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20세기 인류를 옥죄었던 ‘차가운 전쟁’이 화해의 훈풍에 녹아내린 게 대체 언제인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하염없이 흘려보냈다. 간혹 기회의 문이 열리긴 했지만, 여지없이 칼바람이 들이닥쳤다. 전쟁 위기가 불을 뿜을 뿐, 꽁꽁 언 땅은 지구촌에서 홀로 남은 ‘냉전의 섬’이었다. 다시, 제자리다.
10년6개월 만에 다시 만난 남과 북2018년 4월27일 오전 9시29분께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 앞에 섰다. 마주 걸어오는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의 얼굴엔 이미 환한 웃음이 번져 있다.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자른 군사분계선, 그 맨 앞에 선 두 정상이 뜨거운 손을 맞잡았다.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다시 만나기까지 옹근 10년6개월이 걸렸다.
“안녕하십니까?”
“예, 어서 오세요. 오시는 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뭐, 정말 마음 설렘이 그치지 않고요.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만나니까, 또 대통령께서 이렇게 분계선까지 나와서 맞이해주시니 정말 감동스럽습니다.”
“여기까지 온 건 위원장님의 아주 큰 용단이었습니다.”
“아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실까요?”
1953년 7월27일 체결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정전협정) 제7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사민이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함을 허가하지 않는다.”
이윽고 김 위원장이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사상 처음으로 군사분계선 남쪽 땅에 발을 디딘 순간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잠시 기념촬영을 한 두 정상은, 손을 맞잡고 등을 돌려 군사분계선을 되짚어 다시 넘었다. 그리고 한번 더 넘었다. 지난 65년 세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벽’으로 여겨졌던 군사분계선을 넘나들기가 이리도 쉬웠다. 굳건하게만 보였던 ‘냉전의 신화’, 그 한쪽이 허물어졌다. 지난 1년 살얼음판 같은 전쟁의 먹구름을 헤쳐온 한반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문 대통령의 평화 구축 노력모든 것의 시작은 ‘촛불’이었다. 제19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대로 2017년 12월20일 치러졌다면, 김 위원장의 지난 1월1일 신년사 내용도 달라졌을 게다. 북한이 평창겨울올림픽에 참가하는 것도 어려웠을 게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간접대화’ 방식으로 만들어낸 새롭고 역동적인 한반도 정세, 평창이 만들어낸 기회의 문인 ‘평창 평화체제’(이하 평창체제)도 불가능했을 터다.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린 촛불시민이 ‘평창체제’를 만들어낸 게다. 꼭 1년 전인 2017년 4월27일치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이 새삼스럽다. ‘사드 핵심장비 기습배치… 정권 교체 전 알박기’.
지난해 5월14일 새벽 5시27분께 평안북도 구성 외곽에서 탄도미사일 한 발이 날아올랐다. 최대 사거리 4500~5천km로 괌 타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 12형’이다. 취임 닷새째, 문 대통령은 서둘러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상황실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주재해야 했다. 상황이 꼬이는 듯했다.
첫 한-미 정상회담이 빠르게 추진됐다. 지난해 6월29~3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회담 당시 문 대통령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연설에서 “나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며, 북한 정권의 교체나 정권의 붕괴를 원하지도 않는다. 인위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가속화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의 체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이른바 ‘4노(No)’ 정책이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의 계기로 삼기 위한 행보도 본격화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3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이 참여한다면 올림픽 정신 고취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과 세계의 평화, 그리고 인류 화합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창체제’를 만들기 위한 밑돌이었다.
북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지난해 7월4일 정상 각도로 발사하면 사거리가 6700k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화성 14형’이 날아올랐다. 이튿날 독일 방문과 주요 2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는 문 대통령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이 한계점에 이른 지금 대화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다.”
간절함이 묻어났다. 지난해 7월6일 독일 베를린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평화 △비핵화 △평화체제 △신경제지도 △교류협력 등을 열쇳말로 한 ‘베를린 평화구상’을 발표했다. 그는 연설에서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평화의 제도화’ 등을 유독 강조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북-미 간 ‘말의 전쟁’과 8월 위기설‘화성 14형’은 지난해 7월28일 밤 11시41분께 자강도 무평리 일대에서 다시 발사됐다. 앞선 발사와 달리 정상 발사했을 때 최대 1만400km를 날아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미 본토 타격 능력을 갖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란 뜻이다.
일주일 남짓 뒤인 지난해 8월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석탄·철광석·수산물 등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대북 제재 결의 2371호를 채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월8일 기자들과 만나 “북한은 더 이상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계속 그런다면) 세상에서 본 적 없는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미국은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장거리전략폭격기 B-1B ‘랜서’ 2대를 한반도 상공에 전개했다.
북-미 간 ‘말의 전쟁’ 수위가 아슬해졌다. 북쪽에서 ‘서울 불바다’ ‘괌 포위사격’ 같은 생경한 표현이 쏟아져나오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영리하지 못한 행동을 할 것에 대비해 군사적 해법이 완벽하게 준비돼 있다”고 맞받았다. 말뿐이 아니었다. 북한은 지난해 8월28일 다시 ‘화성 12형을 시험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선언했다. ‘8월 위기설’이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코리아 패싱’이란 말은 그 무렵 등장했다.
