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0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사회주의 개헌·정책 저지투쟁본부’ 현판식이 열렸다. 홍준표 대표는 거리투쟁까지 선언했지만, 당 내부에서조차 지도부의 ‘색깔론’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연합뉴스
한국에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을 시민이 직접 투표로 뽑는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것은 1995년이다. 이후 23년이 흘렀지만, 지자체는 여전히 중앙정부에 종속돼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 때문에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하려는 탄핵 정국과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을 선출한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여야 모두 지방분권 확대의 필요성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이끄는 홍준표 대표는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5월 개헌투표와 지방선거를 연동하겠다며 ‘지방분권개헌국민협약’까지 맺었다.
개헌안에 ‘연방’ 용어 안 담겨그러나 해가 바뀌고,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개헌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하자 개헌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지방분권은 본격적인 공론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색깔론으로 얼룩졌다. 현재 지방분권 확대를 둘러싼 여야 간 의미 있는 토론은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홍준표 대표의 ‘달라진 태도’다. 그는 2월26일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의 방남 저지 농성장에서 “(문재인) 정부가 연방제 수준의 지방자치를 하려고 한다. 종국적 목표는 (북한이 주장하는) 남북연방제 통일”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지방분권 확대 방침에 색깔론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북한-천안함-김영철-평양’을 ‘지방분권-(문재인) 개헌’과 연결해 보수 표심에 호소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 발언이 있기 하루 전, 홍 대표는 “청와대 주사파들이 고스란히 북에 나라를 바치는 모습으로 가고 있다. 일차적으로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개헌을, 이차적으로 낮은 단계 연방통일을 하려는 술수이자 한국 사회 체제 변경 시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홍 대표의 색깔론은 큰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홍 대표의 방남 반대 시위에도 김 부위원장은 별일 없이 평창겨울올림픽에 참석했다 돌아갔고, 청와대는 한 달 뒤인 3월21일 지방분권 개헌안을 내놓았다.
대통령 개헌안은 노무현 정부가 10여 년 전에 내놓았던 지방분권과 수도 이전의 가치를 이어받아 중앙에 집중된 권한을 과감하게 지방으로 이전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먼저, 현재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지방자치단체’라는 용어를 ‘지방정부’로 바꿔 말하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면서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는 선언을 담았다. 또, 현행 헌법 제117조와 제118조에 담긴 지자체의 업무 조항(“지자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에 자치입법권·조직권·재정권을 더해 분권의 실질을 기한다는 목표도 설정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이에 대해 “자치와 분권, 불평등과 불공정을 바로잡아달라는 것은 국민의 명령이고 시대정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홍 대표의 주장과 달리 개헌안에 ‘연방’이라는 용어는 담기지 않았다.
“지방분권 좌우 함께하는 개헌 과제”그럼에도 야당의 공세는 그칠 줄 모른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4월2일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바꾸는 대통령 안은 지방분권의 이름으로 사실상 연방제를 도모하는 것”이라며 대화의 여지를 차단했다. 김 원내대표는 이어 “자유한국당은 (대통령 개헌안대로 지자체를) 지방정부라 부르지 않겠다. 지방분권 강화를 위한 방향은 다 수용하나 국회의 통일성과 통합성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은 왜 이런 태도를 보일까. 코앞으로 다가온 6·13 지방선거 방정식에 대입하면 속내는 쉽게 드러난다. 현재 자유한국당은 호남 지역에선 아예 후보를 내지 못할 만큼 인물난을 겪고 있다. 이에 비해 정부·여당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국회에 개헌안을 던지는 등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지방분권 이슈가 선거의 주요 쟁점이 되면 최악의 참패를 면하기 힘들다. 헌법학 권위자로 꼽히는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3월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 지방분권 개헌안, 무엇이 문제인가’ 정책토론회에서 “지방분권을 강화하려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여당은 그렇게 쉬운 일을 뒤로하고 동시투표와 지방분권만 외치고 있다. 이는 지방선거에서 개헌을 이용하려는 불순한 개헌몰이”라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이어 지방재정과 관련해 지방교부세율을 고치는 것은 지방교부세법 개정으로 가능하고, 인사권을 지자체장에게 주는 것은 대통령령에서 정할 문제라고 했다. 법률 개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문재인 정부가 개헌 이슈로 몰고 간다는 말이다.
학계에선 지방분권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금기 취급을 받는) 연방제를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4월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의 과제’ 토론회에서 “지방분권을 위한 통치 체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 한 가지 방안이 연방제 방식이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이회창 후보는 강소국 연방제를 공약으로 내놨고, 이를 대선 뒤 자유선진당 당론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기우 인하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같은 자리에서 “연방제 헌법 개정은 김영삼 정부 당시 수석비서관과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대표적인 보수 이론가인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1990년대부터 주장해온 것”이라며 “지방분권은 (자유한국당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좌우가 함께하는 개헌 과제”라고 했다. 그는 헌법 개정 없이 지방분권이 가능하다는 정종섭 의원의 견해에 대해서도 “현행 헌법대로라면 지방의 독자적인 활동 영역이 거의 없고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하급기관이 되고 만다. (자유한국당은) 지방분권을 행정분권에 한정시키는 것이다. 지방정부의 손발을 풀기 위해선 지방정부의 법률제정권을 인정해 정책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이는 개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당 86.3% 지방분권 확대 찬성자유한국당의 속내는 복잡하다. 연일 지도부는 문재인 개헌안에 담긴 지방분권 확대 방침에 반대하지만, 의원들은 찬성하고 있다. 가 3월6일 발표한 국회의원 전수조사 결과(응답자 215명)에서 자유한국당 의원의 86.3%가 지방분권 확대에 찬성했다(반대 8.8%). 같은 조사에서 자치입법권 조항 신설에 대해서도 찬성과 반대가 41.3%와 40%로 팽팽하게 맞섰다. 실제 서병수 부산시장, 권영진 현 대구시장, 김관용 경북도지사 등 자유한국당 출신 주요 지자체장들은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 개헌을 요구해왔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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