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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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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은 준비가 끝났다”

촛불이 불러온 대안정치 실험, 직접민주주의 프로젝트 ‘시민의회’ 공동제안자 이진순 와글 대표 인터뷰
등록 2016-12-16 19:14 수정 2020-05-02 04:28
4부_시민의 시간
박근혜 퇴진과 정치 개혁을 위해 촛불은 흔들림 없이, 길게, 즐겁게 타올랐다. 불타오른 민심은 광장에서 새로운 촛불의 역사를 썼다. 지난 한 달간 광장의 촛불이 밝힌 민주주의 논의를 담았다. 탄핵 이후 촛불이 걸어가야 할 길도 찾아봤다.

“너희가 안 하면 우리가 한다.” 촛불이 세게 타오를수록 시민들은 목이 말랐다. 광장의 촛불과 의회의 정치세력은 서로 다른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의 시간이 훨씬 빨리 흐른다. 시민들이 한 발짝 성큼 나가면 정치권은 눈치 보고 계산하며 뒤꽁무니를 쫓아가기 바빴다.

96% 시민들의 분노와 열망에 즉각 반응하지 못하는 의회정치에 답답함을 느낀 시민들은 결국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정치 스타트업 ‘와글’, 한국YMCA전국연맹 등이 참여하는 ‘시민의회’(http://citizenassembly.net)가 주장하는 ‘시민대표단’이 그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1차 공동 제안자로 참여한 이진순 와글 대표를 만났다.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기로에 선 촛불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이 촛불 다음으로 내디딘 발걸음의 향방을 물었다. 그는 “처음 하는 일이다보니 고민이 많고, 두렵기도 하다”며 미래를 선뜻 예측하진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시민들은 이미 준비가 다 끝났다.”

시민대표단의 역할은 명료하다. 시민의 의견을 가감 없이 정부기관, 검찰, 언론에 전달하는 사람. “국민의 여론을 가감 없이 대변할 정직한 대리자”여야 한다. 광장의 목소리를 “정치적 협상의 명분으로, 흥정의 대상으로 축소”하고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말과 행동을 바꾸는” 제도권 정치 대신, “처음부터 일관되게 박근혜 퇴진과 포괄적인 국가 개조”를 주장해온 ‘진짜 시민 대표’여야 한다.

여기에 동의한 1차 제안자로 학생, 목수, 학자, 회사원, 무직자, 작가 등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공동제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민의회가 문을 연 지 이틀째인 12월9일 현재, 총 1141명의 시민이 대표단 구성을 지지했다.

디지털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가 기존 제도권 정치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세계 곳곳에서 사례가 축적되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일까.

100% 그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불가역적 변화다. 거꾸로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보기술이 발전하면서 예전보다 대리자 자체가 필요 없어진 점도 있다. (마주 앉은 기자를 가리키며) 그러니까 기자들도 힘든 것 아닌가. 사람들이 기자보다 현장에 먼저 가고 사진도 찍어 올리고…. 그런다고 전문가가 없어지진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전체가 (이슈를) 생산하고, 그 자체로 미디어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너희는 4년 동안 잠잠히 있다가 투표만 해. 투표 끝나면 애프터서비스는 없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정치세력은 특권 계급화해서 99% 시민들보다 금융자본 위기를 감경해주는 방향을 택했다. 여기서 시민들은 기존 정치세력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전 지구가 도 아니면 모로 가는 것 같다.

새로운 방식의 시민 주도 정치세력을 만드는 나라들이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핀란드, 아이슬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이다. 한편 기존의 딱딱한 정치제도 아래에 갇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미국이나 극우 포퓰리즘 경향을 보이는 프랑스, 독일이 있다.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우리도 중요한 기로에 있다는 뜻인가.

개인적으로 1987년에 굉장한 트라우마가 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이겼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2000년에는 386세대가 정치에 많이 나가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인물을 정치권에 밀어넣어도,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다 믹서처럼 갈려버리더라. 정치가 제대로 바뀌지 못하는 장면을 보고 너무 실망했다.

이번에도, 몇몇 괜찮은 인물들이 대선캠프에 들어가고 원래 있던 당파, 계파… 이런 식으로 블랙홀로 빠져들면 어떻게 될까. 이번 시국에 처음 집회에 나오고, 처음 정치에 대해 말한다는 청년들이 거리에 쏟아졌다. 5년 뒤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때도 여전히 취업이 안 되고, 결혼이 힘들고, 집을 못 사는 상황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해봤자 안 돼’라고 말하면 어떡할까. 그러면 우리도 충분히 극우 포퓰리즘의 길로 갈 수 있다.