숨 고를 새 없이 9월에도 위기는 이어졌다. 지난해 9월3일 북한은 역대 최대 규모의 6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유엔 안보리는 불과 일주일 만인 9월11일 북한의 정유제품 수입량에 상한선을 두는 것을 뼈대로 한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를 채택했다. 북한은 9월15일 다시 ‘화성 12형’을 쏘아올렸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9월21일(현지시각)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평화’를 30번이나 입에 올린 이유다.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 이어진 광장이었다. 폭력보다 평화의 힘이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분과 유엔이 촛불이 되어달라.”
비교적 잠잠했던 10월이 지나고, 한반도 위기가 정점을 향해갔다. 지난해 11월20일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북한은 11월29일 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정상 각도로 발사할 경우 1만3천km를 날아갈 수 있을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동부 지역을 포함한 미 본토가 사정권에 있다는 뜻이다. 북한은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미국에선 ‘선제타격론’이 흘러나왔다. 올림픽 개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미 양국은 올림픽 기간에 합동 군사훈련을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나는 미국 쪽에 그런 제안을 했고, 미국 쪽에서도 지금 검토하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북한에 달려 있는 문제다.”
김정은 신년사의 대반전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9일 강원도 강릉행 열차 안에서 미국 《NBC》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해 9월 유엔 총회 때 관례에 따라 평창겨울올림픽 휴전 결의안을 제출해, 11월13일 만장일치로 채택되게 한 바 있다. 평창올림픽 개막 일주일 전(2월2일)부터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폐막 일주일 뒤(3월25일)까지 유엔 회원국들이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는 게 결의안의 뼈대다. 군사훈련도 ‘적대 행위’에 해당한다.
한반도 위기의 골이 깊어지던 지난해 4월, 중국은 ‘쌍중단-쌍궤병행’을 해법으로 내놓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과 한-미 군사훈련을 동시 중단해 대화의 물꼬를 트고,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맞바꿔 한반도 위기를 끝내자는 제안이다. 문 대통령의 ‘군사훈련 연기 검토’ 발언은 ‘쌍중단’의 한쪽 의무를 이행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었다.
“조성된 정세는 지금이야말로 북과 남이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북남관계를 개선하며 자주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남조선에서 머지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경기대회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될 것이며,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1월1일 내놓은 신년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문 대통령의 ‘군사훈련 연기 검토’ 발언에 대한 화답이었다. 이튿날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북쪽에 고위급회담을 제안했다. 1월3일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이를 수용했다. 같은 날 오후엔 2016년 2월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이후 끊겼던 판문점 연락 채널이 1년11개월 만에 전격 복원됐다. 1월4일엔 한-미 정상 간 통화에서 연합훈련 연기가 확정됐다. 불과 나흘 만에, 기적처럼 평창체제 구성 요건이 모두 채워졌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1월9일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은 △평창올림픽 북쪽 대표단·선수단 파견 △군사당국회담 개최 △고위급회담과 각 분야 후속 회담 개최 등 3개항에 합의했다. 막혔던 하늘길과 땅길, 바닷길이 뚫렸다. 북쪽 예술단이 남녘 동포와 만났다. 북쪽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은 남쪽 선수단과 합동훈련에 들어갔다. 올림픽 개막에 앞서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특사 자격으로 방남해 남북 정상회담을 공식 제의했다. 문 대통령은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화답했다. 평창체제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남과 북의 두 지도자는 마치 대화를 나누듯, 협상도 없이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대가 원하는 바를 미리 내놓아, 다음 단계로 넘어갈 활로를 텄다. 파격의 연속이었다. 지난 3월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남쪽 특별사절단을 만난 김 위원장은 오래 기다려온 발언을 내놨다.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란 비핵화 원칙과 ‘군사적 위협이 없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이란 비핵화 조건을 밝힌 게다. 막말을 주고받던 북-미 정상의 회담도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김 위원장은 전용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셈이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세계에 엄숙히 천명한다.”
촛불이 만든 ‘평창체제’의 힘2018년 4월27일 오후 5시59분께, 남북 두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서명했다. 한반도를 휘감아온 냉전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촛불이 만들어낸 평창체제의 힘이다.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김 위원장이 평화의집 방명록에 남김 글귀처럼 말이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불교계, ‘윤석열 방어권’ 원명 스님에 “참담하고 부끄럽다”
[단독] “윤석열, 체포 저지 위해 무력사용 검토 지시”
‘군인연금 월500’ 김용현, 체포 직전 퇴직급여 신청…일반퇴직 표기
경호처 직원 ‘전과자’ 내모는 윤석열…우원식 “스스로 걸어나오라”
나훈아, ‘왼쪽 발언’ 비판에 “어른이 얘기하는데 XX들 하고 있어”
임성근 “채 상병 모친의 분노는 박정훈 대령 말을 진실로 믿은 탓”
영장 재집행 않고 주말 보내는 공수처…‘경호처 무력화’ 어떻게
대통령 관저 앞 집회서 커터칼 휘두른 50대 남성 체포
최수종 등 연예인 35명 ‘이명박 지지’ 선언
판사 출신 변호사 “경호처 직원 무료변론…불법적 지시 거부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