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인데 추웠다. 지하터널 안 온도는 15℃. 졸졸 흐르는 지하수가 청량감을 더해 피서지론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8월2일, 대전 유성구 한국원자력연구원 뒷산에 설치된 지하처분연구시설을 찾았다. 2029년 이후 건설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관련 연구가 얼마나 진척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고준위 방폐장과 마찬가지로 ‘지하’ 환경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시설은 국내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단단한 화강암반을 뚫고 완만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250m가량 이어졌다. 지표로부터 120m 깊이에 자리한 지하터널은 찬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곧은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ㅁ’자로 꺾인 길이 나타났고 그 주변에 동굴 6개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탄광을 연상시키는 구조다. 동굴엔 채굴장비 대신 실험시설이 가득 차 있었다. 사용후핵연료를 수십만 년간 지하동굴에 안전하게 묻어놓을 방법을 찾는 기초연구장비였다.
고준위 방폐장은 흔히 ‘쓰레기장’에 비유된다. 쓰레기는 원자력발전소에서 태우고 나온 연료봉(사용후핵연료)을 뜻한다. 이제 쓸모없어졌으니 어딘가에 버리면 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숯은 활활 타오른 뒤 불이 꺼져도 한동안 뜨겁다. 사용후핵연료도 마찬가지다. 원자로에서 나온 뒤에도 한동안 핵분열이 이어져 최소 수년간 사용후핵연료가 뿜어내는 열이 수백℃에 달한다. 열이 강한 만큼 방사선도 강해 사람이 사용후핵연료 주변에서 몇 시간 정도 피폭되면 사망한다. 5~10년간 물에서 식히면 100℃ 아래로 떨어지지만, 완전히 냉각돼 열과 방사선이 위험한 수준을 벗어날 때까지는 수십만 년이 걸린다. 그러니 사용후핵연료가 안전해지기까지 인간이 잘 보관해야 한다. 쓰레기치고는 참 고약한 셈이다.
방사선 없어지기까지 수십만 년그렇다면 이 골치 아픈 쓰레기를 어디에 둬야 할까. 안타깝게도 세계적으로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고준위 방폐장을 만드는 데 성공한 사례가 없다. 그나마 가장 앞선 나라가 핀란드와 스웨덴이다. 두 나라는 30년 넘는 연구 끝에 사용후핵연료를 지하 500m 암반에 파묻을 계획을 세웠고 장소까지 선정했다. 지하를 택한 이유는 인간 생활권에서 멀기 때문이다. 30만 년은 긴 시간이다. 말과 글이 달라질 수 있다. 인류 문명이 그때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위험 표지’를 설치해도 못 읽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예 안 보이는 곳에 묻어두는 게 안전하다.
고준위 방폐장을 깊은 땅속에 만드는 이유는 또 있다. 지진이 나도 땅속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흔들린다. 지하 300m만 돼도 지진 지반가속도가 지표면의 절반 아래 수준이다. 깊이 들어가면 지하수 문제도 해결된다. 암반의 깨진 틈을 타고 흐르는 지하수는 고준위 방폐장의 가장 큰 적이다. 방사성물질이 지표까지 올라온다면 십중팔구 지하수 탓이라고 보면 된다. 사용후핵연료를 지하 깊은 곳에 묻으면 고압의 암반이 천연 방벽이 돼준다. 현재 건설 중인 핀란드 고준위 방폐장에선 지하수가 10만 년 동안 160m밖에 이동하지 못한다.
대전 지하처분연구시설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심도가 너무 얕아 천연 방벽의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공학적 방벽’ 실험은 활발하다. 사용후핵연료를 흉내 낸 무해 물질에 100℃ 열을 가하면서 금속용기와 점토로 만든 방벽이 얼마나 지하수를 잘 막는지 관찰하고 있다. 지하 500m에 시추공을 뚫어서 암반·지하수 상태를 확인한 뒤 이를 토대로 시뮬레이션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건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지하 120m 환경은 지하 500m와 온도, 압력, 용존산소량 등이 다르다. 방폐장을 지으려면 실제 지하 500m 규모의 연구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하 500m 규모 연구시설 필요한국은 아직 사용후핵연료의 매립 방식과 장소를 정하지 못했다. 핀란드·스웨덴을 따라 지하 500m에 묻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지만 기술 격차가 10년 이상 난다. 게다가 북유럽을 그대로 따라할 수도 없다. 그쪽은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낮다. 운영 중인 원자로가 핀란드 4기, 스웨덴 10기뿐이라 폐기물 양도 많지 않다. 한국은 정반대로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데 폐기물 양은 많다.
