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아닌 세대로 봐주세요.”
한 방 먹었다. 애초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자유한국당 최후의 보루, 대구마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누구보다 청년층 민심 이반이 크다는 데 집중해서 말이다. 그런데 대구에 사는 청년들은 이미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 “지역주의는 어르신들한테만 남아 있다”며 ‘대구=보수’ 공식을 거부했다. 언론에서 지역 차이를 그만 부각하고 세대 차이에 집중해달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탄핵 뒤 불어온 변화의 바람5월30일 저녁 7시. 대구 중심가인 동성로의 한 브런치 카페에서 20~30대 대구 청년 5명과 만났다. 대학생, 취업준비생, 직장인, 노동조합 활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 비교적 다양한 직업군을 만났다. 이들의 정치 성향은 중도보수에서 진보까지로 지지 정당은 바른미래당,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중당 등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뒤 이들의 정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엿보고 싶었다. 각자 지인의 지인으로 소개받아 서로 어색하게 ‘루꼴라새우토마토 피자’와 ‘감바스 피칸테 알 아히요’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페일에일 맥주가 한 순배 돌자 슬슬 이야기도 돌기 시작했다. “대구에 변화가 있죠. 그런데….” 대구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직장인 유주환(27)씨는 미디어가 ‘대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언급했다.
“약간의 낙인 같아요.” 유씨는 대구가 ‘보수의 아성’으로 묘사되는 게 싫었다. 다른 지역 사람을 만날 때 출신 지역을 밝히기 꺼려지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대구에서 왔다고 하면 표정이 바뀌는 걸 느껴요. 대구 사람들은 다 ‘자한당’ 찍는다고 믿는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굉장히 기분 나쁘죠.” 다른 4명도 미디어에서 선거 결과를 알릴 때 대구·경북 지역을 온통 빨간색으로 표시하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대구가 단일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외부의 시선에 선을 긋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다만 탄핵 뒤, 대구가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대구의 변화는 시민단체와 노조의 성장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오전 11시 기자는 동성로의 대구청년유니온(대구청유) 사무실을 찾았다. 대구청유는 탄핵 뒤 훌쩍 성장했다. 조합원 수가 2015년 65명에서 2017년 86명으로, 후원회원은 80명에서 102명으로 늘었다. 대구 토박이인 이건희(29) 대구청유 위원장은 “홍보를 별로 안 했는데도 정책제안 기획단 등에 함께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청년이 많아지는 등 변화를 피부로 체감한다”고 말했다.
탄핵 이후 대구청년빚쟁이네트워크(청빚넷), 청춘꿈공작소 등 새로운 청년모임도 등장했다. 이태욱(28) 청빚넷 공동대표는 “올해 2월 청빚넷을 창립했다. 청년들이 빚쟁이가 되는 이유가 학자금, 저임금 등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걸 알리고 청년자조금융도 준비하고 있다. 탄핵 뒤 이런 새로운 시도가 대구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만난 청년들은 ‘정치세력 교체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 추동력이 탄핵이 촉발한 거대한 에너지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대구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3학년인 안유진(24)씨는 당시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다고 했다. “진짜 속이 시원했어요. 어른들한테 뒤통수를 날린 거잖아요. ‘너네가 아무리 그래도 안 될 거야’라고 했는데, 결국 성공했잖아요.”
유주환씨는 말한다. “탄핵 때 대구에서 열린 촛불시위에 참석하고 서울 집회까지 다녀왔어요.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석한 건 처음이에요. 내가 시위에 참가해 뭔가 바꿀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첫 사건이라 저한테는 의미가 크죠. 탄핵 이후 민주당 권리당원으로 가입하고 후원을 하는 등 정치 참여가 적극적으로 변했어요.”
커져가는 부모 세대와의 갈등청년층의 말문이 트였다는 것도 큰 변화다.
