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하고 따뜻한 혁신 보수당을 만들겠습니다!”
지난 8월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이정현 신임 당대표가 수락연설에서 던진 화두는 ‘보수 혁신’이었다. 계파 화합, 지역주의 타파, 사회적 약자와 청년문제 우선 해결, 당 체질 개선 등 온갖 쇄신책이 제시됐다. 4·13 총선 참패를 딛고 내년 대선에서 보수정권을 재창출하려면 ‘대변화’가 필요하다고 그는 호소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개혁·쇄신·혁신’ 구호 휘날리며</font></font>이 대표의 수락연설은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새누리당은 뼈를 깎는 변화를 부르짖었다. 기득권에 집착하는 구태정치를 버리고 국민만 바라보는 새정치를 하겠다고 유권자에게 매달렸다. ‘보수 개혁’ ‘보수 혁신’ ‘보수 쇄신’ 등 표현만 달라졌을 뿐이다. 때로는 당 노선이나 정책 기조 변화를, 때로는 당내 민주주의 강화나 공천 물갈이를 뜻했던 보수 개혁·혁신·쇄신 ‘구호’를 통해 새누리당은 문 닫을 위기를 수차례 넘어서며 지금까지 기득권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특히 당 노선 또는 정책 기조 ‘수정론’은 가장 파급력 있는 보수 개혁안으로 통했다. 여야가 팽팽하거나 여당이 뒤처지는 선거를 앞두고 대권 주자들은 어김없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대북안보에 목매는 강경 보수에서 탈피해 합리적·중도 보수로 이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생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정당으로선 환골탈태 노력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좌클릭’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중도화 전략으로 보수정당의 대권 주자들은 예선에선 이전 대통령이나 경쟁 후보와 차별화를 꾀했고, 본선에선 ‘보수+알파(α)’로 지지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대통령(YS)도 ‘보수정당 개혁’을 말하긴 했다. 문민정부 중반인 1996년 총선을 앞두고 군사독재 이미지가 짙은 민주자유당의 간판을 신한국당으로 고쳐 달고, 민중당 출신인 이재오·김문수와 ‘모래시계’ 검사 출신 홍준표를 직접 ‘개혁공천’해 총선 승리를 이끈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YS의 개혁공천은, 1년 전인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한 데 따른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을 막으려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야당 투사였던 YS가 ‘3당 합당’(1990년)을 통해 군사·독재 세력을 포함한 ‘보수대연합’의 우두머리로 정권을 잡은 것이 불과 6년 전 일이었다.
1997년 차남 김현철의 불법적 국정 개입 등으로 국정 운영 불능 상태에 빠진 YS로부터 신한국당 총재직을 이어받은 이회창은 과거 민주정의당 출신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YS를 추종하던 민주계는 반이회창 진영에 가담했다.
‘이인제 탈당’이라는 보수의 분열로 대선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에 석패한 이회창 총재는 두 번째 대선 도전을 앞두고 보수 개혁을 전면에 들고나왔다. 그는 “한나라당은 보수의 기조 위에서 개혁을 지향하는 이른바 ‘개혁적 보수 정당’이다”(2001년), “우리가 추구하는 보수는 개혁적이며 공정하고 따뜻한 보수다”(2001년)라며 노동권 존중과 경제·사회적 세습 방지 등을 주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 야당으로 전락한 보수정당이 대여 강경투쟁을 벌이려면 전통 지지 기반인 기득권 외에 서민·중산층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의 ‘개혁적 보수주의’는 3당 합당으로 보수와 진보 등 이질적 세력이 뒤섞여 있던 한나라당의 ‘보-혁’ 노선 갈등을 폭발시켰다.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는 금강산관광을 비롯한 대북사업,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럼에도 이회창 총재는 어정쩡하게 대응했다. 결국 2002년 대선에서도 이 총재는 보수주의적 대북관과 엘리트 이미지, 아들 병역 문제 등 아킬레스건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민 대통령’을 앞세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에 또다시 패배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혁신’ 이미지에 밀린 ‘강경보수’ 이미지</font></font>야당으로 자리잡아가던 한나라당은 총선을 한 달 앞둔 2004년 3월, 당 존립을 흔드는 시련을 자초한다. 최병렬 대표는 ‘차떼기당’(2002년 불법 대선자금 모금 사건)의 오명에서 탈출하려는 반전 카드로, 민주당과 합작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가 엄청난 후폭풍을 맞았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10%대 초반으로 곤두박질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열린 임시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됐다.
당의 운명을 짊어진 박 대표 역시 보수 개혁 카드를 꺼내들었다. 전당대회 직후 “한나라당이 부패 정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오늘 새롭게 출발했다. 지금 있는 당사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당장 천막당사 생활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기회를 한 번 더 달라”는 박 대표의 처절한 읍소로,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목표치였던 개헌 저지선(100석)을 넘은 121석을 확보했다. ‘선거의 여왕’에 등극한 뒤 박 대표는 “보수(保守·보전하여 지킴)는 보수(補修·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침)”라고 주장하면서 ‘보수 리모델링’ 전략을 폈다. “남북은 분명히 체제가 달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굳건히 하면서도 남북 공동의 발전을 위해 유연하게 나갈 것”이라며 대북정책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자연스레 박 대표는 개혁적 보수, 중도보수를 주장하는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이 주축이 된 ‘수요모임’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영남권 보수 성향 의원 중심의 ‘자유포럼’이 “우리가 ‘왼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은 포퓰리즘”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자 박 대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4년 10월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 입법’ 추진을 계기로 박 대표는 자유포럼과 한배를 탔다.