촛불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돌아올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또 이 사람들만 남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열심히 나오는 사람들 어떻게 해야 덜 실망할 수 있을까?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대표를 세우자
정치 스타트업 ‘와글’, 한국YMCA전국연맹 등이 참여하는 ‘시민의회’는 12월12일부터 16일까지 시민대표 후보 추천 기간을 거쳐 19일에 시민대표단을 구성한다. 시민의회 누리집 갈무리

정치 스타트업 ‘와글’, 한국YMCA전국연맹 등이 참여하는 ‘시민의회’는 12월12일부터 16일까지 시민대표 후보 추천 기간을 거쳐 19일에 시민대표단을 구성한다. 시민의회 누리집 갈무리

그에게는 제도권 정치가 광장의 민심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몇몇 장면이 있다. 화장실이 부족한 집회 현장. 함께 집회에 나섰던 딸이 화장실이 급해 시민들에게 개방한 서울 광화문 파출소 화장실을 찾은 적이 있다. 한 칸밖에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었다. 중간에 꼬마라도 한 명 발을 동동 구르고 오면, 사람들이 “그래, 너부터 들어가라” 하니 줄이 줄지 않았다.

“그런데, 그 추운 데 나와서 화장실에 갔다가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돌아가요.” 이진순 대표의 목소리가 울컥했다. “웬만하면 그냥 가자, 집에 가는 길에 뭐 어디서… 이럴 것 아녜요.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30분 동안 줄 서서 오줌을 누이고 원래 있던 차가운 바닥으로 돌아가잖아요. 거기 3살, 4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같이 앉아 있잖아요, 주말마다. 저는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큰 담보가 그것 말고 또 있을까 생각해요.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을…. 그건 시민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 거예요.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촛불 민심을 대변하는 시민대표단이 꾸려졌을 때, 1차 공동 제안자의 일원으로서 기대나 상상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정치 시스템을 실험해보는 거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고, 계급장 다 떼고 토론하는 거다. 시민의회 홈페이지에서 토론하는 이들은 중고생, 대학생, 평범한 취업준비생부터 어딘가에 칼럼 쓰고, 발언하고, TV토론회에 나오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다. 서로 이름이 뭔지 모른 채 같이 얘기한다. 누구나 토론할 수 있는 곳이 여기다.

대변인은 말 그대로 이들의 대의자가 되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에게 마이크를 주자. 온라인에서 익명으로든 실명으로든 주장을 개진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합류할 수 있게 하자. 그런데 이런 목소리를 모아서 대신 발표하는 사람, 시민대표단은 뭔가 지휘·감독하거나 평시민보다 권한을 더 가지지 못하게 하자. 원래부터 그래야 당연하지만, 이걸 정치권에서 안 하고 있으니 우리가 해보자. 대의할 의지가 없는 대의자는 더 뽑지 말자.

촛불 시민들에게 마지못해 등 떠밀려 움직이는 여야 모두 똑같다. 나는 정치권에서 제안하는 변화를 믿지 않는다. 대통령제도 제대로 했으면 이렇게까지 안 왔을 거고, 의원내각제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었다. 개헌을 하더라도 그들이 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기득권의 정치 독점을 없애는 법을 집어넣고, 시민 입법권을 신설하는 등 국민의 권리를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정치스페인의 포데모스, 아이슬란드의 해적당 등이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이들을 롤모델로 삼은 건가.

해외에서 성공한 직접민주주의 사례가 중요한 인사이트를 주긴 한다. 하지만 참고 정도. 더불어 시민의회는 임시적 온라인 시민 네트워크지, 정당은 아니니까. 요즘 새로 움직이기 시작한 사회 변화 추구 세력은 바텀업(Bottom-Up) 방식의 변화를 열망한다. 마을운동, 공유경제, 소셜벤처… 이런 걸 하는 사람들은 톱다운(Top-Down) 모델에 비판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지금 시민의회에 실무 지원팀으로 들어와 있다.

디지털 기반으로 움직이다보니 온라인에 친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배제된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여러 해외 사례에서 배운 바인데, 제도권 직업정치인과 주도권을 가지지 않은 시민 사이에 놓인 장벽이 온라인에 능숙한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보다 훨씬 두껍다. 온·오프라인을 병행할 때는 오프라인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온라인에 올릴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얼마 전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참여국에 있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다. 그는 노인 그룹에서 일한 경험을 말했다. 전화받을 줄만 알고 문자 보낼 줄은 모르는 어른들과 같이 일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온라인에서 말해줬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민대표 규모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개인적 생각은, 전국 단위의 다양한 지역별·이슈별 의제를 대변할 사람들 3천~4천 명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뽑을 수는 없으니 30명이든 100명이든 300명이든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을 말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누구나 후보가 될 수 있다

시민의회는 12월12일부터 16일까지 시민대표 후보 추천 기간을 거쳐 19일에 대표단을 구성한다. 대표단 후보는 누구나 가능하다. 일단 후보로 추천되면 자격 심사나 검증 없이 무조건 후보에 오른다. 자기 자신을 추천해도 된다. 추천과 투표를 통해 뽑힌 후보는 최소의 배제 요건과 개인의 참여 의사를 반영해 대표단으로 최종 선정된다. 시민대표단이 할 일은 이진순 대표가 인터뷰 내내 강조했듯 간단하고 중요하다. 각계각층 수많은 시민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것이다.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이 실험의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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