대구에서 태어났고 현재 IT(정보기술) 분야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이진수(35·가명)씨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놀 때 보통 정치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 주제였는데 탄핵 계기로 바뀌었다. 친구들이 보수적인 부모한테 일방적으로 듣던 거에 의문을 갖고 내게 궁금한 걸 물어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청년들의 말문이 트이니, 정치권 일각에서도 대구청유의 정책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기자가 취재를 간 지난 5월30일은 민주당의 임대윤 대구시장 후보가 대구청유와 정책협약식을 맺는 날이었다. 수온주가 30℃ 가까이 오른 후덥지근한 날 대구청유 사무실이 있는 5층까지 땀을 흘리며 계단을 걸어 올라온 임 후보는 기자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리며 “요즘 대구 젊은층의 변화를 많이 느낀다”고 희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거시적인 변화는 미시적인 갈등으로 나타난다.
탄핵 뒤 정치적 표현을 하는 청년이 늘면서 부모와 갈등도 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진수씨는 “70대 고모부는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린 게 너무했다고 하신다. 나한테 (보수 진영에서 만든) 유튜브 영상이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다. 나도 맞서서 이야기하는 편이라, 반대 의견을 꺼내면 그때부터 전쟁이다”고 했다. 대구 토박이인 장수현(26)씨는 “할머니가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나는 안 싸우려고 아예 정치 이야기를 안 꺼낸다”고 했다.
대구시도 청년위원회를 만드는 등 젊은층의 의견을 받아안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지는 의문이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오후 3시께 동성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대구 토박이 손지수(23) 대학·청년YWCA전국협의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2016~2017년 대구시 청년위원회에 참여했는데, 너무 보여주기식으로 운영된다고 느꼈어요. 시에서 의견을 달라고 해서 청년들이 머리 싸매고 정책을 만들어도 결국 반영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이걸 왜 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열정적인 사람은 결국 다 그만두게 돼요.”
대구 청년층에서 그리 높지 않은 한국당 지지율은 여론조사로도 드러난다.
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여론조사 전문기관 글로벌리서치와 함께 5월25~26일 대구 성인 804명에게 정치인식 여론조사를 했다. 전체 연령대로 보면 대구시장 지지도에서 한국당 권영진 후보(30.1%)가 민주당 임대윤 후보(24.3%)를 앞서고 있다.
하지만 20~40대만 떼놓고 보면 거꾸로 민주당 임 후보가 앞서는 상황이다. 세대별로 임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은 20대 16.2%, 30대 41.2%, 40대 36.1%였다. 반면 한국당 권 후보는 20대 10.4%, 30대 13.7%, 40대 26%였다. 2040세대에서 모두 민주당이 앞서고, 30대에서 차이가 크다. 김형기 바른미래당 후보는 20대 6.5%, 30대 1.2%, 40대 5.5%로 3위에 머물렀다.
구청장 등 기초단체장으로 가면 청년층에서 민주당이 앞서는 경향이 더 커진다. 세대별로 민주당을 뽑겠다는 비율은 20대 24.4%, 30대 49.4%, 40대 43.3%였다. 반면 한국당은 20대 13.7%, 30대 12%, 40대 20.2%로 민주당보다 11~37%포인트 낮았다. 바른미래당은 20대 5.8%, 30대 3.2%, 40대 6.5%였다. 정당 지지도는 심지어 전체 연령대에서도 민주당(30.6%)이 한국당(23.1%)을 앞섰다.
익숙한 무기력과 변화의 갈림길“안 변할 것 같지만 투표는 하겠다.”
대구 청년층은 익숙한 무기력과 희미하게 싹튼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여론조사에서 대구 지역의 정치세력 교체가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20대 70.8%, 30대 74.5%, 40대 82.9%)하는 등 변화를 바라는 열망이 크다. 하지만 당장 이번 지방선거에서 세력 교체가 있을지 묻는 질문엔 회의적 답변이 많았다. ‘거의 변화 없을 것 같다’(20대 46.1%, 30대 38.2%, 40대 33.6%)와 ‘약간 변할 것 같다’(20대 40.7%, 30대 54.4%, 40대 53.5%)는 응답이 엇비슷한 상황이다. ‘크게 변할 것 같다’(20대 7.5%, 30대 2.0%, 40대 10.7%)는 매우 낮게 나타났다.
그동안 대구에선 청년층의 정치 참여도가 낮다보니 청년정책이 선거에서 주요 의제로 떠오르지 않고, 결국 정치 효능감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돼왔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대구의 30대 투표율은 40.4%로 모든 지역·연령을 통틀어 가장 낮았다. 대구의 20대 투표율(44.2%)이 그 뒤를 이었다.
