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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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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의 해’ 청년의 2017년

1천 명 온라인 설문조사·청년 9인 인터뷰·청년 연구자 8인 인터뷰

헬조선은 절망·이생망·멸망 넘어 ‘희망’으로 갈 수 있을까?
등록 2017-01-06 06:08 수정 2020-05-02 19:28
2017년 새해가 밝았다.
어느 해보다 절망과 희망이 엎치락뒤치락한다.
뜨거운 정치적 격변기다. 2016년 말을 활활 태웠던 촛불과 탄핵의 뜨거움은 2017년 최대 정치 이벤트인 대통령선거로까지 이어질까.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를 향한 열망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까.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2%대 경제성장률이 예상되고, 사회 곳곳에서 불평등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아우성이 높아간다.
은 2017년을 설명하는 두 가지 열쇳말로 ‘청년’과 ‘기본소득’에 주목했다. 정치·경제적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자, 87년 정치 체제와 97년 경제 체제를 넘어서려는 여러 논의에 맞닿은 주제라고 판단해서다. 2017년의 열쇳말로 이번호에서는 ‘청년’을, 다음호에선 ‘기본소득’을 다룬다.
취재 황예랑·송채경화 기자, 편집 진명선 기자, 디자인 장광석



2017,  ×망한다


상: 절망과 희망 사이, 청년
하: 희망의 최저선, 기본소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2017년은 ‘×망의 해’다. 비어 있는 × 자리에 어떤 글자가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절망, ‘이생망’, 개망, 폭망, 멸망이 될지, 아니면 희망, 열망, 갈망의 한 해가 될지는 내년 이맘때에나 판가름 날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2017년이 87년 민주화 체제, 97년 신자유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는 변곡점이 되리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에 어떤 글자를 써넣으려는 걸까.

리셋… 빻았다… 사다리 걷어차기

은 청년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시도로 2017년을 시작한다.

우선 2016년 12월20~23일 만 19~34살 청년 1천 명을 온라인 설문조사했다. 2015년 8월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진행한 ‘청년 의식조사’에 참여했던 응답자 1500명에게 1차로 설문지를 보내 461명의 답을 받았다.

지난 1년4개월 사이에 이들이 어떤 생각의 변화를 겪었는지, 이 과정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가 변화의 원인이 되었는지, 이것이 곧 있을 대통령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추적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표본 539명도 추가했다.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되고 있다’ ‘투표 등 나의 참여가 정치를 바꿀 수 있다’ 등 2015년과 동일한 질문을 던진 뒤 답변을 공정성지수, 사회참여지수 등으로 점수화해 비교했다. 설문조사는 2015년에 이어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맡았다.

온라인 단답형 질문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결을 살피기 위해 20대 청년 9명과도 인터뷰했다. 오랫동안 청년들의 마음을 관찰해온 연구자 8명에게도 자문했다.

왜 다시 청년일까. 2017년 한국 사회에서 청년은 단일하지 않다. “돈도 실력”이라고 말하는 정유라와, 컵라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서울 구의역 김아무개씨를 1996년생 동갑내기라는 이유만으로 ‘청년’이란 이름 아래 뭉뚱그려 똑같이 설명할 수는 없다. 청년들은 오히려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삼포세대’라는 호명이 청년에게 포기를 당연시하게 하고, 무기력감을 불어넣고, 청년을 주체가 아닌 객체의 자리에 놓아버린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청년에 주목한다. 청년이 지금의 사회에 균열을 내고, 다가올 사회를 주도할 주체이자, 새로운 문화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는 기존 체제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런 시공간에서 4·19세대, 386세대, 88만원 세대가 그러했듯이 특정 연령층, 그중에서도 청년 세대가 공유한 체험과 의식이 무엇일지를 밝히는 작업이 2017년 한국 사회를 내다보는 예고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청년 63% “현재 내 삶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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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조사의 열쇳말은 ‘헬조선’이었다. 1년이 지났지만 ‘망했다’ ‘지옥 같다’는 정서는 그대로다. ‘리셋’(reset) 또는 ‘빻았다’는 말로 변주돼 등장할 뿐이다. 20대 청년들에게 ‘요즘 청년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한마디가 뭘까’를 물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뜻의 ‘이생망’.”(최종민) “빻았다. 다 빻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나 상황이 너무 엉망진창이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박유영) “잉여. 애초에 주류로 편입되고 싶다는 정서 자체가 거세된 청년들은 스스로 사회적 잉여로 정치화하고 있다.”(김현우) “사다리 걷어차기. 사다리가 없어진 느낌. (사회·경제적) 배경이 없으면 하루에 8~10시간씩 일하며 힘들게 살아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김예리)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도 청년들의 마음에는 스산한 바람이 분다. 지옥 같은 나라에서 살아내야 한다는 지독한 절망감이 가득하다. ‘싹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절망 속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희망과 열망이 끼어들 틈이 있을까. 그 좁은 틈새에 촛불이 조금의 온기도 불어넣지 못한 것일까.

