 도덕적 비난의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부랑인 정책의 초점은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데 맞춰졌다. 재정 부담은 민간에 떠넘겼다. 1954~59년 군경원호사업비는 약 24%(25억8200만환에서 75억420만환)로 는 데 비해 사회복지사업비는 32%(17억3100만환에서 2억570만환) 줄었다. 1960년엔 1천 명 수용 규모로 지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그 두 배에 가까운 1831명을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선감학원은 적극 활용된다. 1949년 9월29일치 는 “서울시는 5천 명 걸인 중 소년 1500명을 보육원과 소년보호기관에 강제수용하고 도피가 우려되는 악질자는 선감학원과 목포학원에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부랑아 시설이 폭증했다. 1955년 보건사회부는 난립한 시설들을 재단법인으로 바꾸도록 한다. 관리·감독을 강화할 뿐 아니라 민간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런 바람을 타고 1960년 박인근 원장이 운영하는 형제육아원이 부산 감만동 외딴 바닷가에 들어선다. 형제육아원의 주요 재원은 해외원조기관,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금이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면, 아이들의 ‘머릿수’가 돈이 되는 구조였다.

5·16 군사정부의 “가장 뛰어난 업적”

“혁명 후 달라진 우리 사회 ‘폭력배 검거’… 과거 어느 정권도 방임하고 심지어 결탁까지 해 갖은 사회악의 근원이 된 폭력배를 혁명정부에서는 과감히 그 뿌리를 뽑기 위해 전격적인 검거를 하고 이들을 교화해 탄광 등지에 노무자로 보내 갱생의 길을 밟도록 선도하고 있습니다.”(1961년 6월 )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는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그 3항이 “사회의 부패와 구악의 일소”다. 김아람은 “5·16 쿠데타로 성립한 군사정부는 부랑아 대책을 자신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 가운데 하나로 자평했다”고 설명했다. 대책이란 대규모 단속과 수용이다. 정부가 발행한 ‘보건사회통계연표’를 보면,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부랑아 단속 인원은 25만4671명이다. 이 가운데 14만2588명을 시설 수용하고, 1695명을 정착지로 보냈다.

1961년엔 갱생보호법을 제정해 형집행종료자, 가석방자, 부랑인 등을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실적을 올리려고 시민을 대합실에서 납치해 광주 무궁갱생원으로 데려간 사건 등이 보도된다. 산업화 과정에서 빈농들이 대규모 도시로 이동해 빈민으로 전락한 시기이기도 하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부랑인 시설 격리에 그치지 않고 “갱생”이라는 명분으로 국토 개발에 강제 동원한다. 김아람은 “군정의 부랑아 정책을 ‘산업 전사’ 만들기 방식”이라고 규정했다. 부랑인, 한센병 완치자, 넝마주이 등을 대상으로 ‘개척단’ ‘근로재건대’ ‘국토건설단’을 잇따라 조직한다. 대표적인 예가 서산개척단(대한청소년개척단)이다. 보건사회부는 1961년 자동차부품업체 사장인 민정식에게 서산개척단 운영을 위탁했다.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 일대 폐염전을 개간하는 데 공식적으로 1771명이 강제노역했지만 약속한 땅은 주지 않았다. 1963·1964년 개척단원 350쌍을 강제 결혼시키며 “부랑인과 윤락여성의 자활”로 선전했다. 개척단은 전남 장흥·영광, 강원도 고성·대관령 등에도 있었다. 민간 주도 개척단까지 더한 전체적인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아람은 “정부로서는 거리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격리하면서 동시에 농지조성에 활용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사업”이었다고 분석했다. 도심에서는 넝마주이 1380명을 경찰서 단위로 집단 수용해 근로재건대를 만들고, 병역기피자는 국토건설단으로 보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은 ‘내무부훈령 410호’를 제정하는데, 이 훈령은 이후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이 특수감금 혐의를 무죄선고 받는 데 근거가 된다. 훈령은 “걸인, 껌팔이 등 건전한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부랑인을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하라며 “시장, 군수, 구청장은 경찰과 합동으로 부랑인단속반을 편성해 월 1회 이상 정기적 일제 단속과 필요에 따라 수시 단속”하라고 정한다.

