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동해의 어항이던 묵호항이 2월6일 오후 3시께부터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진입로엔 차가 빼곡히 들어찼고, 태극기를 손에 든 이들이 바다 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부두와 연결되는 철조망 앞까지 방송차가 들어와 시끄럽게 노래를 틀었다. 그 위에서는 누군가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태극기 시위대가 부두 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경찰의 완고한 벽 앞에 막힌 시위대는 거친 욕설을 쏟아내며 저항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만경봉호 입항 반대 시위자들</font></font>이날 묵호항에 300명 넘는 태극기 시위대가 모여든 이유는 간명했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등 예술단원 114명과 지원 인력을 태운 ‘만경봉92호’가 묵호항으로 입항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원산과 일본 니가타 서항을 잇는 부정기 연락선이던 만경봉92호가 남쪽 항구에 입항한 것은 2002년 9월 부산아시안게임 이후 16년 만이었다. 정부는 이날 만경봉92호 입항을 허용하기 위해,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을 전면 불허하는 내용이 담긴 5·24 조처를 일시 유예했다. 등 보수 언론들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하는 마당에 ‘육·해·공을 다 열어주자’는 것이냐며 가슴을 쳤다.
태극기 무리는 오후 4시20분께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끝낸 뒤 방송차를 통해 ‘이 빨갱이놈’이라는 후렴구가 담긴 노래를 틀었다. 잠시 뒤 인파 속에서 “배 들어왔다”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경찰이 부두로 향하는 길을 통제하기 전에 철조망 안에 자리잡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방파제 안쪽으로 들어오는 만경봉92호를 확인한 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사진과 인공기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찰은 신속하게 소화기를 꺼내 불을 껐다.
묵호항 앞 아수라장 속에서 만난 이재영(71)씨는 이날 아침 서울시청 앞을 출발한 버스 세 대 중 한 대에 몸을 실었다. 그는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까지 반대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인공기를 단 배가 이렇게 버젓이 내려오는데 왜 우리가 북한에 계속 끌려다녀야 하냐”고 물었다. 그는 20대 끝자락에 독일로 건너가 3년4개월 동안 일한 파독 광부 출신이다. 이씨는 전날인 2월5일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에 맞춰 서울 서초동을 찾았다. “이제 조짐이 좋아. 이재용 부회장이 풀려났잖아. 박근혜 대통령도 5월쯤 풀려날 거야.” 이씨는 기자를 붙잡고 “언론이 똑바로 기사를 써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이날 태극기를 든 이들 대부분은 2016년 겨울 촛불집회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끝까지 지지한 ‘맞불 집회’ 참석자였다. 태극기를 흔들며 ‘공산주의를 막아내자’고 부르짖던 박아무개(67)씨는 “북한이 평창에 오면 안 된다.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김아무개(60)씨는 “경상도가 고향이지만 묵호로 이사 와서 10년 넘게 살았다. 유튜브 방송을 보고 우리나라를 공산국가로 이끌고 가려 한다는 생각에 주민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항구에 모인 무리는 만경봉92호가 항구에 자리잡고 주변에 어스름이 깔리자 삼삼오오 흩어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외교적 결례 무릅쓰고 퇴장한 펜스</font></font>태극기 무리가 빠져나가자 만경봉92호를 구경하러 나온 묵호 주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와 함께 북한 배를 구경하려고 항구를 찾았다는 주민 김용운(32)씨는 태극기 집회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올림픽은 세계인들이 모여서 하는 축제인데 이렇게까지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남북관계나 복잡한 한반도 주변국들의 셈법은 잘 모르겠지만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만경봉92호 입항을 보는 주민들의 속내는 복잡해졌다. 김현길(68)씨는 “북한이 계속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긴장을 조성해왔다. 이번 올림픽 참여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고,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이번 올림픽이 남북관계를 푸는 단초로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1월1일 신년사로 시작된 남북대화 국면을 보는 어촌마을의 복잡한 심경은 ‘대화 추진’과 ‘제재 강화’로 나뉜 한국 여론의 축소판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지금이야말로 북과 남이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북남관계를 개선하며 자주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나”가야 한다며 “남조선에서 머지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의 성과적인 개최를 위해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6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대한민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베를린 평화구상’을 발표하고 남북대화를 제의했을 땐 꿈쩍도 않던 북한이었다. 한국갤럽이 1월30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성인 남녀 1005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5%포인트)를 보면 ‘남북 단일팀 구성이 잘못됐다’(50%)가 ‘잘된 일이다’라는 응답(40%)보다 조금 높았지만, 남북 공동입장에 대해서는 ‘잘했다’(53%)가 ‘잘못했다’(39%)보다 많았다.
