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2014년 2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댓글 흔적 없다.”
제18대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상황이었다. 대선 3차 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2012년 12월16일 밤 11시. 서울 수서경찰서 출입기자들에게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중간수사 결과 보도자료를 발표한다는 내용의 문자가 도착했다. 언론사들은 당황했다. 대부분의 신문은 다음날 1면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이 발표는 결과적으로 사실이 아니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실체가 드러날수록 거대하고 심각한 범죄행위임이 확인됐다. 국정원이 중소 커뮤니티는 물론 포털 사이트,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온라인 공간에 손을 대 여론 조작을 시도했음이 최근까지도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경찰은 왜 이런 무리한 발표를 했을까. 석연치 않은 이 ‘한밤’ 기자회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13년 꾸려진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특별수사팀)은 국정원의 대선 여론 개입 정황을 확인하고도 수사를 축소·은폐했다는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로 김용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기소했다. 당시 특별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원세훈 원장보다 김용판 청장이 선거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 개인적으로는 죄질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특별수사팀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용판 전 청장 등의 통화 내역을 확보해 국정원-경찰-새누리당-청와대가 서로 연락한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물론 경찰 수사 책임자들과 통화한 국정원 직원을 불러 조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이 수사를 주도했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사생활 문제가 불거져 옷을 벗었고, 윤석열 검사 등은 한직으로 좌천됐다. 결국 김 전 청장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 이번에 확보한 당시 국정원·경찰 주요 인사들의 통화 내역은 국정원-경찰-새누리당-청와대가 어떻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수사 내용이 어떻게 공유됐는지 등을 입증할 중요한 정황증거이다.
이 사실은 당시 검찰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지난 7월5일 JTBC 에 나와 “국정원과 당시 경찰, 새누리당 정치인 등 관련자들 사이에 하루이틀 전부터 엄청난 통화 내역이 포착됐다. (원래 증거로 제출되기로 했지만) 퇴임한 뒤에 보니까 그 부분이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만에 하나 그런 증거 자료들이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면 공소 유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분석한 통화 내역을 보면 국정원과 경찰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한 것은 국정원 직원 안아무개씨다. 당시 안씨는 서울지방경찰청을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으로 여러 경찰 직원과 통화했다. 그중 김병찬 당시 서울청 수사2계장(현 용산서장)과 한 연락이 45차례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김 서장은 과 한 통화에서 “모든 통화 내역을 과거 검찰에서 해명했으며, 국정원 쪽에 어떤 수사 정보도 주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는 통화 내역이 여러 차례였던 것과 관련해 “당시 안씨가 계속 전화를 했지만 대부분 받지 않았다. SKT의 경우 통화가 실패하면 내역에 안 남지만 KT는 남는다고 한다. 통화 거절을 하고 ‘회의 중’이라는 문자를 보낸 것까지 합쳐져서 횟수가 많아 보이는 것이지 실제 통화한 것은 얼마 되지 않고, 모두 과거 검찰에서 해명했다”고 덧붙였다. 김 서장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경찰과 국정원의 유착 의혹은 풀리지 않는다. 당시 안씨는 김 서장 외 여러 경찰과 통화했으며, 통화 내역에서 확인할 수 없는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려면 당시 관련 지휘 계통에 있었던 경찰, 국정원, 청와대, 새누리당 관계자들을 수사할 수밖에 없다. 통화 당사자들을 불러 진술의 차이를 확인하고, 물증을 찾아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김용판 전 청장 사건이 이미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다시 공직선거법 위반이나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이 사건을 수사하긴 힘들다.
하지만 초점을 바꾸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2월16일 밤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은 경찰뿐이 아니다. 국정원 역시 경찰 발표 11분 뒤 당시 민주당을 비방하는 보도자료를 발표한다. 이 보도자료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경찰, 청와대, 새누리당과 긴밀한 커넥션을 유지한 채 부당한 방식으로 개입했다면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 연루된 청와대 관계자 등도 공범으로 기소할 수 있다.
실제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수사팀(팀장 박찬호)은 당시 경찰과 잦은 연락을 주고받은 국정원 직원 안씨를 최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당시 의혹을 밝히기 위해 여러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국정원 수사팀 관계자는 에 “소환과 수사 진행 여부 등 어떤 사실관계도 확인해줄 수 없다”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2012년 ‘댓글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수사 결과 발표를 주도한 김용판 전 서울청장은 과 한 통화에서 “(수사 결과 발표) 축소 지시를 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의) 판결문에 적나라하게 나온다”고 잘라 말했다. 또 수사 결과와 발표 시기가 국정원과 새누리당 쪽에 유출된 것과 관련해서는 “본청장(경찰청장)에게 이야기한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고한 적이 없다. 박원동 전 국장에게 전화가 왔을 때도 ‘조금 기다리면 안다’ 정도 외에 어떤 이야기도 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수사 결과 발표 시점과 관련해서는 “그날(12월16일) 저녁 8시30분에 결과가 나왔고, 결과가 나오면 바로 언론에 밝히기로 해서 발표한 것뿐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건으로 검찰이 나를 무리하게 기소한 부분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11월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온 산을 불태워도 새싹은 자라난다’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최근 적폐 청산 수사를 ‘반동분자 색출’에 견줘 비판하며 12월16일 수사 결과 발표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김 청장의 생각과 달리 당시 수사 결과 발표를 둘러싼 많은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산이 불타는 시기인지, 새싹이 자라는 시기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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