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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계엄 40년’의 폐해

대만 계엄 통치 “통치자가 국민과 유리된 탓”…

서방은 계엄 선포와 효력 기간·범위 크게 제한
등록 2018-08-14 16:29 수정 2020-05-03 04:29
<font color="#008ABD"><font size="4">계엄의 폭력</font>
계엄에서 학살된 수가 1만1131명. 여순사건, “남녀아동이라도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계엄포고령에 담긴 이승만의 말 한마디에 무고한 양민이 학살됐다. </font>
대만 현대사에서 첫 계엄령 선포의 계기가 된 1947년 ‘2·28 사건’ 당시 숨진 희생자들의 유족과 친구들이 2015년 2월28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주도한 2주간의 진압작전에서 숨진 대만 본성인이 2만8천여 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AP 연합뉴스

대만 현대사에서 첫 계엄령 선포의 계기가 된 1947년 ‘2·28 사건’ 당시 숨진 희생자들의 유족과 친구들이 2015년 2월28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주도한 2주간의 진압작전에서 숨진 대만 본성인이 2만8천여 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AP 연합뉴스

현재 전세계적으로 한국을 포함해 최소 20여 개국에서 ‘계엄’(국가비상사태·긴급사태 등)을 법제도의 하나로 두고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국외 계엄 사례를 종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연구한 자료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계엄 실무를 관장하는 합동참모본부가 7월23일 공개(열람으로 제한)한 계엄 가이드북인 에 프랑스·독일·미국 등 일부 사례가 요약됐고, 대만·타이·필리핀·시리아·이란·이집트·터키·캐나다 등 계엄령을 선포한 적 있는 개별 국가들의 전례가 기사 등으로 조각조각 확인되는 정도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0번 등장했던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통치자가 국민과 유리됐을 때 나타난 가장 극단적인 현상”(김민환 한신대 교수)으로서 계엄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대만이다. 비상사태 때 짧게, 길어도 몇 년 안에 끝내야 할 계엄통치를 무려 40여 년간 한 나라가 바로 대만이다.

장제스의 국민당(중화민국)은 ‘이중의 소수’ 정권이었다. 헌법상 중국대륙 전체를 다스려야 하는데 실제로는 대만만 통치했고, 대만 안에서도 150만 외성인(국공내전 뒤 중국 본토에서 탈출한 중국계)이 2천만 본성인(명나라 때부터 대만에 건너와 살던 중국계)을 지배했다. 이런 독특한 정치 구조가 계엄을 반세기 가까이 유지시킨 주요 원인이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만 ‘2·28 사건’과 계엄령</font></font>

일본은 1945년 패망하면서 동북3성과 대만성을 중국에 돌려줬다. 국민당은 적의 손에서 되찾은 두 성을 특별 관리하려고 행정장관공서제도를 도입해, 국민당이 임명한 행정장관인 성장에게 입법·사법·행정 전권은 물론 군사권까지 부여했다.

천이 대만성장 시기인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시에서 사제 담배 판매를 단속하던 전매국 직원이 린장마이라는 노인 노점상을 총대로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지켜본 군중의 반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숨졌다. 성난 군중의 요구로 2월28일치 신문에 사건이 보도됐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대만 본성인들이 외성인의 통치에 반발해 일으킨 ‘2·28 사건’인데, 이때 천이 대만성장이 첫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당은 중국대륙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과 국공내전 중이었음에도 3월8일 대만으로 진압군을 파견해 천이를 지원했다. 3월21일까지 대대적인 본성인 숙청을 벌였는데, 2주간 2만8천여 명이 희생됐다고 추산할 정도다.

