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국가의 살인

백남기 농민 영면 다음날인 9월26일부터 부검영장이 발부되던 28일까지

애도와 분노로 채워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현장 72시간의 기록
등록 2016-10-04 16:29 수정 2020-05-03 04:28
<font color="#006699">9월25일 백남기 농민이 영면한 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덮친 것은 슬픔보다 분노였다. 백씨를 317일 동안 진료한 서울대병원은 석연치 않은 사망진단서를 작성했고, 경찰과 검찰은 백씨의 사망 원인을 확인해야 한다며 유족이 원치 않는 부검을 강행하려 한다. 은 백씨 영면 다음날인 9월26일부터 부검영장이 발부되던 28일까지 사흘 동안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현장 취재했다. 사망진단서 및 부검 결정을 둘러싼 의혹, 백씨 가족으로부터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당한 경찰 고위 간부들의 면면을 살폈다. 공권력 남용의 대표 사례가 된 물대포에 대한 법적 통제 문제도 짚었다.
취재 진명선·정환봉·김선식·서보미·김완·송채경화 기자, 편집 신소윤 기자, 디자인 장광석</font>
9월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백남기 농민 빈소에 시민들이 추모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9월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백남기 농민 빈소에 시민들이 추모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9월28일 오후 10시30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현관 입구에 고 백남기 농민의 식구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아내 박순례씨와 자녀 백도라지씨, 백민주화씨, 백두산씨였다. 2시간 전 법원이 백씨 주검의 부검영장을 발부한 것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다.

사흘 전 백씨 영면 이후 식구들이 함께 기자회견에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내 박씨와 아들 백두산씨는 장례식장 안에서도 외부인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백씨가 영면한 다음날인 9월26일, 식구들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엔 큰딸 백도라지씨만 섰다. 식구들은 영장 발부 이전까지 모든 언론의 개별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절해왔다. 부검에 반대하는 가족의 뜻은 그만큼 무겁고 분명해 보였다.

식구들 곁에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및 살인정권 규탄 투쟁본부’(이하 투쟁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과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 그리고 영장 발부 소식이 전해진 직후 빈소를 방문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등이 함께 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남아 있는 가족이 믿는 진실</font></font>
고 백남기 농민의 둘째딸 백민주화씨 가족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수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류우종 기자

고 백남기 농민의 둘째딸 백민주화씨 가족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수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류우종 기자

기자회견을 준비하던 이들에게 손팻말이 전달됐다. 앞뒷면의 문구를 확인한 이들은 ‘특검으로 책임자 처벌’ 쪽을 선택해 들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아내 박씨가 ‘살인정권 규탄한다’는 쪽을 들었다.

“기자회견 시작하겠다”는 사회자의 알림에 박씨는 왼쪽에 선 딸 백민주화씨에게 손팻말을 바꿔 들라고 손짓했다. 아내와 딸은 기자회견 내내 ‘살인정권 규탄한다’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정권이 백남기를 죽였다’는 언어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다.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남은 식구들이 믿는 진실이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들의 손이 아버지에게 다시 닿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가족은 부검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영면 직후부터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했던 말을 백도라지씨가 반복했다. 많은 눈물을 쏟아낸 것이 분명한 백도라지씨의 얼굴은 누군가 쥐어짠 것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백민주화씨의 큰 눈은 빨갛게 물들었다. ‘살인정권 규탄한다’는 손팻말을 들고 있던 모녀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하루 전인 27일부터 백씨의 빈소가 마련된 3층 1호실을 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지층~2층의 13개 빈소는 ‘출입금지’ 안내서를 붙인 가림막에 의해 폐쇄됐다. 매점과 상담실, 사무실 등이 있는 1층 로비와 현관, 장례식장 후문에서 지층의 시신 안치실과 입관실로 이어지는 진입로에는 각 단체 관계자들이나 시민들이 자리잡았다. 밤이 되면 이들은 복도나 건물 밖에서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빈소 주변에선 경찰이 강제로 주검을 ‘탈취’해 갈 것이라는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부검영장을 재청구한 검찰에 법원이 추가 자료 제출을 요청하며 애초 정해준 시한이 27일이었다. 일부 언론은 27일 밤 법원이 추가 자료 제출 심리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아내와 딸은 기자회견 내내 ‘살인정권 규탄한다’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정권이 백남기를 죽였다’는 건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다. </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광주, 경기도 등에서 민중연합당 당원 400여 명, 전농 소속 농민 100여 명, 그 밖에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이 고비다’라는 소식을 접한 대학생·청년·시민 등 700여 명이 모여 밤을 함께 지새웠다. 투쟁본부는 이들을 위해 지하에 가장 작은 빈소 4곳을 빌리기도 했다.