서울 여의도 면적(2.9km²)의 2~3배. 한국에서 고준위 방폐장을 설치할 때 필요한 부지 면적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방사성폐기물처분연구부가 핀란드·스웨덴 방식으로 매립한다고 가정해 추산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핵안을 반영해 현재 건설·운영 중인 발전소 8기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를 제외해도 고준위 방폐장을 만들려면 5.65km²의 부지가 필요하다. 만약 박근혜 정부에서 정한 제7차 전력수급계획대로 간다면 9.02km²가 필요하다. 각각 여의도 면적의 2~3배이다. 김경수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여유 면적까지 포함하면 10km²가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만한 부지를 구하기 쉽지 않다. 한국 상황에 맞게 부지 면적을 최소화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진국 기술을 좇아가는 동시에 좁은 국토에 맞는 ‘한국형 고준위 방폐장’ 기술이 있어야 한다. 부지 면적을 줄이는 방법으론 지하를 여러 층으로 나눠 매립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해외에서 단독주택을 지었다면 한국에선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셈이다. 훨씬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연구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처분기술 개발인력이 일본 200명, 스웨덴 250명인 데 비해 한국은 29명에 불과하다.
핵폐기물 처리 연구로 중심 옮겨야고준위 방폐장엔 다양한 전공의 연구인력이 필요하다. 원자력과 지질뿐 아니라 전자, 기계, 토목, 생물, 화학공학 등의 전공 인력이 있어야 한다. 거대한 지하공간을 설계하고 지하수 흐름을 분석해야 한다. 사람이 사용후핵연료를 직접 옮길 수 없으므로 자동화 설비를 갖춰야 한다. 수십만 년 새 빙하기가 찾아와 지하수 흐름이 바뀌고 땅이 움직일 가능성, 지하에 사는 박테리아가 사용후핵연료에 미칠 영향까지 분석해야 한다.
막대한 연구인력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한국 원자력계에서 방사성폐기물 처리 연구자는 극소수다. 안재훈 환경운동연합 탈핵팀장은 “원자력 연구 중에서도 그동안 발전이나 재처리에 주로 정부 예산과 인력이 치우쳐 있었다”면서 “핵폐기물 처리나 핵발전소 해체 연구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사용후핵연료는 점점 늘어나 임시저장시설이 머잖아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7월19일 공개한 ‘2017년 2분기 사용후핵연료 저장 현황’에 따르면 원전 임시저장시설 포화율은 85%에 달한다. 2016년 5월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에 따르면 현재 각 원전에 마련된 임시저장시설은 2019년(월성)부터 2038년(신월성)까지 차례로 포화될 예정이다.
‘화장실은 없는데 배에서 신호가 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화장실 짓는 기술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화장실을 어디에 지을지 결정하는 문제에 비하면 말이다.
정부의 방폐장 지역 선정 작업은 1983년 이래 무려 9번이나 실패를 겪었다. 대부분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안전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1990년 충남 태안 안면도에 주민들 몰래 방폐장을 건설하려다 들켜 거센 저항을 맞았다(‘안면도 사태’). 1994년엔 정부가 일방적으로 인천 굴업도를 방폐장 부지로 지정해 지질조사를 하다 활성단층이 발견돼 중단했고, 2004년엔 전북 부안군수가 군민의 의견 수렴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방폐장을 유치하려다 대규모 반대시위와 유혈충돌을 부르기도 했다(‘부안 사태’). 이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고준위 방폐장과 중저준위 방폐장을 분리하기로 결정한다.
