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은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다. 1942년 일제가 설립한 선감학원에서 아이들은 탈출을 감행하다 죽었다. 충남 서산시 인지면 희망공원에는 1960년대 서산개척단으로 뻘밭을 옥토로 바꾸는 데 동원됐다 숨진 ‘부랑인’들의 무연고 묘가 있다. 박정희 정권 공식 통계로,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단속한 부랑인 수는 25만 명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시설 수용은 강화됐다. 부랑인 단속과 격리는 치적으로 홍보됐다. 부랑인 정책 아래로 역사를 관통하며 ‘배제’의 폭력이 흘렀다.
‘그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한종선씨와 형제복지원에 함께 끌려간 세 살 터울 누나와 아버지는 여전히 정신병원에 있다. 서산개척단에서 맞아 한쪽 귀가 먹은 정영철씨는 정부로부터 약속받은 땅을 받지 못한 채 ‘남의 땅이 된 내 땅’에서 임대료를 치르며 농사짓는다.
‘그들’은 고통조차 수십 년 말하지 못했다. ‘부랑인’ 낙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무엇이 내 삶을 이렇게 만들었나?’ 2012년에야 한종선씨는 국회 앞에 홀로 섰다. 생존자들은 진상 규명, 명예회복,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486.44㎞를 걸었고, 400일 천막농성을 벌였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2014년 발의됐지만 안행위(현 행안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국가 차원의 진실 규명을 위한 첫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은 3년째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한종선씨가 쓴 책 의 부제가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인 이유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김성환씨가 선감도 내 공동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탈출하려다 죽은 아이들이 여기 묻혔다. 주검을 멍석으로 말아 묻은 건 그나마 큰 애들이 한 일이었다. 큰 애들도 13살, 14살이었다. 김진수 기자
제 이름은 김성환, 1956년 9월21일생입니다. 여기 개펄이 보이죠. 지금은 육지랑 연결됐지만 그땐 여기가 다 바다였어요. 12살 때, 1968년 7월30일, 날짜도 기억하죠. 어둑어둑했어요. 이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두들겨 맞았어요. 선감학원에 온 첫날입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애들 30~40명을 차에 태웠어요.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노래를 불렀죠. . 아이들 사이에 선감학원은 생지옥이라는 말이 돌 때예요. 차에서 내리니 바닷바람이 불었어요. 애들은 공포에 질렸어요. 마산포에서 선감도로 가는 배를 기다릴 때 서너 살 위 애들은 냅다 도망갔어요. 그때 목숨 걸고 도망갔어야 했는데…. 선감학원에서 5년 10일을 보내고 처음 탈출했죠. 1975년에 또 잡혀 들어왔고요. 또 도망쳤다 76년에 잡혀 그해 풀려났어요.
4살 동인천역, 7살 서울역에 버려져선감도에 아직 남아 있는 선감학원 사동의 모습. 김진수 기자
좋았던 시절? 두 살 많은 형하고 물고기 잡으러 갔던 게 생각나요. 부모님이 갈라서면서 형은 엄마 따라가고 저는 아버지, 새어머니랑 살았어요. 제가 4살 때 아버지가 절 동인천역에 버렸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가 안 오니까 무작정 걸었죠. 그러다 인천역에서 아버지를 딱 만난 거예요. 집에 데려갔다가 영아원에 맡겼다 하다가 7살에 서울역에 두고 갔어요.
구걸에도 다 방법이 있어요. 저는 왕초 밑에서 ‘똘마니’로 앵벌이를 했어요. 문 열어주면 발부터 밀어넣어야 해요. 식모 누나가 잘 주죠. 시골에 두고 온 동생 생각나니까요. 깡통도 없어서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거든요. 겨울 아침에 밥이 안 넘어가 국물 좀 달라고 하면, 비닐봉지에 확 뜨거운 국물을 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비닐봉지가 터져요. 얼마나 서러웠는지 몰라요. 왕초는 공터에서 물을 끓이고 있어요. 똘마니들이 밥을 몰래 먹었을까봐 입을 물로 헹구라고 해요. 고춧가루라도 나오면 얻어터지는 거죠. 그러다 서울역에서 응급차같이 생긴 단속반 차에 실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오게 됐죠.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제 별명은 ‘밥돼지’였어요. 선착순이라 늦게 밥을 먹으면 때렸거든요. 저는 어차피 맞을 거 끝까지 다 먹었어요. 어느 날, 거기서 어떤 큰 애가 막 쫓아오기에 무서워서 도망갔거든요. “너 성환이 맞지?” 그러는 거예요. 형이었어요. 형이랑 도망가기로 약속하고 용산에서 만나자 했는데, 그 전날 저 혼자 선감학원으로 보내졌어요.