이번 6·13 지방선거는 다를까.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청년층의 투표 의지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여론조사에서 ‘반드시 투표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이 20대 51.9%, 30대 58.5%, 40대 69.2%로 2014년 지방선거에서 실제 2040세대의 투표율보다 10~20% 높게 나타났다. ‘아마 투표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20대 31.5%, 30대 24.8%, 40대 20.5%)까지 합치면 80~90%가 투표한다고 답한 것이다.
김보현(26) 대구시민센터 매니저는 너무 한순간에 큰 변화를 기대하지 않길 바랐다. “바깥에서 대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야박하다고 느껴요. 정치 기사 댓글을 보면 대구 비하가 굉장히 심각해요. 외부에서 오히려 대구를 고립시키는 게 아닌가요? 작은 변화는 대구 안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다만 한국당이 혈연·학연·지연 등 인맥으로 여전히 지역을 촘촘히 장악하고 있어서 큰 변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실 청년층 민심은 이미 예전에 한국당을 떠났다.
그럼에도 정치세력이 교체되지 않은 이유는 청년층이 힘이 없어서다. 워낙 청년층 감소가 빠르고 투표율이 낮다. 대구는 인구 감소율이 높은 도시로 손꼽히는데, 유출인구의 절반 이상이 20대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탓이다. 현재 취업준비생인 장수현씨는 “특히 사무직에서 여성에게 좋은 일자리가 없다. 대구에 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에 5년째 살고 있는 김보현 매니저는 “정치에 대한 관심도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대구를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투표를 안 하거나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일자리 바뀌면 대구도 바뀔 것대구 토박이 직장인 박인호(27)씨는 일자리가 바뀌면 대구도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다보니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나이 든 분들만 남아서 고인 물이 되고 있죠. 대구도 동성로 아니면 청년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누가 다음 대구시장이 되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 많은 논쟁이 오가며 정치적 성향도 바뀔 겁니다.”
여론조사 개요
조사방법 : 전화면접조사(CATI)
대상: 대구에 사는 19살 이상 성인 804명
기간: 2018년 5월25~26일
응답률: 21.3%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5%포인트
가중치 부여방식 : 지역별/성별/연령별 가중치 부여(2018년 4월 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 기준)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원회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길게 일하고 적게 버는 대구 청년들
열악한 일자리, 낮은 정치 참여
대구 청년들은 길게 일하고 적게 번다. 대구청년유니온이 2016년 10월부터 11월까지 두 달간 대구 동성로에서 만 15~39살 청년 802명에게 직접 면접조사를 해 만든 ‘대구지역 직종별 청년노동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이하 실태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실태조사에서 청년들은 평균 1주일에 51.5시간 일하고, 한 달에 175만원을 받는다고 답했다. 또 최저임금으로 임금이 결정된다고 답한 비율이 25.7%에 이르렀다.
장시간·저임금 노동이 만연한 이유는 청년들이 주로 영세사업장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대구의 주요 산업 기반은 민간 서비스와 소규모 제조업 공장으로, 실태조사 결과 50인 미만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청년이 68.9%에 달했다. 이런 결과는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만든 ‘청년층 지역노동시장 구조와 일자리 창출 방안’ 보고서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난다. 보고서는 “대구권역의 청년층은 서울과 다른 광역시와 비교해 현저히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영세 소규모 사업체의 종사자 수 비중이 현저히 높다”고 지적한다.
열악한 일자리 환경은 정치 참여의 적극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건희 대구청년유니온 위원장은 “노동시간이 길고 가난하다보니, 지역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쏟을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직장과 가정 내 권위적인 문화도 한몫한다고 이 위원장은 덧붙였다.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유독 ‘상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직장 내 위계질서가 강하고 상사 개인이 출퇴근이나 초과근무, 업무평가를 대부분 결정해요. 영세하다보니 대부분 노조도 없어 불합리한 조직 문화를 개선하기도 힘들고요. 성희롱 상담도 많이 들어옵니다. 전반적으로 청년들의 발언권이 약한 환경이에요.”
이런 환경은 보수 성향이 대물림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이진수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생산직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집에서 부모와 친척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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