이미 백씨의 ‘조문객’들은 ‘운동권’이라는 말로 간단히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했다. 25일 영면한 날에만 2천여 명, 이후 4천여 명의 시민들이 빈소를 다녀갔다.

백씨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지난해 민중총궐기에는 중·고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에 반대하는 중·고교생도 많았다. 교복을 입은 어린 조문객들은 빈소를 찾아 너나 할 것 없이 백씨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학생들은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던 일을 백씨가 대신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에서) 저희도 많이 맞았고, 우산을 썼어요. 물대포가 멀리 있어도 뿌리는 것만으로 캡사이신이 너무 세서, 저는 기관지가 약한데 계속 기침을 했어요. 진짜 맞은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상상이 안 돼요. 거기 있는 사람들 마스크를 3개씩 썼어요. 저희도 숨을 쉬기 힘들었어요.”(ㄴ학생)

영면 다음날인 26일 저녁 친구 2명과 함께 빈소를 찾은 고교 2학년 ㄱ학생은 “어떻게 오게 됐느냐”는 물음에 “지난해 그날 저도 거기 있었는데, 근데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남 일 같지도 않고…”라며 말을 흐렸다.

영면 다음날인 26일 저녁 빈소를 찾은 고교 3학년 두 학생은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317일 동안이나 여기 계셨는데 정부에서 아무 관심도 없다가 위독하다고 하니까 경찰의 큰 버스가 30대 넘게 혜화동로터리에서부터 이화사거리까지 늘어섰잖아요. 그게 돌아가시기 전이에요. 제가 다 봤어요. 그거 작정하고 왔다는 소리잖아요. 너무 화가 났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ㄴ학생) “물대포 자체는 정부 탓이지만 결국 국가는 우리 다 같이 만들어가는 건데,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너무 답답하고 죄송해요.”(ㄷ학생)

흙수저당 당원이라는 휴학생 ㄱ씨는 27일 새벽 3시께 1층 현관 바깥에서 얇은 깔개를 깔고 누워 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전날 밤에도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웠다는 그는 “알바하는데 정신이 안 차려져서 에스프레소 남은 거를 계속 마셨더니 잠이 안 온다”며 웃었다. 그는 서울 용산의 카페에서 시급 6500원을 받고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알바를 한 뒤 서울대병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과격한 운동권이 벌이는 일’이라는 시각이 있다는 기자의 말에 “백남기 농성장에 목요 촛불집회 하는 데 처음으로 갔다. 그때 백민주화씨나 가족분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연대해줘서 버틸 수 있었다.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거 듣고 어떻게 되든 간에 해야겠구나 생각했다”고 답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민을 대표해 물대포를 맞고 돌아가신 것” </font></font>
백남기 농민 빈소를 찾은 수녀가 국화를 들고 조문을 기다리고 있다. 김진수 기자

백남기 농민 빈소를 찾은 수녀가 국화를 들고 조문을 기다리고 있다. 김진수 기자

백남기 대책위(‘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외쳐온 ‘내가 백남기다’라는 구호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26일 밤 연인 사이인 ㄹ(29)씨와 ㅁ(28)씨는 백씨와 일면식도 없지만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조의금도 냈다. ㄹ씨는 “소액이지만 국민을 대표해서 고생하신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조의금을 냈다”고 했다. “저희 나이대가 20대 후반, 30대 초반 정도 되는데, 이 정도 나이면 다 느낄 것 같아요. 지금 사회적으로 상황이 너무나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니까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이런 데 참여한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여자친구인 ㅁ씨는 인터뷰 내내 눈물을 흘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영면한 다음날인 26일 낮 빈소를 방문한 서울 성동구·중구 엄마들의 인터넷 카페 회원 4명도 젊은 연인과 똑같은 말을 했다. ㅂ씨는 “시민들을 대표해서 어떤 누군가가 물대포를 맞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백씨 사건을 규정했다.