선감학원에서 첫날 밤, 우는 애들이 있었어요.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길에 잡혀온 애들도 있었거든요. 저는 말하자면 5살 무렵부터 사회생활을 한 거잖아요. 울지 않았어요. 선감학원에 4개 동이 있었어요. 종달새의 집, 자활사, 자립사 이렇게 3개 동만 썼죠. 한 동에 20여 명씩 있었어요. 누가 맞아 죽어 귀신이 됐다고 해서 애들이 밤에 오줌을 쌌어요. 선감학원 기록에는 제 생일이 1959년 5월29일로 나와요. 5월29일이 선감학원 개원일이거든요. 머리 박박 깎고 동복·하복 한 벌씩, 까만 고무신 한 켤레 줬어요. 애들이 고무신엔 연탄집게로 자국을 남겨 표시를 했어요. 없어지면 맞거든요.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인원 점검부터 해요. 부락민 동네에서 대야 하나 없어져도 아침부터 ‘원산폭격’(뒷짐 진 채 허리를 굽혀 머리를 땅에 박는 행위) 시키고 때려요. 청소하고 나면 식사 시간인데 묵념하는 동안 애들이 실눈 뜨고 밥을 막 서로 바꿔치기해요.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려고요. 반찬은 검게 썩은 새우젓뿐이에요. 배가 고팠어요. 애들이 산에서 뱀, 쥐, 그런 걸 잡아먹었죠. 그러니 ‘생식을 하지 않는다’는 주훈을 돌리더라고요. 생식하다 걸리면 맞죠. 그다음엔 소와 돼지를 치거나 뽕밭, 논 이런 데 노역을 나가요. 맨손으로 풀을 뽑으라고 해요. 저는 뽕밭이 제일 힘들었어요. 열 셀 동안 뽕잎 몇 개 따오라 해요. 당연히 그만큼 못 따요. 그러면 맞죠.
전세 잡고 호적도 만들었는데…밤이 무서웠어요. 날마다 매타작이거든요. 직원뿐 아니라 덩치 큰 조장, 반장이 때려요. 곡괭이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걸어와요. 그 소리가 복도에서 막 울리고. 살려달라는 비명이 들려요. 차라리 빨리 맞는 게 나아요. 13살 때 처음 탈출을 시도했어요. 안개 낀 날, 11명이 달렸어요. 물이 들어오면 속도가 어른이 달리는 것보다 빨라요. 목숨 건 거죠. 산꼭대기에 있는 감시자를 피하려다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뭍에 닿으니 대부도더라고요. 산에서 서로 껴안고 자다 아침에 너무 배가 고파 진달래를 막 따 먹었어요. 농가까지 내려왔는데 부락민이 신고하더라고요. 잡혀오니 홍합이며 조개껍질들이 박힌 땅바닥에 머리 박으라고 해요. 피가 났죠. 그 상태에서 때리다 지치니까 우리끼리 서로 따귀를 치라고 했어요. 세게, 더 세게!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우린 살았죠. 그렇게 탈출하려다 죽은 아이들, 저도 서너 명 봤어요. 멍석으로 말아 묻었어요. 묻는 건 큰 애들이 했어요. 커봤자 13~14살이에요. 그때 원장이나 직원들은 공무원이고 경찰도 있었지만 아무 조사도 하지 않았어요. 5월29일 개원 기념일엔 경기도지사도 방문했어요. 주변 섬으로 머슴, 아니 노예로 팔려가는 애들도 있었어요. 새경 한 푼 못 받으니 머슴도 아니죠.
10명 중 1명꼴로 학교를 보내줬거든요. 도에 보고해야 하니까. 제가 공부를 좀 잘했어요. 그래서 중학교까지 가게 됐죠. 선생들이 선감학원 출신 나오라더니 이유도 없이 애들 다 보는 앞에서, 그것도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때려요. 중학교 1학년 때 하굣길에 배가 들어왔기에 그냥 타버렸죠. 한 푼도 없었어요. 그렇게 인천까지 가 구걸하다 또 잡혀왔죠. 마지막에 잡혀 들어갔을 때는 머리가 굵어 통제가 안 되니까 가라고 하더군요.