이때부터 굳어진 강경보수 이미지는 대선 주자인 박 전 대표에게 독이 됐다. 2005년 초만 해도 한나라당에서 경쟁자 없이 ‘박근혜 대세론’을 굳혀가던 박 전 대표는, 탈이념·실용주의를 앞세운 이명박 서울시장에 점점 뒤처지기 시작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으로 청계천 복원 사업과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등의 성과를 낸 이 시장은 굳이 “한나라당을 바꾸겠다”고 외치지 않았지만 유권자들은 ‘이명박=혁신’의 등식을 떠올렸다.
그럴수록 박 전 대표는 중도 세력을 새롭게 포섭하기보다 기존 보수층을 끌어안는 ‘집토끼 전략’에 매달렸다. 결국 박 전 대표는 경선에서 당원·대의원의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일반 유권자 여론조사에서 밀려 고배를 마셨다. 자녀 위장 취업, 도곡동 땅 차명 의혹, BBK 연루 의혹 등이 줄줄이 제기된 혹독한 예선전에서 살아남은 이 전 시장은 본선에서 지리멸렬한 여권 후보들을 손쉽게 누르고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이명박 정부에서 홍준표 체제가 갓 출범한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실패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잃게 되자 한나라당은 발칵 뒤집혔다.
설상가상 두 달 뒤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 홍보본부장인 최구식 의원의 비서 등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박원순 후보의 누리집을 디도스(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당은 또다시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홍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유승민·남경필·원희룡 최고위원은 최고위원직을 던져 홍준표 체제를 무너뜨리고 박근혜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조기 등판시켰다.
2012년 2월 다시 당 전면에 나선 박 비대위원장은,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정책) 공약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의 극단을 달렸던 이전 모습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경제민주화를 상징하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과 당내 쇄신파의 주장에 따라 보편주의와 선별주의를 아우르는 평생맞춤형 복지, 경제민주화 실현, 균등한 교육 기회 보장 등 중도적 노선과 정책 기조를 담은 정강·정책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한나라당의 간판도 14년3개월 만에 새누리당으로 바꿔 달았다. 결과는 또 승리였다. 새누리당은 4·11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단독 과반을 차지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변신’은 대선 승리까지만</font></font>그로부터 넉 달 뒤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가 된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는 국민행복 첫걸음”이라며 경제민주화를 핵심 대선 공약으로 채택하고 김종인 비대위원을 대선캠프의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중용했다. 변신은 여기까지였다. 박 비대위원장의 측근인 홍사덕 전 의원과 최경환 의원이 ‘보수 대통합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시장주의자인 이한구 원내대표는 “경제민주화는 정체불명의 포퓰리즘”이라며 노선 투쟁에 나섰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강경파의 손을 들어준 박 후보는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재벌 총수 급여 공개 등) 경제민주화 공약을 수용할 수 없다”며 김종인 위원장과 결별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4"><i><font color="#991900">임기 내내 ‘말 바꾸기’ 비판에 시달리던 박 대통령에게 지난해 4월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고 선언한 유승민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비수로 꽂혔을 것이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2012년 말 박빙의 승부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넘어선 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경제민주화 대신 ‘경제 부흥’을 앞세웠다. 이후 공약과 달리 경제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들을 줄줄이 특별사면했고, 기초연금 지급·4대 중증질환 국가 보장 등 복지정책은 축소했다.
임기 내내 ‘말 바꾸기’ 비판에 시달리던 박 대통령에게 지난해 4월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고 선언한 유승민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비수로 꽂혔을 것이다.
유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은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다”면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성장 효과도 없이 재정건전성만 해치는 단기 부양책”이라고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을 정면 비판했다. 그러면서 성장·복지의 균형발전, ‘중부담-중복지’ 모델, 부자·대기업 증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강화 등 진보적 의제들을 꺼내들었다. 앞서 2011년 당시 유 의원이 전당대회 출마선언문에서 주장한 감세 중단, 복지 확대, 비정규직 축소, 청년의무고용할당제 등 ‘용감한 개혁안’을 좀더 다듬은 것이다.
일부 여당 의원과 야당에선 “한국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줬다”는 극찬이 나왔지만 친박 의원들에게선 “너무 나갔다” “자기 정치를 한다”며 분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와대와 친박이 합작한 ‘유승민 찍어내기’의 전조였다. 그로부터 두 달여 뒤 ‘국회법 파동’ 과정에서 박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힌 유 원내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보수 개혁’ 실현하려면 대선 고지 올라야</font></font>친박 강경파가 완전히 장악한 새누리당에서 유 의원이 자신이 바라는 보수 개혁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 가지다. 스스로 권력의 정점이 되는 것이다. 유 의원 역시 “(대선 출마를) 굉장히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낮은 인지도, 취약한 세력, 친박의 방해 등 약점을 극복하고 대선 고지에 오른다면 보수정당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란 당 안팎의 기대도 적지 않다.
“이전 대권 주자들은 중도를 잡기 위한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말로만 보수 개혁을 외쳤다. 그러나 유승민은 목숨 걸고 행동으로 박 대통령과 맞서왔기 때문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세가 약한 유승민이 차기 유력 주자로 떠오르긴 아직 어려워 보인다.” 새누리당 당직자의 말이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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