2·28 사건으로 선포된 계엄령은 5월16일 해제됐지만, 사실상 1949년 5월20일 대만 전역에 다시 계엄령이 선포될 때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장제스는 1947년 헌법에 끼워넣을 ‘동원감란(動員戡亂)시기임시조관’을 만들었다. 이후 1948년 국민대회(국회)에서 이를 추인받았는데, 장제스의 비상대권과 계엄을 정당화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동원감란시기란 반란으로 규정한 좌익활동을 탄압하기 위한 국가총동원 시기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전쟁 상태를 의미한다.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은 제1조에서 “총통은 동원감란시기에, 국가와 인민의 긴급한 위난을 회피하거나 재정경제상의 중대한 변고에 대응하기 위하여 행정원의회의 의결을 거쳐 긴급처분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헌법 제39조 또는 제43조에 규정된 절차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며 총통의 긴급처분권을 규정하고 있다. 국민당은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에 이어 국가총동원법·동원감란시기징치반란조례·동원감란시기비첩숙청조례 등을 잇따라 제정했고 계엄 시기 기본권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됐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장제스 총통은 신장·티베트·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역에 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1949년 장제스 총통의 명령에 따라 행정원의회(행정부 회의) 의결을 거쳐 대만성장이 대만 전역에 계엄을 선포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만의 민주화 역사</font></font>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1949년 12월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옮겨왔다. 국민당은 계엄령을 통해 행정·입법·사법 3권을 장악한 채 1당 독재정치를 이어갔다. 이른바 ‘백색테러’ 시기인데, 1949~59년에만 4천 명이 총살되고 1만 명 이상이 투옥됐다고 추산한다.

대만에서 민주화 역사는 곧 계엄령을 해제하고 국민당 이외의 정당을 창당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다. 1949년 계엄 선포를 기준으로 38년 만인 1987년 7월 장제스의 장남인 장징궈 총통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제10조에 따라 계엄령 해제를 선포했다. 하지만 동원감란시기가 공식 종식된 것은 1991년 5월1일로, 장징궈 사후 리덩후이 총통이 새 수정헌법 시행을 공포했다. 중국대륙과 가까운 진먼(금문)·마쭈(마조)는 1992년 11월에야 계엄령이 해제됐다. 완전 종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만은 무려 43년간 계엄통치가 이어진 셈이다.

김민환 교수는 에 “국민당이 겉으론 대륙의 큰 도둑 공산당을 핑계 댔지만, 통치자가 국민을 못 믿어서 선거·집회·결사·언론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 것”이라며 “장징궈는 계엄 시기에 서로 역할이 겹치지 않는 50여 개 정보조직을 둬 촘촘하게 국민을 감시했고 ‘100명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1명의 간첩을 놓치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정작 1700년대부터 계엄 제도를 선구적으로 도입했던 서방국가들은 19~20세기 계엄 선포와 효력 기간·범위를 크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다만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공격을 이유로 최근 몇 년간 대테러법이 강화되면서 ‘비정상의 일상화’에 대한 인권 전문가들의 우려도 커지는 추세다.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근대 계엄 제도를 법제화한 대표적인 국가다. 프랑스대혁명 위기관리를 위해 1791년 ‘군사지역의 유지와 분류에 관한 법률’에서 “적 공격시에는 질서유지를 위하여 헌법에 의하여 민간관리에게 부여된 모든 권한을 (중략) 군사령관에게 이관한다”며 국가비상사태(계엄)를 실정법화했다. 프랑스의 국가비상사태 선포권은 국가원수에게 있었지만 1877년 군사령관 마크마옹의 쿠데타 실패 이후, 의회 폐회 등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곤 의회가 행사하도록 개정됐다. 이후 1958년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국무회의에서 계엄을 선포하도록 했고, 효력 기간도 12일로 제한했다. 기간을 연장하려면 의회 승인을 얻어야 했고, 경찰권만 군에 이양됐고, 군이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범위도 주야간 가택수색 등 4가지로 엄격히 제한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공권력의 자의적 판단 범위 넓히기</font></font>

20세기 이후 프랑스 본토에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건 총 세 차례다. 가장 최근이 2015년 11월13일 130명이 숨진 파리 연쇄테러 때다. 파리 테러 이후로도 니스 등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한 크고 작은 테러 공격이 잇따르자, 비상사태가 2년이나 연장됐다. 프랑스는 2017년 11월 국가비상사태 해제와 함께 평시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국가비상사태를 대체하는 더 강력한 대테러법이 시행됐다. 군이 민간 통치를 대체하는 계엄은 아니지만, 영장 없는 가택연금, 불심검문, 전화·전자우편 감청 등 공권력의 자의적 판단 범위를 크게 넓혀 국가비상사태를 사실상 영구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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