구두를 닦았어요. 식당에 단체손님 들어가면 싫다고 해도 일단 죄다 닦아놔요. 그러면 미안해서 돈을 줘요. 떠돌며 닦는 ‘떳다방’ 하다 자리도 잡았어요. 선감학원 출신을 많이 만났어요. 저는 구두를 닦는 ‘딱새’, 후배는 손님을 찍어오는 ‘찍새’를 했어요. 겨울밤, 공터에서 폐타이어를 태우며 잤습니다. 빙 둘러서. 일어나면 코가 까맣게 돼요. 그렇게 돈을 모아 5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었어요. 처음으로 호적도 만들었죠.
1980년 7월1일, 50원 넣고 전자오락을 하는데 아는 형사가 같이 가자는 거예요. 그때 구두닦이 친구들 다 잡혀갔어요. 형사가 “먹고살기 힘들지? 밥 먹여줄게” 그래요. 저녁이 되니 유치장이 꽉 찼어요. 아무거나 불고 지장 찍으면 내보내준다고 하기에, 지나가는 여자한테 휘파람 불었다고 했죠. 8월4일 삼청교육대로 가게 된 거예요.
삼청교육대 33사단 167연대 2중대 1구대에 배치됐어요.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더 때려요. 거기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요. 너무 굴리니까, 죽을 시간이 없어요. 먹는 것보다 잠이 간절했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자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자세 그대로 있습니다. 그때 맞아 척추분리증이 생겼어요. 그런데 어느 날, 4중대에 아는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형이야. 저는 그래도 중대장한테 잘 보였어요. 중대장 구두를 열심히 닦았거든. 한 달 뒤 삼청교육대를 나왔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형이 아직 거기 있으니까.
평범하게 살아보는 게 소원1970년 선감학원 안에서 열린 행사 장면. 경기창작센터 제공
삼청교육대 갔다 왔더니 사람들이 전과로 치더라고요. 구두통을 맸다간 또 끌려갈 수도 있었어요. 거리에서 만난 후배들하고 전국을 돌면서 야바위꾼을 했어요. 그러다…. 네, 후회합니다. 후배 두 명하고 집을 털려다 강도로 1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평생 시설을 들락날락하다 이렇게 인생 종치는구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어요. 1992년 노태우 정권 때 ‘범죄와의 전쟁’ 선포하면서 교도소에 건달이 넘쳤어요. 교도관들이 인간대접을 안 했어요. 제가 많이 따졌죠. 문제수로 찍혀 청송교도소로 갔어요.
포승에 묶여 내리자마자 그냥 두들겨 패요. 방 앞에서 배 까라고 하더니 방망이질을 하더군요. 온종일 한 평 독방에 가부좌를 틀어 벽 보고 앉아 있어야 해요. 간수가 지나가면 “갱생, 갱생” 복창해요. 옆방 사람하고 말 텄다간 죽도록 맞아요. 계속 비명이 들려요. 사람이 그러면 미쳐요. 옷을 찢어 천장 고리에 목매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러니 고리를 없애버리고 성경책 한 권씩 넣어주더라고요. 하루는 빵을 넣어줬는데 빵보다 빵봉지에 쓰인 글씨가 그렇게 반가웠습니다. 첫 한 달이 지나자 운동장을 조금 걷게 해줬어요.
2001년 11월 출소하는 날,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형이 와 있었어요. 형은 단란주점에서 일하며 결혼해 아이도 낳았더라고요. 그 집에 얹혀 있을 수 없었어요. 서울역으로 갔죠. 거기 가니 선감도 친구들이 있었어요. ‘S정’이라는 약을 먹으면 잊을 수 있었어요. 자포자기 상태였죠.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겨울, 노숙인센터에서 지내려 했는데 정신병원으로 가라는 거예요.
‘내가 선감학원 그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인생을 끝낼 수는 없지 않나.’ 6개월간 센터에 머물며 약, 술, 담배를 다 끊었어요. 마음속에 분노가 끓어오를 때는 달렸어요. 탈진할 때까지. 구둣방 주인이 자리 비울 때 대신 일해주거나 모텔 청소를 했어요. 열심히 돌이켜 생각해봤죠. 그래, 고마운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구걸 생활을 할 때 밤에 추우니까 도둑열차를 많이 탔거든요. 의자 밑에 숨겨주고 다리로 가려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느 아주머니는 ‘썬업’ 사이다에 빨대를 두 개 꽂아 저랑 같이 마셨어요.
