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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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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촛불이 될 때 정유라가 있었다

탄핵 정국 요동치는 여론을 지배하는 감정은?…

정유라·이화여대 등장 기사 댓글 17만7867건 분석
등록 2017-01-06 15:51 수정 2020-05-03 07:17

정유라의 이화여대 특혜는 이를테면 ‘부비트랩’이었다. 2016년 9월 말 미르·케이스포츠재단 관련 의혹이 처음 보도됐을 때만 해도 여론은 뜨뜻미지근했다. 바로 그때 한국 사회의 결정적 감정을 자극하는 스위치가 눌렸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이화여대에 부정 입학하고, 학점에서도 여러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다.
10월19일 공개된 정유라의 페이스북 게시글은 성난 민심을 폭발하게 했다. “능력 없으면 너희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한국 사회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학 입시와 ‘수저 계급’ 담론을 동시에 건드린 말이었다.
‘당신’들의 나라에 대한 수치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문이 처음 열린 이후 석 달여가 흘렀다. 그동안 탄핵, 국회 국정조사, 특별검사 수사 등을 거치면서 여론은 굽이쳤다. 은 요동치는 여론을 지배하는 생각과 정서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분노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분노를 제대로 읽어낼 핵심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정유라’와 ‘이화여대’다. 정유라 또래의 청년들이, 정유라와 같은 자식을 둔 부모들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돌아선 계기이기 때문이다.
‘분노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기 위해 정유라와 이화여대 관련 뉴스가 처음 등장해 집중 보도된 2016년 9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네이버 뉴스에 달린 댓글을 분석했다. ‘정유라’와 ‘이화여대’라는 단어가 본문에 등장하는 기사 2007건을 추린 뒤 그 기사에 달린 댓글 17만7867개를 분석했다. 유재명 퀀트랩 대표가 데이터 분석을 맡았다.
온라인 공간은 활발하게 활동하는 일부 네티즌의 의견이 도드라지고, 익명성 뒤에 숨어서 거친 표현이 오간다는 한계가 있어 한국 사회 전체의 여론을 대표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오프라인과 달리 더 솔직한 마음이 드러나고, 때로 온라인 공간이 여론을 선도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을 감안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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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은 정유라와 이화여대에 대한 네티즌들의 민심을 보여주는 담론 지도다. 원이 클수록 해당 단어가 많이 언급됐고, 원과 원 사이를 연결하는 선이 굵을수록 두 단어가 동시에 자주 쓰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국민’이란 단어는 ‘세금’ ‘개·돼지’ 등과 연결선이 그어진다. 실제 댓글에서 두 단어가 함께 쓰인 예는 다음과 같다.

“국민 세금 걷어서 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사태가 흐지부지 묻힐 경우 우리는 앞으로도 개·돼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매한 국민들은 이렇게 해도 된다는 착각을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원 색깔은 크게 4가지 뭉치로 단어를 분류한 것이다. 에서는 우선 강한 적대감이 드러난다. 박근혜와 최순실 ‘당신’과 ‘니들’ ‘사이비’ 집단이 ‘비리’를 저질러 ‘자기’ 이익만 챙겼다는 비난(파란색)의 목소리다.

또 대통령은 ‘나쁘고’ ‘잘못’했고, ‘더러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분노(빨간색)의 감정이 읽힌다. “이게 나라냐”는 한탄과 우려가 함께 뒤섞이고, ‘대한민국’이 ‘부끄럽다’는 수치심의 감정까지 등장한다.

사리사욕에 몰두하는 ‘당신’의 대척점에 ‘우리’ ‘국민’이 있다. ‘이 나라’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우리 세금’을 최순실한테 퍼준 것은 잘못이다. 여론은 박근혜·최순실을 비판하면서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나라와 세상을 걱정(초록색)한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분노와 수치심은 ‘탄핵’으로 뭔가 ‘바꿔야’ 한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특혜’ ‘부모’ ‘실력’ ‘능력’ 등은 정유라(회색) 사건 관련 뉴스에서만 도드라지는 단어들이다.

개·돼지와 주권재민의 감각

“입시라는 한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을 때 이 문제를 부정부패와 부당함의 문제로서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정유라가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고 쓴 것이 결정타를 날렸다. 한국이 ‘계급사회’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었다. ‘개·돼지’ 발언부터 시작해 영화 에서의 재현이 20~30대 청년들에게는 ‘계급사회로서의 한국’에 대한 분노를 더 분명하게 각인시킨 측면이 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의 진단이다.

‘개·돼지’는 자기비하와 권력층을 비판하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나 같은 개·돼지가 좋은 건가. 잃을 것이 없으니…’ ‘이 개·돼지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이화여대 이제 개·돼지 아무나 입학할 수 있겠네’. 자기비하어뿐만 아니라 단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제외하긴 했지만 ‘무당녀’ ‘아줌마’ ‘치마’ 등 여성 비하적 단어도 많이 보였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엄청난 적으로 생각해서 난도질하는 거죠. 그룹 DJ DOC 노래, ‘친박페미(니스트)’ 논란 등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나’라는 성찰보다는 무조건 적으로 돌리고 어떤 험한 말이라도 해도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사회학자 오찬호)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에서 ‘권력’과 ‘국민’ ‘나라’ ‘국가’라는 단어가 주로 연결되는 데 주목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에서 “국민이 주권자라는 점을 깨닫고 되찾는 모습”이 뉴스 댓글에서도 엿보인다는 이유에서다. “국가권력의 주권자로서 (대통령을 탄핵시킨) 국민의 자리를 되찾아가는 역사적 국면이 열리고 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분노를 자조적으로 받아들이면 ‘헬조선’ ‘흙수저’ 같은 자기혐오와 만나고, 반대로 이를 ‘부당함’으로 인식하면서 점차 ‘민주주의 문제’로 확장하고 변화해나가면 또 다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광장에서의 경험, 팟캐스트 등 대안미디어를 통해 듣는 정치 이야기 등이 ‘주권재민’(권력은 국민에게 있다)의 감각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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