스무 살 승연씨가 처음 느낀 ‘절망’은 균열의 다른 이름이다. 평범한 일상의 어느 순간, 절망이 삶을 파고들었다. 그날도 시급 5580원을 받으며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주말마다 하루 7~8시간씩 아르바이트한 지도 열 달째.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빵집으로 찾아왔다. “할머니가 위독하셔.”


“한 하늘 아래 있지만 나와 정유라의 세상이 분리돼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유영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상냥하기만 했던 사장님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안 돼. 너밖에 일할 사람이 없는데, 나는 어떡하니.” 결국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뵙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3시간 더 일해서 1만5천원 더 벌자고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한 달 뒤 빵집을 그만뒀다.

승연씨는 1996년생, 정유라와 동갑이다. “사실 정유라에게 느끼는 박탈감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일상적인 감정이에요. 돈 있는 애들이 사교육 받고 좋은 대학 들어가는 건 매번 있는 일이잖아요.” 익숙해진 절망감은 마음에 균열도 내지 못한다. “정유라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 한 하늘 아래 있지만 나와 그들의 세상이 분리돼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우리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하는 게 너무 당연한 세상에 살거든요.” 동갑내기 유영씨는 세상의 균열을 절감한다.

절망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현재 내 삶이 ‘불안하다’고 답한 청년이 63.6%. 2015년 52.5%보다 껑충 뛰었다.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한 응답자는 27.1%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희망’(47.6%)보다는 ‘절망’(52.4%)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도 2015년에는 ‘희망’(61.8%)이 ‘절망’(38.2%)보다 컸다. 1년4개월 사이 대한민국 청년들의 절망은 더 깊어졌다.
특히 주관적으로 느끼는 계층의식에 따라 불안과 절망은 더 컸다. 관련기사 속 ‘청년들의 삶과 사회에 대한 생각’ 그림에서 보듯이, 계층의식이 낮아질수록 ‘내 삶은 불안하다’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대한민국은 살기 어려운 나라다’라고 답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

격차사회에서의 불안과 절망은 숨 쉬는 공기처럼 일상적이다. 스무 살부터 주차장, 일식집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세윤(25)씨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주변에 힘든 고졸 실업자 친구도 많은데, 항상 청년 정책이라고 하면 대학 등록금이나 대졸 실업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진다. 스스로 중하층으로 여기지만 지금 하는 디자인 관련 업무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불안해도 굶어죽진 않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다른 세대들처럼 “한 회사에 뼈를 묻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1~2년짜리 계약직은 세윤씨 세대에게는 당연한 선택처럼 여겨진다.

취업준비생 예리(25)씨도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낀다. “언젠가 엄마가 걱정을 토로한 적이 있어요. 엄마는 네 교육비도 책임지고 할머니·할아버지 부양도 책임졌는데, 내가 노인이 되면 자식에게 부양도 못 받겠다면서 걱정하시더라고요.”

예리씨는 부모님과 자신이 중간층이라고 생각한다. 불안은 중간층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부모님께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고 기대며 살았는데, 부모님 세대처럼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고 생각하면 답답해요.”

‘노오력’하면 될까? 19%만 “그렇다”청년들은 ‘노오력’해도 안 된다는 걸 점점 더 깨닫는 중이다. ‘열심히 일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19%에 불과했다(관련기사 속 ‘청년지수 2015년-2016년 비교’ 그림 참조). 2015년엔 22.7%였다.
2015년과 2016년 모두 설문조사에 응한 461명의 대답만 놓고 보면, 계층 이동 가능성을 믿는 응답률은 16.7%로 더 떨어진다. 이 문항과 ‘우리 사회는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문항을 묶어서 ‘패자부활지수’ 점수를 내보았더니, 2016년 28.1점으로 2015년 28.8점보다 다소 하락했다.
‘공정성지수’의 하락도는 더 가파르다. 2015년 20.6점에서 2016년 15.65점으로 떨어졌다. ‘사회적 성취에서 부모의 경제적 지위보다 나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자가 2015년 27.3%에서 2016년 20.1%로 크게 줄어들고, ‘우리 사회는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된다’는 응답률 역시 13.9%에서 11.2%로 줄어든 탓이다.
지난 석 달여 촛불집회의 경험이 청년들 마음에 ‘연대와 협력’이란 새로운 희망의 씨를 뿌려놓지는 않았을까. 아니었다. ‘청년협력지수’는 2015년 53.6점에서 2016년 52.7점으로 하락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다’(33.9%→28.3%), ‘나는 주변 사람을 신뢰한다’(65.2%→59.9%)는 문항 모두 부정적 답변으로 이어졌다.