10여 년 전 동네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어요. 독거노인에게 점심 배달하고 도서관 정리도 했죠. 노인들이 반가워해주니까요. 세상에 누가 저를 반기겠어요. 소원이 있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한번 살아보는 거.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다니는, 그런 평범한 삶이 정말 부러워요.
아무도 제게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지 않았어요자주 생각해요. 그날 마산포에서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면, 제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도 제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지 않았어요. 곡괭이로 때리기만 했지. 저는 어디 가서 선감학원 출신이란 걸 말한 적이 없어요. 2년 전 선감학원아동국가폭력피해대책협의회가 생길 때까지요. 선감학원에 있었다면 다들 악질 불량배인 줄 아니까. 그런데 제가 12살 때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을까요? 지금도 말 못하는 사람 많아요. 선감도에서 고기밥이 된 아이들이 몇 명인지 몰라요. 나라가 애들을 납치 감금한 거잖아요. 왜 일본한테는 강제징용에 사과, 배상하라 하면서 자기 국민한테 잘못한 건 사과하지 않나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선감학원은
부원장 아들 소설로 처음 알려져
“천황폐하의 감사한 호의로 우리들도 국민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명예로운 일본의 군인이 된다는 일은 더없는 행복이다….” 1943년 11월, 선감학원 야외 교육 현장을 담은 사진 속에서 군복을 입은 한 교관이 칠판에 쓴 글을 가리키고 있다. 그 앞에 줄지어 앉은 아이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선감학원은 조선총독부가 지원하는 경기도 사회사업협회가 ‘부랑아’를 “꿋꿋한 황국신민”으로 키운다는 목표로 1942년 5월29일 설립했다. 민간단체인 사회사업회를 내세웠지만 실제 운영 주체는 조선총독부였다. 일제강점기엔 순사, 간수, 전역한 군인 등이 교관으로 파견됐다. 원생들은 가혹한 강제노역과 매질에 시달렸으며 도망치려다 숨지기도 했다. 1944년 는 ‘잘 있거라, 선감도’ 기사에서 원생 21명을 강원도 삼척 탄광에 “산업전사”로 보냈다고 보도했다.
해방 뒤부터 1982년 폐쇄 때까지 선감학원은 경기도가 직접 운영했다. 1963년 제정된 선감학원 조례에는 “8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동을 할 우려가 있고 적당한 친권을 행사하는 자가 없는 자”를 수용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구두닦이, 신문팔이를 비롯해 입성(옷)이 허름할 뿐 연고가 명확한 아이들도 경찰과 공무원이 잡아가뒀다. 그 과정에서 인적사항을 바꿔 기록하기도 해 보호자가 아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 “수원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장난감총 만들려 나무젓가락 줍다 경찰에 잡혔다” “큰아버지 집에 가던 중 잡혀 선감학원에 왔다”고 피해생존자들은 증언했다.
전체 피해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952년부터 1982년까지 ‘퇴원아 대장’에는 총 4710명의 신상이 기록돼 있다. 입소 연령은 8~13살이 1920명(40.9%)으로 가장 많고, 7살 이하도 63명(1.3%)이다. 서울, 충남, 전남, 경북 등 전국에서 잡혀왔다. 사망은 24명(0.5%), 무단이탈은 833명으로 적혀 있지만 피해생존자들이 직접 묻었다고 증언한 여아무개의 경우, 무단이탈로 기록됐다. 사망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들은 모두 일상적 가혹 행위와 굶주림, 가혹한 강제노역을 증언한다. 원생들은 목욕할 기회가 없었는데도 수시로 손톱 검사 등 위생 검열을 당해 맞았다. 강제로 축사, 뽕밭 등으로 끌려가 일했다. 학교엔 10명 중 1명꼴로 보냈으며 호적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부랑아 갱생’을 목표로 내건 선감학원에서 나온 뒤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해 나온 국가인권위원회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 보고서’를 보면, 피해생존자 2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퇴소 후 5년간 생계유지를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에 절반이 “구걸과 부랑”이라고 답했다. 최종학력은 “무학”이 9명(32.1%), “초등 중퇴”는 5명(17.9%)이었다. 응답자 절반은 “선감학원 입소 경험이 타인에게 드러나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선감학원 실상은 1990년대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선감학원 부원장의 아들인 이하라 히로미쓰가 1989년 소설 를 발표하고, 이 책이 1995년 한국에 번역되면서 참상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에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한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은 “어린 싹을 잘라버린 완벽한 국가폭력”이라며 “피해생존자들이 떳떳이 나서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7년 7월 경기도의회는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 제도적 대책이 필요”하다며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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