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968년 12월30일 한 가족 9명을 대학살한 남조선군의 범죄 흔적’(the criminal remnants of south korean military they masssacred a family 9 members on DEC 30 1968)
베트남 중부 다낭 공항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하이사 투언찌촌. 그 마을 입구에 있는 한 가족묘 표지석에 쓰인 글귀다. 베트남어와 영어를 병기했다. ‘누가 이렇게 베트남에서 영어까지 써가며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싶었을까.’ 지난해 12월29일 현지 주민들에게 이 비를 세운 이를 수소문해, 다음날 저녁 다낭에서 유가족 당민코아(68)를 만날 수 있었다. 당민코아는 1969년 가족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베트남 남부 호찌민에서 전해들었다. 그때 그는 대학생이었다.
제사 준비 중에 들이닥친 한국군그해 음력 설 연휴, 그는 대학 축제에 참여하느라 고향에 가지 못했다. 설 전날인 1969년 2월16일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이 고향 집에 들이닥쳤다. 아버지 당서(당시 59살)와 가족들은 집 사당에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한국군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군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북을 크게 쳤다. 북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졌다. 제단 밑에 숨어 있던 조카가 몰래 달아났다. 조카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국군이 쳐들어왔다”고 알렸다. 북소리와 조카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다. 몰래 달아난 조카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 9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버지, 어머니(57살), 큰형(34살), 큰형수(32살), 넷째형수(30살), 여동생(16살), 큰형의 딸(3살), 그리고 큰형수와 넷째형수의 배 속에 있던 아이 2명. 한국군은 사당에 불을 지르고 주검들을 땅에 묻어 흔적을 없앴다.
당민코아는 “아버지가 북을 치고 조카가 알렸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마을 전체가 학살당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의 화는 피했지만 가족 9명을 한꺼번에 잃은 울분은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그나마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한국에 좋은 감정이 조금도 없다. 무고한 내 가족을 다 죽였는데 당연히 원한이 있지 없겠나. 이건 전쟁범죄다. 국제 전범재판소에 넘겨야 하는 일이다.”
당민코아는 먼저 한국이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반드시, 일단은, 먼저 시인을 해야 한다.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한다.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최소한 시인은 하는 게 도리다. 미국 참전 군인들은 밀라이에 찾아와서 사과한다. 최소한 밀라이만큼은 해야 하지 않나.” 밀라이 학살은 1968년 3월16일 미군이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선미촌 주민 504명을 죽인 사건이다. 그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엄청나게 벌어졌던 꽝남성에 병원이랑 학교를 세웠다. 한국은 직접 배상하면 잘못을 시인하는 꼴로 보이니 간접적으로 건물을 짓는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 눈엔 그게 다 보인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8월 한-베 정상회담에서 과거 한국군 전투부대 주둔지이던 베트남 중부 5개 성에 300만달러 규모의 병원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
자비 들여 겨우 가족묘 마련당민코아는 현재 한 건설·무역 자문회사의 대표다. 그는 가족 9명이 학살당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지금 같은 가족묘와 사당을 마련했다. “내가 돈 벌어서 가족묘를 다시 만들었다. 죽인 사람은 따로 있고, 나 혼자 살아남아 겨우 먹고살 만해져서 이제야 가족묘를 만들고. 이게 얼마나 역설적인가.”
두 달 전 지방 인민위원회에서 당민코아를 조사하러 왔다. 그는 “마카오에 있는 한 기업이 우리 마을(주이쑤옌현 주이하이사)에 리조트를 건설하면서 지방정부를 지원해 위령비 같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추모시설을 만든다. 인민위 직원은 피해자 명단을 취합하러 나를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28일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응이어사 공동묘지에선 또 다른 추모시설을 짓고 있었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149명을 기리는 위령관이었다. 건설 중인 위령관 지붕에는 ‘1968-1971 남조선 용병들에게 학살당한 피해자 위령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당민코아 가족 9명이 그 안에 포함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 가족 9명이 죽은 ‘당서 가족 학살’은 베트남에서도 49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68 꽝남대학살’ 50주기를 맞은 지금 베트남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새로운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현재의 사건’이었다.
꽝남(베트남)=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취재진과 눈도 안 마주친 학살 유가족
화난 당민코아를 위한 어설픈 사과
지난해 12월30일 베트남 다낭의 자택에서 취재진과 만난 당민코아는 한국인과 좀처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동행한 베트남 대학생 쑤언의 눈만 바라보며 말했다. 49년 전,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가족 사연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화가 단단히 묻어 있었다.
“이렇게 화를 내시는데 누가 사과라도 좀 해야 되지 않겠어요?” 옆에서 한참 당민코아의 말을 듣고 있던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가 말했다. 나를 꼬집어 지목하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내가 하겠다”고 말해버렸다. 먼저 ‘한국인으로서 사과드리고 싶다’는 말을 통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시간을 조금 벌었다.
바로 사과를 시작했다. “저는 한국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베트남전쟁 파병 한국군들이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을 잔인하게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미건조하고 뻔한 내용이라 얼굴이 붉어졌다. ‘난 한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이 약한 걸까, 아님 아직도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잘 모르는 걸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그럼 한국 정부와 군은 한국 정부와 한국군으로서 정체성이 약한 걸까, 그들도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아직 잘 모르는 걸까.’ 역대 한국 정부는 아직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언어로 사과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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