“불안한데 어디에 기대할 게 없기 때문이다. 30대가 되면 무조건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잖나. 일자리, 세금, 결혼, 출산 등 기존 시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라고는 하는데, 지금은 현실적으로 그 기준 자체가 흐트러진 상황이다. 그런데도 사회적 기대는 여전해서 개인에게는 압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다보면 ‘나는 왜 (이전 세대처럼) 안 되나’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회는 변했는데 청년들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장’은 청년들이 현실과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좌절감이 여러 지수 하락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불신과 절망감은 끊임없이 추락하는데, 공존과 연대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은 좁아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분노는 일상적으로 품고 살아야 하는 감정이 됐다. 대학원생 주리(28)씨는 “항상 분노에 차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전에도 계속 분노가 있었지만 세월호 때 가장 커졌어요. 계속 분노하던 상태였죠.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쏟아져나왔는데, 이제 와서 관심 가져주는 게 다행이기도 하고, 이제 와서 왜 그러나 싶은 생각도 들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사람들 가슴속에 꿈틀대던 분노가 집단적으로 끓어오르게 한 ‘비등점’이었다.

정유라 분노 뒤에 깔린 ‘과잉 능력주의’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정도를 0점에서 10점으로 표시해보게 했더니, 전체 분노지수는 9.09점이 나왔다. 최순실과 주변 세력의 국정 개입에 대한 분노가 9.70점으로 가장 높았지만, 그 뒤를 이은 사건은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학 및 학점 특혜 의혹(9.62점)이었다(아래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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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의 ‘돈도 실력이야’라는 말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한 것은, 많은 청년들이 그것이 실제 사회가 돌아가는 룰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토록 분개한 것이다. 정유라의 경우엔 탈법과 편법이 동원됐지만, 요즘 눈 돌아가게 복잡한 입시만 봐도 부모의 재력과 교양, 정보력이 자녀의 실력으로 환산되게 만들어진 체제가 된 지 오래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럼니스트 박권일( 저자)의 진단이다.

실제 청년들에게는 모순된 감정이 존재한다. 이화여대에 다니는 규리(21)씨는 “능력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언사가 불편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노력해서 이렇게 좋은 학교에 들어왔는데, 정유라는 노력 없이 엄마 때문에 들어와서 학위 따면 되느냐는 얘기가 많았다. 노력의 정도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면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큰 것 같다. 방학 때 콜센터에서 일하는 친구는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힘들게 근무하는데 기본급 130만원을 받는다. 말이 안 되게 불공정한 노동인데, 그 얘기는 하지 않는다.”

연세대에 다니는 성연(20)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을 보면 능력주의 신화가 강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대학 입시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원에 영향받는 것인데 그것도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생존 본능을 내면화한 청년들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능력은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이 때문일까. 대선 주자들은 촛불 민심에 불평등·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변화 열망이 깔려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청년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선 후보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고려할 해결 과제를 물었더니 ‘불평등 완화’를 꼽은 비율은 크게 높지 않았다.
아래의 ‘다음 대선 후보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고려할 해결 과제는?’그림에서 나타나듯이, 중요 해결 과제 1순위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정치개혁’(60.1%)이었다. 1·2순위를 꼽게 해서 합산한 결과다. 정치개혁이 압도적인 가운데 ‘청년 일자리 등 미래 해법 제시’(31.6%), ‘경제활성화’(30.4%), ‘정경유착 근절’(28.9%), ‘불평등 완화’(22.6%) 등은 후순위로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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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강력한 변화를 원한다고 (촛불 민심을) 생각하는 것은 조금 낭만적인 해석 같다. 성장 패러다임이나 불평등이 문제다? 이런 질문은 윗세대의 생각이다. 정유라에 대한 분노도 경쟁사회나 능력주의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정유라가 함께 경쟁하지 않고 경쟁체제 자체를 뒤엎은 ‘반칙왕’이기 때문에 화내는 것에 가깝다.