아동 시설에서 부랑인 시설까지 몸집을 불린 형제복지원은 내무부 훈령이 제정된 해에 사회복지법인으로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보호 사업 위탁계약을 맺는다. 부산시는 1970년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늘어난 부랑인을 최소한의 재정 부담으로 관리하고, 형제복지원은 확보된 노동력을 낚싯바늘, 자물쇠 생산 등 수익 사업에 이용했다. 형제복지원 수용 인원은 1978년 1600명까지 늘었다.

전두환 정권, 부랑인 ‘청소’로 “환경미화”

“정의로운 새 사회와 복지국가 건설.” 1980년 9월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질적인 사회악 일소”로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방식을 따랐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은 ‘부랑인 복지시설 운영개선 종합대책’을 마련한다.

이 대책에서 부랑인은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탁한 사람 또는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 보호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 시민들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등 건전한 사회질서의 유지를 곤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 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 알코올중독자, 걸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불구 폐지자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정화’에 공무원 1만 명을 투입하는 등 부랑인 단속을 강화한다. 이소영은 “부랑인 시설 격리는 이른바 국가의 경사를 앞두고 환경미화 국민 캠페인과 연계되었다”고 설명했다. 보건사회부 를 보면, 부랑인 시설은 1982년 10곳에서 1983년 43곳으로, 수용 인원은 3629명에서 1만4131명으로 뛰었다.

부랑인 단속 강화는 형제복지원엔 성장의 기회였다. 1984년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면서 민간 시설에 보조금, 세제 혜택도 늘었다. 전두환 정권은 수용인 노동력을 동원해 비용을 절감하는 형제복지원을 ‘모델’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부는 1982년 전북 완주군에 “수용 인력을 동원해 재정 절감하는 형태로 신속히 (부랑인 수용시설) 공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린다.

형제복지원은 날개를 달고 사업 다각화를 모색한다. 수용동 2층을 증축하고 기업체와 손잡아 수익 사업을 확대한다. 1980년대엔 형제복지원 안에 형제정신요양원까지 짓는다. 김일환은 “1980년대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일시 보호시설, 유아 및 아동 보호시설, 직업 보도(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감) 시설, 장애인 요양시설, 보호감호소, 제조업 수출 생산단지, 인력파견소의 성격을 띠었다”며 “부랑인 수용이라는 국가 프로젝트의 수행 과정에서 국가-사회복지법인이 비용 절감의 논리가 서로 맞물리면서 일종의 ‘담합’ 관계로 발전하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서로 도운 국가와 사회복지법인

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이 알려졌지만, 형제복지원 재단은 이름만 욥의마을, 느혜미야 등으로 바꿔가며 중증장애인 시설 등을 운영했다. 2015년 부산시가 법인허가를 취소했을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2년6개월형을 살고 출소한 박인근은 이사장으로 복귀했다가 2011년 아들에게 재단을 물려줬다. 부랑인 경찰 단속과 강제수용은 1990년대 초반부터 점차 없어졌고, 2011년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부랑인’이란 용어는 적어도 법률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배제의 논리는 남았다.

1997년 에바다복지회 사건, 1998년 노숙인 재활시설 양지마을 사건, 2006년 성람재단 사건, 2011년 인화학교 사건 등이 터졌다. 김일환은 “국가와 격리 수용 위주의 사회문제 해결, 민간 사회복지법인에 의한 수용 시설의 운영, 국가와 사회복지법인 사이 상호 의존적 관계는 변함없이 지속됐다”고 분석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참고 문헌
김일환, , ‘배제에서 포용으로: 형제복지원의 사회사와 소수자 과거청산의 과제’ 토론회 자료, 2018년 11월.
이소영, , , 2014년 8월.
김아람, , , 2011년 12월.
김아람, , 한국사학회 3월 연구발표회 자료, 2018년 3월.
소현숙, , , 2015년 9월
박홍근, , 고려대 사회학과 석사 논문, 2014년.
하금철, ,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례 토론회 발표문’, 2018년 6월.
김명연, ,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례 토론회 발표문’,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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