지질 특성상 쥐라기 화강암 가장 안전중저준위 방폐장은 순조롭게 건설되는 듯했다. 2005년 방폐장 유치 의사를 밝힌 9개 지역을 대상으로 부지적합성을 조사했는데 8개 지역이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최종적으로 주민투표에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 지역이 선정됐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파보니 조사 결과와 다르게 지반이 약하고 지하수가 많았다. 공사가 수년간 지연되고 지금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헌석 대표는 “경주 사례에서 보듯, 안전성은 (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투명성 및 민주적 절차와 깊이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중저준위 방폐장은 300년 동안 사용하지만, 고준위 방폐장은 그 1천 배인 30만 년은 견뎌야 한다. 훨씬 엄격한 기준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에서 고준위 방폐장을 짓기 좋은 땅은 많지 않다. 지질학계에선 한반도의 지질 특성을 고려할 때 단단한 결정질암인 쥐라기 화강암이 가장 안전할 것으로 예측한다.
김유홍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방사성폐기물지층처분연구단장은 “암종만으로 부지를 결정하는 건 아니”라고 단서를 달면서도 쥐라기 화강암이 “넓은 지역에 분포하며 균질해 (방폐장을 설치하기) 가장 좋다”고 의견을 밝혔다.
쥐라기 화강암은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서 주로 발견된다. 남한 면적의 25.6%를 차지한다. 그런데 제외 조건이 많다. 암종이 좋아도 활성단층이 있는 지역은 안 된다. 지진이 나면 사용후핵연료를 담은 용기가 깨질 수 있고 암반 틈새로 지하수가 흐를 수 있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처장은 “현재 제작 중인 활성단층 지도가 어느 정도 결말이 나와야 지질학적 안전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석회암이 있는 곳도 안 된다. 지하수와 닿으면 녹아서 구멍이 생길 수 있다. 지하자원이 묻힌 곳도 안 된다. 미래 세대가 광물을 캐려고 땅을 팔 수도 있다. 물론 문화재가 있는 곳도 안 된다.
사용후핵연료 이동 경로까지 고려하면 부지 후보는 더 줄어든다. 원전이 대부분 바닷가에 있어 내륙 깊은 곳엔 방폐장을 건설하기 쉽지 않다. 사용후핵연료를 담는 용기가 너무 무거워 도로와 교량이 버티기 힘든 탓이다. 황용수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운반하다 행여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나도 안전하도록 100t 무게의 수송용기에 담는데, 국내 도로 대부분은 최대 40t밖에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기차로 내륙 수송하는 방법이 있지만, 노선 상당수가 대도시를 지나 철도를 새로 놓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스웨덴, 신뢰 바탕 안전성 높은 지역 선정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고준위 방폐장을 바다 근처에 짓고 사용후핵연료를 배로 옮기는 것이다. 황 연구원은 “스웨덴의 경우 1980년대부터 3천t급 수송선을 이용해 바다에서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배로 옮기려면 3천t급 배가 정박할 항구가 필요하다. 서해안은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적당한 지역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차(車) 떼고 포(包) 떼고 마상(馬象)까지 떼면’ 남는 지역이 몇 군데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일정이 다소 바뀔 수 있지만 기존 산업부 계획에 따르면 12년 안에 방폐장 부지를 선정해야 한다. 만약 가장 안전한 지역의 주민들이 반대하면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힘든 이유는 원자력계에 대한 ‘신뢰 부족’ 때문이다. 정부와 원자력계에 대한 신뢰가 높은 스웨덴에선 고준위 방폐장을 지을 때 주민수용성보다 안전성을 우선시했다. 방폐장 최종 후보가 2곳이었는데, 이 중 주민투표 찬성률이 높은 지역이 아닌 안전성 점수가 높은 지역이 최종 선정됐다. 주민 반발은 없었다.
이렇게 순조롭게 처리된 배경에는 장기간에 걸친 투명한 정보공개가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에선 고준위 방폐장 사업자가 지질조사 결과부터 처분장 설계, 처분용기 기술, 안전성 평가 등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규제기관 역시 규제심사보고서를 전부 공개했다. 이 덕에 한국 같은 후발 주자들이 두 나라에서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 개발도 했다. 김경수 책임연구원은 “정보를 다 공개하면 나중에 기술을 해외로 수출할 때 손해가 될 수 있겠지만, 사업보다 자국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한 것 같다”면서 “우리도 자신 있게 다 공개해야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대전=글 변지민 기자 dr@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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