둘로 나뉜 것은 국내 여론만이 아니다. 남북대화 분위기를 보는 주변국들의 시선도 첨예하게 갈려 있다.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이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다. 남북대화로 북한을 포위하는 한·미·일 공조가 흐트러질까 우려하는 아베 총리는 “북한은 군사적 압력이 커지면 대화를 요구해 시간을 번 뒤 결과적으로 약속을 배신해왔다”(1월24일 일본 인터뷰)며 남북대화의 의미를 깎아내렸다. 그는 2월9일 문 대통령과 한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의 미소 외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평창을 찾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 역시 2월7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상냥하게 대해주면 또 다른 도발로 이어진다”며 일본의 강경한 태도에 동조했다. 펜스 부통령은 2월9일 문 대통령이 주최하는 올림픽 사전 환영 리셉션에 뒤늦게 도착했다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퇴장했다. 같은 주빈석에 앉은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외교적 결례를 무릅쓴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곳곳에 울려퍼진 ‘우리는 하나다’</font></font>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관계국들이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중국의 태도는 달랐다. 평창겨울올림픽에 중국을 대표해 참석한 한정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한반도 정세의 열쇠는 미국과 북한이 쥐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미국과 북한이 직접 대화를 추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세가 복잡한 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한반도 배치 등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던 한국과 중국이 지난해 12월 문 대통령의 방중으로 관계를 회복한 뒤 굳게 얼어붙은 북-미 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비슷한 입장을 취한 셈이다.
대화로 방향키를 돌린 북한 역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북한은 2월4일 김영남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대표로 하는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7일엔 김정은 위원장의 친동생인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대표단에 포함시킨다고 통보해왔다. 2월9일 오후 1시30분 인천공항으로 입경한 구순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생애 첫 방남이 감격스러운 듯 달뜬 웃음으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환영을 받았다. 김여정 제1부부장도 남한 언론의 열띤 취재 열기에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이따금 살짝 웃는 여유를 보였다. 조 장관이 김 부부장에게 “환영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김 부부장은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만경봉92호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조성된 어색한 분위기는 며칠 지나 눈 녹듯 사라졌다. 2월8일 평창 주변을 감쌌던 강추위가 가시자 해빙 분위기가 감지됐다. 2월8일 북한 선수단 입촌식 때는 남북 선수들이 즉흥적으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했다. 남쪽 연주단이 를 연주하자. 북의 취주악단은 과 로 답했다. 흥이 오른 북한 선수들은 남쪽 공연단과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같은 날 밤 북한 예술단이 공연한 강릉아트센터 앞에도 한반도기가 넘실댔다.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선 온 전국연합동아리 ‘대학생 겨레하나’ 소속 대학생 22명은 한반도기를 힘차게 흔들며 등 통일 축원 노래를 1시간40분 동안 불렀다. 황석제(27) ‘부산 대학생 겨레하나’ 대표는 “남북이 함께 모이는 평화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2주 동안 카드섹션 등을 준비했고, 부산에서도 공연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오후 4시께 북한 예술단을 태운 버스가 공연장에 도착하자 환호하며 ‘우리는 하나다’를 외쳤다.
