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71) 변호사는 30년 전 6월 항쟁 당시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다. 인권변호사였던 그는 사실상 6월 항쟁의 지도부 구실을 하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상임집행위원 겸 민권위원장으로 참여했다. 6월8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과 마주한 이상수 변호사는 “6월 항쟁은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 등 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민족의식이 집대성해 표출된 사건”이라며 박근혜 정권을 타도한 “지난겨울 촛불집회는 6월 항쟁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나라 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 대표 간사를 맡은 그는 6월 항쟁의 한계에 대해선 “1987년의 개헌은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만 치중해 시민의 기본권을 담는 데 소홀했다”며 “생존권적 기본권을 확대하는 개헌으로 미완의 6월 항쟁을 완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당시 국본 민권위원장을 지냈다. 긴박했던 순간을 되짚는다면.인권변호사들의 모임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전신) 회원이었다. 그때까지 정법회는 구속된 학생과 노동자를 변론하는 게 전부였다. 이대로는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한 채 소극적인 뒷바라지만 한다는 회의가 일었고 결국 국본에 참여했다. 당시 이돈명, 조준희 변호사가 정법회 회장을 했고 나와 조영래, 박원순 변호사 등도 소속됐다. 국본에 참여해보니 상황이 아주 긴박했다. 학생, 노동자, 종교, 시민단체 대표들이 있었는데 내부에서 투쟁 수위를 놓고 의견이 대치됐다.
가장 긴박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6월18일 최루탄 추방 집회와 26일 평화대행진 집회를 앞두고 열린 상임집행위원회 회의였다.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외곽에 있던 군이 곧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강경한 입장이던 운동가들이 망설였다. 집회를 하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다. 군부가 등장하면 민주화운동이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사람들은 집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사정권의 위협 때문에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관철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가 분수령이었던 것 같다. 결국 6월26일 집회에 전국 100만 명이 모였다. 사흘 뒤 ‘6·29 선언’이 나왔다.
두려움은 없었나.그때는 참 용감했고 어떻게 보면 로맨틱했다. 우리는 구속되거나 구치소 수감 경험이 거의 없었다. 다들 ‘그깟 구치소에 간들 얼마나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구속돼보니 운동가들이 주저한 이유를 알겠더라. 오래 고생하면 그 기억이 내재되기 때문에 주저하게 되더라. 여하튼 우리는 겁이 없었다.
6월 항쟁이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힘은 어디 있었나.역사를 거슬러오르면 우리 민족에게는 동학농민운동, 3·1운동, 4·19혁명 등 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흐름이 있다. 6월 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탄압으로 쌓인 민중의 불만이 터져나온 사건이다. 해방 뒤 성장한 민족의식이 집대성해 표출된 것이다.
6월 항쟁의 한계도 있는데.당시 목표는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쟁취였다. 그런데 그것만 목표로 하고 다음 전략이 없었다. 직선제는 얻어냈지만 어떤 정부가 들어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안중에 없었다. 운동 참여자들도 ‘정치권에 맡기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6·29 선언 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분이 좋아서 국본 간부들을 초청해 샴페인을 터뜨렸다. 운동권 사람들은 지역으로 쫙 갈렸다. 경상도 사람들은 김영삼,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말이다. 그때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허약한 면이 있구나, 지역감정이 아주 강고하구나’ 느꼈다.
6·29 선언 뒤 딱 한 번 모였다국본은 다음 단계를 숙의해야 하는데 6·29 선언 뒤 집행부가 모인 게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향후를 모색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축하는 자리였다. 그때 사태를 정확히 보고 양김에게 단일화를 요구해야 했다. 조영래 변호사 등 단일화파가 있었지만 힘을 모으지 못했다. 만일 그때 국본이 ‘단일화하시오’ 했다면 됐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가 못 들어서고 지금보다 한국이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정권은 치밀하게 재집권을 노리는데 우리는 너무 순진했다. 지금도 애석하고 한스럽다. (그해 10월 이뤄진) 헌법 개정 역시 장기 독재를 막는 것에만 급급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확대 등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조항을 넣지 못했다.
6·29 선언 뒤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는데.8월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다 구속돼 49일 동안 경남 통영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그곳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해 한국 노동운동가 대부분이 모였다. 6·29 선언 직후라 더 참담했다. 군부 세력이 엄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6·29는 (전두환 정권의) 속이구’라는 말이 맞다 싶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도 나와 마찬가지로 제3자 개입 금지 조항과 장례식 방해죄로 구속됐다. 6월 항쟁은 학생, 노동자 등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가 결합돼 상당히 투쟁 수위가 높았다. 하지만 기층 민중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후 7~9월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6월 항쟁과 견줘 촛불집회는 어땠나.촛불집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보여준 국민의 뜻은 단순히 박근혜 정부 퇴진만이 아니었다. 훨씬 더 정치적 민주주의에 다가섰다. 재벌·검찰·언론 개혁을 요구했다. 촛불집회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만든 6월 항쟁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고 말했다. 6월 항쟁의 정신도 전문에 포함해야 한다고 보나.일부에선 5·18 민주화운동이 역사적 검증이 안됐다고 말한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5·18은 6월 항쟁의 중요한 기폭제 구실을 했다.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은 모두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할 정신이다. 내년 개헌에서 6월 항쟁 때 담지 못한 노동기본권 등 생존권적 기본권을 확대하고 5년 단임제를 고치면서 새 시대의 환경 변화를 담아야 한다.
내년 개헌에 새 시대 담아야 한다 6월 항쟁 30년 만에 촛불집회를 통해 정권이 교체됐다. 새 정권에 바라는 것은.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서 약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고 느꼈다. 국민에게 ‘아, 저 사람은 우리를 보호해줄 사람이다’라는 신뢰를 줬다. 장기적으로는 마음을 내려놓고 협치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다당제 구조라 야당이 반대하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개헌을 통해 합의제 민주주의로 향하는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
글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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