울분을 터뜨리긴 했지만 체제의 근본적 저항과 변화까지 가기에 청년들은 너무 불안하다. 현실에 지쳐 있고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대학 졸업반인 청년들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매주 광화문에 나가지만 SNS에는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면접에서 잘못 걸리면 끝장’이니까. 절망적 현실은 ‘내가 함부로 이탈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이유가 된다.” 사회학자 오찬호의 분석이다.

‘공시족’ 42명을 인터뷰해 공무원시험 열풍을 살펴본 책 에서 그는 “격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고, 일단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아지면 불평등을 줄여나갈 제도를 요구할 ‘정치적 시민’이 등장하기 어려워진다”고 진단한 바 있다.

“청년들이 촛불을 들고 분노한 감정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싫어서’에 가깝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경쟁의 완전체로 살아온 청년들이 체제 전복은 아니라도 ‘목소리 하나는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행동했다는 건 놀라운 일임이 분명하다.”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가 높게 나온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청년들이 ‘문제는 정치다’라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봤다. “청년들의 문제를 제대로 치유하고 해결하려면 청년들의 권익을 대표할 정치가 이뤄지길 바라는 태도가 엿보인다. 경제·복지·일자리 등이 결국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정치개혁을 1순위로 꼽았을 거다.”

유일하게 ‘사회참여역량지수’만 상승실제 이번 조사에서 유일하게 2015년보다 높아진 항목이 ‘사회참여역량지수’다. ‘투표 등 나의 참여가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응답이 62.7%에서 77.4%로, ‘정치가 바뀌면 나의 삶도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72.7%에서 76.3%로 높아졌다. 이에 힘입어 사회참여역량지수도 2015년 64.3점에서 72.97점으로 껑충 뛰었다(관련기사 참조).
실제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정치적 효능감이다. 응답자 1천 명 가운데 27.2%가 ‘최근 3개월 동안 촛불집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서명운동’(35.1%)이나 ‘인터넷 토론 참여 및 댓글 달기’(41.6%) 참여도는 더 높았다.
하지만 청년들이 원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는 아직 흐릿하다. 아래 ‘청년이 희망하는 사회상’ 그림은 청년들이 희망하는 사회상을 오각형으로 그려본 것이다. 분배와 성장, 평등과 경쟁력, 사회보장에 대한 국가 책임과 개인 책임, 연대·협력과 경쟁·자율, 경제적 성취와 삶의 질 등 5가지 항목에 대해 청년들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질문한 결과를 점수로 환산해봤더니, 대부분 항목에서 2015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림에서 가운데로 갈수록 분배, 평등, 국가 책임, 연대와 협력, 삶의 질을 중시하는 진보적 가치 지향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분배, 평등, 연대와 협력 등 3개 항목에서 보수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왔다.
2016년 12월24일, 청년들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산타 복장을 하고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박승화 기자

2016년 12월24일, 청년들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산타 복장을 하고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박승화 기자

청년들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소망하는 것일까. 분석은 엇갈렸다. “청년 세대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보다는 불평등이 (더 심해질지언정) 납득 가능한 사회를 원하고, 정치개혁은 이를 위한 도구여야 한다는 생각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동력의 극히 일부는 체제 변혁적 열망이지만, 나머지 상당 부분은 능력주의에 입각한 체제 정상화 열망이다. 그 한 극단에는 능력을 사실상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과잉 능력주의’가 있다. 이는 능력 있으면 신(○○갓)으로, 무능력하면 벌레(○○충) 취급해도 된다는 혐오 논리까지 정당화하게 된다.”(박권일)

이 인터뷰한 청년들에게 ‘지금 원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고 물었을 때 ‘안정감’ ‘예측가능성’ ‘여유’ 등이 나온 이유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삶이 워낙 불안하니 안정된 삶을 좇고, 사회도 경제도 정치도 안정되길 바란다. 청년만이 아니라 전반적 여론 흐름이기도 하다. 정치개혁 열망은 갖고 있으되, 누군가 성급하게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나서면 “완장질 하지 말라”고 비판한다. 이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인정일 수도, 정치적 허무주의일 수도, 권력 해체주의일 수도 있다.

