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혁명이 이끌어낸 조기 대선은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경험이다. 새 대통령은 당선의 기쁨을 누릴 시간도 없이 5월10일부터 역대 어느 대통령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정치권은 3월30일 새 대통령이 당선 뒤 45일 동안 인수위원회를 둘 수 있도록 하는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처리하지 못했다. 새 대통령은 사실상 인수위 없이 곧바로 임기를 시작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
논란 불렀던 박근혜·이명박 인수위대통령 취임 뒤 두 달가량 운영되는 인수위는 새 정부의 밑그림을 그리는 구실을 한다.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가동된 인수위는 기존 정부 조직·기능과 예산을 파악하고 정권 인수 준비를 함과 동시에 △국정 기조와 공약 정리 △정부조직 개편 △총리·국무위원 후보자 검증 개편 △취임식 준비 등을 소화했다.
박근혜 정부는 취임 전까지 두 달 동안 인수위를 운영했다. 박근혜 인수위는 내내 불통과 인사 참사, 경제민주화 공약 폐기 논란으로 얼룩졌다. 박 전 대통령은 당선 다음날인 2012년 12월20일 현충원을 참배하고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한 뒤 미·중·러·일 네 강대국 대사 면담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이후 좀체 인수위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인수위 현판식 이후 보름 가까이 주로 서울 삼성동 자택에 머물며 인수위 회의에는 단 한 차례 참석했다. 인수위의 비밀주의와 함께 대통령의 밀실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첫 인수위 인사로 극우 보수 논객 출신이자 이후 방미 성추행 사건으로 물러나게 되는 윤창중씨를 인수위 대변인에 임명했다. 인사 참사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초대 총리 후보자도 낙마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1월24일 김용준 인수위원장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지만 부동산 투기와 아들 병역 면제 의혹이 불거지면서 닷새 만에 낙마했다. 대선 과정에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 공약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인수위는 막판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등 국정 목표를 발표했지만 이 가운데 경제민주화는 포함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미국보다 중국에 먼저 김무성 의원을 특사로 보내며 대중 관계 개선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러나 이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논란으로 무위에 그쳤다.
이명박 정부 역시 인수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불도저식 속도전으로 인수위를 운영했다. 그는 당선 이튿날 즉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실용을 강조하고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을 위원장으로 임명해 일주일 만에 인수위를 출범시켰다. 각 부처의 업무보고는 휴일 없이 이어졌다. 인수위는 이 위원장이 주도하는 영어몰입 교육 논란에 휩싸였다. 영어뿐 아니라 다른 과목도 영어로 수업하자는 영어몰입 교육은 발표한 지 일주일 만에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할 계획이 없다”는 발표로 백지화됐다. 인수위 막판엔 화재로 소실된 남대문을 국민성금으로 복원하자는 제안이 여론의 역풍을 맞고 없던 일이 됐다. 인수위는 내각 발표에서도 이른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논란을 낳았다.
새 대통령은 그나마 인수위도 없다. 일부에선 “대통령 임기 시작일 이후 30일 안에서 인수위를 존속할 수 있다”는 현행법 조항을 근거로 새 대통령도 인수위를 둘 수 있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기존 두 달의 인수위 과정에 견주면 턱없이 짧다. 실제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전례를 살펴봐도, 인수위 활동 기간 안에 총리와 국무위원 임명이 마무리된 적이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25일 취임 뒤 엿새가 지난 3월3일에야 첫 조각 명단을 발표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김종필 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에 반대하면서 진통을 겪은 탓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고건 총리 인준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해 임기 시작 이틀 동안 총리가 없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전임 정부의 국무위원들과 새 대통령이 상당 기간 불편한 동거를 이어갔다.
전문가들은 인수위 과정을 생략한 채 출범하는 새 정부가 적잖은 혼란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새 대통령이 당선 직후 바로 총리를 지명한다고 해도 인사청문회 통과까지는 최소 보름 이상 시간이 걸린다. 국무위원 인사는 총리의 임명제청 절차와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기에 더 늦어진다. 내각 구성 자체가 두 달 이상 걸릴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인수위가 정상적으로 가동되면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인수위 막판에 열리면서 국정 공백을 줄일 수 있다. 손혁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국회의 임명동의를 얻는 데 최소한 3주 이상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런데 여소야대 국면이라 총리 인준도 녹록지 않을 수 있다”며 “총리가 임명된 뒤 그가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하고 다시 이들의 인사청문회를 해야 한다. 인수위 과정에서 인물을 검증한 뒤 지명해도 인사 참사가 적지 않은데 과연 무리 없이 이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헌법은 국무회의 정족수를 15명으로 규정한다. 일부 국무위원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한다면 국정 운영에 적잖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손 교수는 “국무회의 구성이 원활하게 되지 않으면 정부조직 개편이나 개혁 입법을 처리하는 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조기 대선을 이끌어낸 시민들의 기대를 새 정부가 초기에 충족하지 못한다면 민심이 급속히 실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대통령이 ‘적폐’인 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들과 일정 기간 불편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도 있다. 조경호 국민대 사회과학대학장은 “새 대통령이 관례대로 30일가량 인수위를 가동한다고 해도 그 기간 안에 정부조직 개편이나 내각 구성 등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제대로 조기에 구성이 안 되면 새 대통령과 박근혜 정부의 장관들이 상당 기간 함께 국무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문 캠프, “총리·장관 후보자 내부 검토 중”당선권에 가까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쪽은 인수위가 없는 상황으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는 태도다. 문 후보 쪽 관계자는 “30일가량의 인수위를 구성할지 말지는 선택 사항이다. 내부적으로는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당내 경선이 끝난 뒤부터 총리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내부 검토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선되는 대로 총리 후보자와 대통령비서실장을 우선 임명해 인사 공백을 최소화하려 한다. 정부조직 개편은 안정을 위해 큰 틀에서 변화 없이 유지한 뒤 점진적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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