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국가정보원이 인사명령을 철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정원이 고아무개씨를 1급 총무국장으로 발탁하고 내부적으로 발표까지 했지만 청와대가 이를 되돌렸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두 달 전 부임한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의 첫 인사가 어그러진 셈이다. 조직의 수장이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권력의 풍향에 민감한 국정원 직원들은 그 너머를 바라봤다. 청와대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인사에는 청와대를 등에 업은 상징적 인물이 승진했다. 추아무개씨다. 국정원 내부의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추씨를 국정원 국내정보 수집부서 국장(1급)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국정원 내부 권력은 추 전 국장에게 집중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문고리 3인방’ 중 한 명과 인연 </font></font>추 전 국장이 2014년 9월 국정원의 실세로 등극하기까지 여러 곡절이 있었다. 그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시절 ‘박해’받은 인물이었다. 원 전 원장은 2009년 2월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뒤 내부를 다잡기 위해 문제가 되는 인물들을 국정원 산하 정보대학에 보내 교육했다. 이른바 ‘삼청대’ 프로그램이다. 해병대 교육, 난지도에서 쓰레기 줍기 등의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욕을 줘 쫓아내려는 거였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들의 ‘멘털’은 원 전 원장의 예상과 달랐다. 당시 이 프로그램 때문에 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추 전 국장 역시 1기로 그 교육을 수료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그는 삼청대에서 복귀한 뒤 국정원 국내정보 수집부서 사회팀장(3급)으로 활동하면서 ‘반값 등록금’ 운동 대응 방향을 담은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2011년 6월1일 작성) 보고서와 ‘박원순 제압 문건’으로 불리는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 방향’(2011년 11월24일 작성) 보고서 작성 등에 관여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이뤄진 여러 정치공작이 그의 손을 거쳤을 것으로 의심되는 이유다.
추 전 국장은 원 전 원장 시절에 승진해 국정원 상황실장(2급)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실장은 매주 국정원장과 주요 부서장들이 회의하는 공간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원 전 원장의 인터넷 여론 조작에 관여했다는 증거로 드러난 ‘원장님 지시 강조 말씀’이 바로 상황실에서 진행하는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 당시 말을 정리한 내용이다. 추 전 국장은 ‘삼청대 1기’에서 2급으로 승진하는 놀라운 반전을 이뤄냈다.
그의 전성기가 본격 시작된 것은 2012년 12월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부터다. 원 전 원장은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에 국정원 직원 2명을 파견 보냈다. 하지만 인수위는 2명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추 전 국장을 포함한 2명을 찍어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추 전 국장이 박 전 대통령 쪽과 인연을 맺은 것은 누나를 통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현직 국정원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구가 고향인 추 전 국장의 누나가 박 전 대통령의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선거를 도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추 전 국장도 박 전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정원을 좌지우지한 건 청와대의 힘</font></font>인수위가 끝난 뒤 추 전 국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또 다른 반전. 2013년 7월10일 검찰은 원 전 원장을 황보건설에서 억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한다. 복수의 검찰 관계자들은 당시 원 전 원장의 개인 비리 첩보가 들어온 곳은 국정원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라고 했다. 국정원 내에선 민정수석실에서 관련 업무를 했던 추 전 국장이 첩보 생산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4년 만에 삼청대 교육에 대한 복수가 이뤄진 셈이다.
추 전 국장의 청와대 생활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는 2013년 5월 가 <font color="#C21A1A">‘박원순 제압 문건’</font>과 <font color="#C21A1A">‘반값 등록금 차단 문건’</font> 등을 보도한 뒤 국정원으로 복귀해야 했다. ‘반값 등록금 차단 문건’에 추 전 국장의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그에 대한 의혹이 커졌기 때문이다.
모두 추 전 국장이 좌천되거나 한직으로 밀려날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금의환향했다. 조직을 세게 틀어쥔 남재준 원장이 물러나고 이병기 원장이 부임한 뒤 국정원을 좌지우지한 것은 청와대의 힘이었다. 추 전 국장은 그 힘을 바탕으로 국정원 국내정보 수집부서의 국장 자리를 손에 얻었다.
그는 청와대에서 국정원에 조기 복귀한 탓에 국정 농단 사태의 핵심으로 의심받는 우병우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과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은 없다. 우 전 수석이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발을 들인 2014년 5월 추 전 국장은 국정원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과 근무 시기가 겹치는 민정수석실 직원이 서로를 소개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추 전 국장은 ‘문고리 3인방’과의 인연에 우 전 수석과의 친분까지 얻었다. 박근혜 정부 핵심 실세들과의 친분은 국정원 내에서 그의 입지를 더 넓혔다. 하지만 국정원장 입장에선 청와대와 ‘직거래’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추 전 국장이 달가울 리 없었다. 갈등은 2016년 2월 국정원 차장 인사에서 불거졌다. 청와대는 추 전 국장을 2차장으로 앉히고 최윤수 부산고검 차장검사를 기조실장에 임명하려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이병호 원장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사 발표 직전까지 청와대와 국정원의 대립이 이어지다 결국 추 전 국장의 2차장 발탁은 좌절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추 전 국장이 우 전 민정수석에게 각종 정보를 직보해왔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추 전 국장은 2016년 11월 감찰조사를 받고 사표를 낸 뒤 최근 국정원을 완전히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정원 적폐 조사의 방향은? </font></font>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국정원의 흑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추 전 국장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주도권이 국정원에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에선 청와대의 힘이 압도적이었다. 이 때문에 국정원 적폐 조사의 방향도 두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 국정원의 과거 정치 개입 사건을 조사하고 개혁 작업을 하기 위해 꾸려진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국정원개혁위)는 최근 13개의 주요 조사 항목을 발표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뒷조사 사건 △극우단체 지원 관여 의혹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등 절반 이상이 박근혜 정부 시절의 의혹이다.
국정원개혁위는 조사를 마친 뒤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사건은 검찰로 넘길 것으로 보인다. 수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면 그 칼끝은 자동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2막인 ‘청와대·국정원 게이트’가 전모를 드러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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