이날 공연은 2002년 서울 8·15 민족통일대회 이후 16년 만에 열린 북한 예술단 공연이다. 전국에서 15만6232명이 관람을 신청했고 이 중 780명이 선정돼 2장씩 표를 받았다. 14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관객들은 저녁 8시 공연을 앞둔 오후 4시부터 강릉아트센터로 모여들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북한 사람도 우리 겨레라는 걸”</font></font>“가 제일 기대돼요. ‘동포 여러분’이라는 노랫말을 따라 부르면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들어요.” 북한 함경북도 두만강 인근 해룡시에서 태어나 2007년 남으로 내려온 한 탈북 주민은 이날 공연을 설레어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왔다는 권장용(50)·채원(20) 부녀가 느끼는 감정은 서로 살짝 달랐다. 딸 채원씨는 “태어나서 북한 사람을 처음 본다. 이렇게 대단한 공연인 줄 모르고 당첨돼서 왔다”고 말했다. 아버지 권씨는 “아버지가 북한 원산 출신의 이산가족이다. 이번 공연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다. 올림픽이 남북 화합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다. 충북 증평에서 온 유창문(46)씨는 10살 아들, 7살 딸과 공연장을 찾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북한 사람도 우리의 겨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은 북의 가수 리경숙의 로 시작됐다. 이후 공연은 (심수봉), (패티김), (혜은이), (최진희), (이선희) 등 남쪽 인기 가요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무대와 관객석 거리가 3m에 불과해 관객은 연주자 140명의 표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무대는 화려했다. 여성 8중창단이 를 부를 땐 겨울 소나무 위의 잔설이 쏟아지는 영상과 함께 천장에서 은색 가루가 쏟아졌다. 라는 빠른 템포의 북한 노래를 부른 가수 5명은 한국 걸그룹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율동으로 공연장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무대는 이산가족 상봉 영상을 배경으로 과 로 마무리됐다.
한반도기는 북한 응원단과 예술단이 가는 곳엔 어디든 등장했다.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 당일인 2월9일 아침 8시 동해시 묵호항 북방파제 안쪽 수산물공동할복장 옥상엔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통일응원단’ 50여 명이 모여 한반도기를 흔들었다. 사흘 전만 해도 태극기와 성조기로 가득 찼던 묵호항이었다. 이들은 바닷길로 500m 떨어진 맞은편 만경봉92호를 향해 목청 높여 “보고 싶었어요” “우리 민족끼리 통일합시다”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외쳤다. 만경봉92호 선원들이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반도기를 든 이들의 함성 소리는 한층 커져 파도타기로 이어졌다.
평창의 짧은 해가 진 뒤, 저녁 8시가 되자 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소개를 받고 귀빈석에 나왔다. 문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김여정 제1부부장, 김영남 상임위원장 등과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선수단 입장이 시작되고, 한반도기를 앞세운 코리아 선수단이 마지막인 91번째로 등장했다. 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한 이는 한국의 원윤종(봅슬레이)과 단일팀을 이룬 북의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 황충금이었다. 경기장에 모인 3만5천여 관객이 따뜻한 박수로 코리아팀을 맞았다. 하얀색 패딩점퍼를 입은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김여정 제1부부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에게 다시 한번 악수를 권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반도엔 오직 평화만이 빛나리!</font></font>밤 9시42분, 문재인 대통령의 개회 선언으로 17일간의 평창겨울올림픽이 시작됐다. 이윽고 10시2분부터 전세계가 주목하는 성화 점화가 시작됐다. 쇼트트랙 올림픽 4관왕 전이경,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여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골퍼 박인비,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에 빛나는 축구 선수 안정환에 이어 강릉 출신의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공격수 박종아와 단일팀을 이룬 북한의 간판 아이스하키 선수 정수현이 성화를 이어받았다. 두 선수는 성화를 맞잡고 점화대를 향해 올라갔다. 마지막 주자는 모두의 예상대로 ‘피겨 퀸’ 김연아였다. 김연아는 우아한 몸짓으로 성화대에 마지막 불을 댕겼다.
한반도기를 들고 개막식장을 찾은 황선영(25)씨는 “남북이 단일팀을 꾸려 평화와 화합을 이룬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올림픽에서 승리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남북대화를 보는 주변국의 곱지 않은 시선을 뚫고 남북은 평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평창에서 평화는 더 눈물겹고, 대화는 더 절실하다. 우리가 겪은 고난과 치욕의 역사를 떨쳐내고, 한반도엔 오직 평화만이 빛나리!
동해·강릉·평창(강원)=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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