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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도 ‘스펙’이 필요하다니

기자가 26만원 내고 입학한 ‘퇴사학교’…

경력 관리·상사 유형별 대처 방법 등 교육
등록 2017-09-05 15:00 수정 2020-05-03 04:28
퇴사교육 업체 ‘퇴사학교’의 하루 퇴사캠프 프로그램. 토요일 11시간 동안 퇴사와 방황을 배웠지만, 나는 ‘내 길 찾기’ 프로그램에서 나 자신을 찾진 못했다. ‘퇴사학교’ 수업자료

퇴사교육 업체 ‘퇴사학교’의 하루 퇴사캠프 프로그램. 토요일 11시간 동안 퇴사와 방황을 배웠지만, 나는 ‘내 길 찾기’ 프로그램에서 나 자신을 찾진 못했다. ‘퇴사학교’ 수업자료

8월19일 오전 10시. 나는 ‘박수진’이 아닌 ‘김원희’님이 돼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서울 은평구 불광동까지 토요일 댓바람에 집을 나섰다. ‘퇴사학교’ 수업을 들으러. 퇴사도 공부해서 해야 하나. 마음 한구석에 헛헛한 바람이 일었다.

그냥 나가면 답 없다

그주 월요일. 미치도록 출근하기 싫었다. 회의자료를 준비하며 인터넷을 검색하다 나도 모르게 ‘퇴.사.’ 두 글자를 쳤다. 마침 퇴사교육 업체 ‘퇴사학교’가 ‘1일 캠프’를 홍보했다. 주제는 ‘내 길 찾기’.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저 막막하고 무기력하다면… 딱 하루의 방황을 통해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광고 문구는 옥수동 선녀보살을 만난 것처럼 내 마음에 ‘반신반의’하는 감정의 요동침을 선사했다.

30년 넘게 살면서도 못 찾은 방향을 하루 만에 찾아준다고? 게다가 토요일 오전 10시~밤 9시 일정은 너무 길었다. …. 개론 수업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은 적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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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는 내가 26만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결제 버튼을 누른 이유의 8할은 저녁 8시로 예정된 ‘불타는 치맥파티’였다.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은 왜 ‘퇴사’를 고민할까. ‘위 아 더 월드’를 제창할 수 있을까. 인생의 솔메(솔메이트)를 만날지도 몰라.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강의실에 들어섰다. 캠프에 온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16명. 대구와 울산에서 KTX를 타고 온 사람도 2명 있다. 퇴사를 고민하는 건 나이·직업 안정성·근무연차와 무관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고, 탄탄한 직업으로 알려진 교사·공기업 직원·공무원도 있었다. 입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금융업계 종사자, 감정노동이 극심한 콜센터 상담원도 있었다.

“수학을 좋아한다. 고민과 번뇌가 있을 때 수학 문제를 풀며 고민을 잊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수학이 싫어졌다.” “일한 지 8개월이 지났다.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생각했다. 주변에 닮고 싶은 사람도 없다.” “카드 회사에 다닌다. 이 일이 도대체 가치 있는 일인가 싶어 다른 직종으로 옮기려 한다. 일하면서 면접을 여러 차례 봤는데 모두 떨어졌다. 이직해서 회사에 복수하고 싶었는데….” “연구·개발(R&D) 연구원이다. 석사까지 마쳤는데 매일 똑같은 일을 한다. 그냥 하면 되지만 이대로 괜찮은가, 늘 고민이다.”

초·중·고 시절 앞만 보고 달리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 내고 자아정체성을 고민하는 한국 사회의 슬픈 풍경이었다. 그게 부끄러워 나 역시 신분도 이름도 가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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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퇴사에 실패했다

그래서 답은 찾았냐고? 퇴사학교가 퇴사 고민에 내린 답은 다소 ‘대기업 중심’이었다. 경력 관리를 어떻게 할지, 이상한 상사·동료의 유형을 나눠 어떻게 대처할지…. 직무와 관련해 칭찬받은 것, 내가 잘하는 것을 쓸 때는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들렸다. 막상 쓰려니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퇴사학교의 결론은 개인 경쟁력을 분석해 강화하지 않으면 “퇴사해도 답 없다”였다. 요즘 시대엔 퇴사에도 스펙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잘하는 게 없는 나는 오늘도 퇴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26만원은? 그냥 답을 않기로 한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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