“그분은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일이죠. 집에서만 애통해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잖아요. 우리가 가면, 애 키우느라 정신없는 엄마들이 나도 가봐야 하겠구나 생각할 것 같아서 왔어요. 결국 평범한 엄마들 마음을 움직여야 대한민국이 변하잖아요.”

서울 강남 출신에 보수신문만 봤다던 이들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달라졌다고 했다. ㅅ씨는 “이전에 집회는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관심 있게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공권력에 희생당하는 일을 무심히 넘기면 또 우리 일이 되겠구나 싶어서 무심히 봐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ㅇ씨는 27일 밤 비닐장갑을 낀 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오르내리며 학생들을 찾고 있었다. “떡이랑 좀 준비해왔는데, 혹시 학생들 어디 있는지 아세요?” 1층 로비에서 은박 스티로폼을 깔고 앉은 학생들에게 떡과 음료가 전해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농민들</font></font>

농민들은 백씨의 죽음을 자신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면 다음날인 26일 문재인, 안철수, 박지원, 이재명 성남시장 등 명망 있는 이들이 조문하느라 분주한 사이로 조문을 마친 촌로 두 분이 쭈뼛쭈뼛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대전·충남 지역 가톨릭농민회에서 왔다는 팔순의 최병욱(79) 농민과 백씨와 같은 해에 태어난 한상열(69) 농민이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내가 당한 거나 똑같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농업이 다 죽은 거지, 어떻게 보면. 농민을 개 취급하듯 죽여놨으니까.”
_농민 한상열씨 </font></i>
</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백씨를 기억하는 팔순 촌로가 아이처럼 울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지역에서 착실한 일꾼이고 농사꾼이고, 그 지역에서 모범이 되는 회장이었어. 지난해 11월14일도 도저히 안 되겠다고…. 지금 쌀값이 이 모양인 게 농민들이 살 수가 없어요.” 도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장례식장 현관에 서서 덩달아 한씨도 울었다. “내가 당한 거나 똑같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농업이 다 죽은 거지, 어떻게 보면. 농민을 개 취급하듯 죽여놨으니까.”

법원이 요청한 추가 서류 제출 시한이던 9월27일 밤 10시께,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전농 농민들은 “백남기 이름 걸고 박근혜 정권 박살 내자”고 소리를 높였다.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충남 등 전국 각지에서 ‘오늘 밤이 고비’라는 말을 듣고 올라온 농민 100여 명은 지하 시신 안치실 바로 앞 너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들은 “1년 내내 씨 뿌리고 뼈 빠지게 거두어서 보리농사 망하고 고추농사 조지고 남은 것은 빚더미뿐”으로 시작하는 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자리에 함께한 이종섭 전농 충남지부 사무처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쌀값이 80kg 한 포대에 17만원에서 10만원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기사에는 26%, 30%라고 나오는데 농민들 체감은 반토막이 났다는 거다. 박정희 향수가 있어서 박근혜를 지지했던 연세 드신 어르신들도 막상 박근혜 정부의 농업정책 겪으면서 다 돌아섰다”고도 했다.

백씨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농민들은 전남 함평 고구마 사건, 경북 안동 감자 사건 등 박정희 정권 시절 잘못된 농업정책에 저항했던 농민운동의 역사적 사건들을 자주 언급했다. 이들에게 백씨의 죽음은 그런 사건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종교인들 앞장서서 ‘살인정권’ 규탄 </font></font>
9월26일 저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백남기 농민 빈소 앞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김진수 기자

9월26일 저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백남기 농민 빈소 앞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김진수 기자

백남기 대책위는 백씨 영면을 계기로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살인정권 규탄 투쟁본부’(백남기 투쟁본부)로 전환했다. ‘살인정권’ ‘투쟁’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26일 첫 기자회견에서는 ‘박근혜 정권 퇴진하라’는 요구도 등장했다.