광장은 희망, 현실은 절망
2016년 12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청년매칭 2016 잡페어’ 행사장에 참석한 청년들. 청년들의 고민 1순위는 “고용과 일자리 문제”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16년 12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청년매칭 2016 잡페어’ 행사장에 참석한 청년들. 청년들의 고민 1순위는 “고용과 일자리 문제”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청년 세대만이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 묘한 경계심이 작동하는 것 같다. 다수의 민심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자’ ‘완전히 붕괴된 시스템을 작동되는 시스템으로 만들자’라는 방향이라면 그런 상생과 소통이 되는 시스템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하는데 아직은 설득과 소통의 과정이 부족하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는 경계심이 믿음이 되지 않으면 ‘시민’이 힘을 받기 힘들다고 본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좀더 긍정적 해석을 내놓는다. “청년들이 말하는 ‘완장질 하지 말라’가 사회적 권위에 쉽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감각이라고 한다면 청년 세대가 할 수 있는 ‘다른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화여대 투쟁이 학벌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투쟁이냐, 신자유주의 대학의 반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냐로 나누는 게 아니라 양극단을 메꾸는 스펙트럼으로 청년 세대를 보아야 한다.”

그는 청년들의 모순된 상황 인식에 대해 “주말에는 광장에서 축제처럼 정권 퇴진을 말하고, 월요일이면 꼼짝없이 치열한 현실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의 반복이 상징하듯, 정치적으로 조금씩 의식화되고는 있지만 처절한 현실인식을 극적으로 바꾸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청년 세대를 ‘서바이벌(생존) 세대’로 명명했던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 역시 “청년들에게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삶 속에서 기존 성장 모델을 대체할 그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탄핵, 특검 등이 절차적으로 완수되지 않은데다, 거리에서 두어 달의 집단행동 결과가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청년들은 그동안 정치적 주체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박탈된 존재에 가까웠다.”

지난 석 달여간 분노가 비판으로 전환하고,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서는 참여로 이어졌다. 우리가 사회를,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하지만 광장과 일상은 아직 분리돼 있다. 광장에서는 희망을 보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절망해야 하는 탓이다. 분노는 촛불을 들 동력은 됐지만, 촛불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변화를 꾀할 만큼의 에너지가 되진 못하고 있다.

최근 라는 책에서 사회학자 엄기호씨는 ‘리셋의 언어’는 있지만 ‘구축의 언어’는 없기 때문이라고 이런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불신과 불만이 가득하지만, 리셋한 이후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 희망과 열망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의 마음속에선 ‘사회’라는 단어가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현재 삶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를 묻는 질문(2개 중복응답, 1·2순위 합산)에 30.3%가 ‘불안정한 시국’을 꼽았다. ‘고용 및 일자리’(57.8%)와 ‘주거비 부담’(31.6%)에 이어 3순위로 나라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다(아래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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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로 청년들의 ‘무기력감’에는 균열이 생겼다. “물론 정치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회사나 학교 등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불합리와 부조리, 엄청난 경쟁과 불평등이 과연 바뀔까 하는 회의적 시선도 있다. 486세대는 1987년 6월 항쟁, 1970년대생들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대한 기억이 있지만, 지금의 20~30대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이 모여 시위하고 나서 세상이 정말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면 역사적 경험이 필요하다.”

엄기호씨는 촛불과 더불어 서울 구의역과 강남역 사건을 주목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청년들의 죽음이었다. 유례없는 추모를 경험하면서 청년들이 ‘이게 청년이, 사람이 살 만한 나라냐’는 ‘집단적 운명’ 같은 걸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헬조선’과 ‘흙수저’라는 자기비하에서 시작된 2016년, 청년들은 또래 친구의 죽음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16년 청년들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희망적인 말인지는 몰라도 ‘망한 데서 시작하라’는 말이 있어요. 강남역 사건이 임신중절 합법화 시위 등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폐허에서 꽃을 심는 인상을 받았어요.”(이규리)

“주성치 영화를 보면 버겁고 힘들지만 자기 식대로 위트 있게 넘어가는 힘이 있어요. 우리한테도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정주리)

“아직 절망, 그래도 약간의 희망. 박근혜·최순실 덕분에 뭔가 희망이 생겼어요. 우리 삶은 더 슬퍼졌지만, 부당한 권력자가 처벌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기분 좋아지죠.”(박리세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버려두자, 시위 나가봤자 뭐하냐’가 아니라 ‘우리나라인데…’라고 생각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탄핵을) 요구하고 또 실제로 관철했다는 점에서.”(조성연)

우리가 인터뷰한 청년의 절반은 ‘요즘 청년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한마디’로 절망보다는 희망의 언어를 선택했다. 다 타버려 재가 된 줄만 알았던 희망의 심지가 다시 솟아나는 걸까. 아직 청년들의 나침반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불안한 듯 떨고 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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