거대한 빈소에서 가장 과격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권위에 가장 순종적인 종교인이었다. 이들이 앞장서서 박근혜 정권을 ‘살인정권’이라 불렀다. 부검영장이 발부되던 9월28일 오후 3시, 전국 160여 개 수도회 1만2천여 명의 천주교 수녀·수사들의 입장을 밝힌 기자회견에는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및 살인정권 규탄 천주교 선언’이 발표됐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 이호노리나 수녀는 “살인 행위는 인류 역사에 있어왔다. 살인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신앙인이고 그리스도인의 소명인데, 살인 행위를 한 대상에 대해서 ‘당신은 살인을 했습니다’ 고발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라고 말했다.

그보다 앞선 26일 오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개신교 목사들은 “법적으로 판결 나기 전에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게 인간의 마음인가.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정권이 유지되고 국민이 개돼지만큼도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 “법질서를 불의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지 말라” “불의를 돌이키지 않으면 정의가 그대를 심판할 것”이라는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백씨는 9월25일 오후 2시께 영면했다. 자신의 칠순 생일 다음날이었다. 민중총궐기의 물대포가 없었다면 바티칸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바티칸을 비롯한 해외 가톨릭 성지를 가보고 싶다 했던 백씨를 위해, 칠순이 되는 올해 생일 네덜란드에 사는 백민주화씨가 지난해 ‘성지 순례’를 계획했다고 한다.

부검영장이 발부된 날 저녁, 백씨와 가깝게 지낸 최강은씨는 기자를 만나 고인에 대한 기억을 털어놨다. 그는 백씨가 1974~75년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하다 수배돼 명동성당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임마누엘’이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14일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씨의 신원을 확인해준 것은 20년 동안 허리에 맸던 ‘가톨릭농민회’ 버클이 달린 벨트라고 했다.

“형님이 없는 게 많아요. 양복 없지, 지갑 없지. 지갑이 없어서 형수님이 시내 나가면 1만원, 광주 가면 3만원, 서울 가면 5만원 그렇게 주셨어요. 지갑이 없으니까 신분증도 없고 누군지 모르지. 그때 허리춤에 가톨릭농민회 버클이 있었다는 거야. 20년, 25년 전에 받은 그 가톨릭농민회 벨트를 하고 있었던 거야.”

<font size="4"><font color="#008ABD">없는 게 많았던 ‘농민들의 형님’</font></font>

백씨는 장휘국 광주시교육감과 박주선 국회 부의장과 같은 광주고 동문이다. 그의 성품과 그릇을 아는 후배나 지인들이 “군수라도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 “동생들이 하소”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우리밀 농사를 처음 지을 때는 “돈이 되는 것이면 대기업이 놔뒀겠느냐. 그냥 우리 몫이라 생각하고 합시다”라고 했단다.

상주 역할을 하느라 진이 빠진 가운데서도 백씨에 대해 얘기하는 최씨의 얼굴엔 미소가 돌았다. “마을에서도 허드렛일만 해요. 회장이니까 발언이나 인사를 시키면 그런 거 시키지 말라고 하셨어요. 회장도 돌아가면서 하니까 순번이 돼서 한 것이고.” 백씨와 그 가족 등을 1년 가까이 전담취재했던 박수진 기자가 백씨가 영면하던 날 출산을 했다고 말하자 최씨가 말했다. “우리 형님이 새 생명을 주고 갔구먼.”

백씨의 마지막을 지켜본 최강은씨는 종종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는 백씨의 가족들에게 ‘삼촌’으로 불렸다. 최씨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만난 백씨의 농민운동 후배로, 백씨가 생전에 동생으로 대했다. 백씨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9월23일, 아내 박씨는 광주의 최씨에게 전화해 “삼촌 올라와야겠다”고 했다. 최씨는 식구들과 함께 임종을 지켰다. 부검영장이 발부된 28일 밤, 최씨는 기자에게 “이런 패륜이 어디 있냐”고 말했다. 백씨의 죽음은 ‘살인’이고 부검은 ‘패륜’이라는 등식은 남편과 아버지, 형제를 잃은 식구들이 믿는 진실이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