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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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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부

법 제도의 허점 사이에서 20년간 국민의 일상 파괴한 독극물… 가장 확실한 재발 대책은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
등록 2016-09-07 20:38 수정 2020-05-03 04:28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가습기살균제 국회 청문회 인터넷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다. 그는 이번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야당 추천 전문가로 활동했다. 정용일 기자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가습기살균제 국회 청문회 인터넷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다. 그는 이번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야당 추천 전문가로 활동했다. 정용일 기자

‘가습기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마련을 위한 국정조사’라니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줄곧 다뤄왔으나 국회도 언론도 여론도 무척 제한적인 관심 또는 ‘국민적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어리둥절하다. 아마 내가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즉 국정조사를 내 손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았나

지난 8월29~30일 이틀에 걸친 청문회는 예상외로 썰렁하게 막을 내렸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불과 5개월 전인 4월18일 롯데마트가 가해 기업 중 첫 번째로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 보상 대책을 발표하면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뒤늦게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됐다. 열기는 뜨거웠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낙선한 뒤 한 달여 남은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는데, 롯데마트 사과 직후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바람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기쁘지만 또한 허탈한 일이다.

생활화학 제품 사고로 수백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피해 규모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일부 영세업체가 제조·판매한 것도 아니고 옥시레킷벤키저를 비롯해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들이 자체브랜드(PB) 상품을 개발해 판매했다. 이른바 재벌 대기업들이 줄줄이 연루된 사건이다.

또한 22주도 아니고 22개월도 아니고 장장 22년간 이러한 독극물이 무려 1천만 개나 버젓이 팔려나갔다. ‘어린이에게도 안전하다. 인체 무해한 성분으로 만들었다’ 등의 광고 문구가 소비자, 특히 환자나 어린이 같은 민감 계층을 돌보는 보호자들의 마음을 현혹했다. 대형마트며 슈퍼마켓마다 치약이나 비누 옆에 누구든지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제품이 진열됐다.

그런데도 2011년 우리는 분노하지 않았다. 2012년 국회에 들어와 이 사건을 다루면서도 4년 내내 국민적 무관심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정부도 여당도 기업들도 사과는커녕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피해자들에 대한 긴급구제를 담은 특별법도 정부·여당의 강력한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완강하게 버틸 수 있었던 배경, 든든한 지지 기반은 역시 무관심한 국민이었다.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다.

어쨌든 지난 4월 롯데마트의 공식 사과 뒤 여론도 정치권도 갑자기 뜨거워졌다. 5월 초 옥시가 뒤이어 공식 사과를 했고, 20대 국회에 가습기살균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된 것도 모두 국민적 관심과 요구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청문회는 하는지 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기시감 때문에 청문회가 열리는 이번주 내내 불안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 청문회를 한들 우리가 관심을 철회하는 순간 모든 노력은 거의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가 인과관계를 규명하지 못해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르지도 않은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계열 제품, 즉 애경 ‘가습기메이트’와 원료 공급자인 SK케미칼이 청문회에 나온 것은 그 자체로 큰 성과이나 증인들의 잇단 불출석, 불성실한 답변 태도는 청문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청문회 외면한 언론

그래서 무관심한 국민들은 화학물질로부터 생명과 건강을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가? 가습기살균제 청문회가 ‘히트’하지 않은 게 국민 탓이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하고 싶다. 무관심은 사실 누군가에 의해 조장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역할과 책임을 지적하고 싶다.

국정조사 특위는 지상파 방송 3사에 청문회 중계를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불발했다. 세월호 청문회와 닮은꼴이다. 공영방송은 청문회 중계를 통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을 국민에게 생생히 전해야만 했다.

청문회가 열리는 같은 시간대에 드라마 재방송을 편성한 KBS는 가해 기업과 김앤장 등 공모자들의 책임을 탕감해주는 데 적극적인 공모자가 되고 말았다. 내심 기대했던 마저 신문 지면에 청문회 관련 기사를 크게 다루지 않아 실망이 컸다. 8월31일치 신문에는 사진기사 하나가 전부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영화 속 대사는 스파이더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언론인들이 반드시 반추해야 할 말이 아닌가.

나는 이번 국정조사에서 야당 추천 전문가로 국정조사 특위 활동에 동참했다. 19대 국회에서 4년 동안 환경노동위원회에 몸담았고 문제가 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PGH), CMIT/MIT 등의 독성물질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 화학물질 주무부처인 환경부와 씨름해왔다. 그 때문에 여러 상임위가 공조하는 현재 특위 활동에서 새로 얻는 게 많다.

특위 구성 전에는 다들 나에게 ‘4년 동안 이 문제를 다룬 장하나 전 의원이 모르는 게 없지 않냐?’ ‘새롭게 밝혀질 게 있겠느냐?’ 이렇게 물어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내가 4년 동안 다뤘던 쟁점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장님(시각장애인)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속담처럼 애초에 국회의원 한 명이 몰입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부는 최근까지도 정부의 책임을 부인하고 가해 기업과 피해자 개인 간의 문제로 이 사건을 축소 해석한다. 책임은 가해 기업에 모조리 떠넘기면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법 제도의 허점이 사건 발생의 원인이 됐다면 이미 기업만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독극물이 공산품으로 둔갑해서 20년간 유통됐는데 정부는 단지 위법한 사실이 없으니 정부 책임이 아니다, 정부는 사과할 수 없다고 한다면 ‘네, 그렇군요’라고 할 국민이 어디 있겠나.

안전 관리 대상 밖의 살균제
2011년 3월, 12개월 된 아이의 엄마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홈페이지에 가습기살균제 ‘세퓨’라는 제품에 포함된 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PGH) 성분에 대해 묻는 민원글을 올렸다. 산업부는 “소관 기관이 아니다”라며 민원을 식품의약품안전처로 넘겼다.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1년 3월, 12개월 된 아이의 엄마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홈페이지에 가습기살균제 ‘세퓨’라는 제품에 포함된 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PGH) 성분에 대해 묻는 민원글을 올렸다. 산업부는 “소관 기관이 아니다”라며 민원을 식품의약품안전처로 넘겼다.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은 국정조사 기간 동안 특위가 집중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사과와 사건 발생에 대한 책임 인정이다. 가장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이 바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다. 특히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의 과실이 크다. 나는 19대 국회에서 환경부의 화학물질 관리 실패를 집중적으로 질타했다. 2015년부터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이하 화관법)이 시행되면서 화학물질 관리 제도가 진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산업부에 있었다.

만약 환경부가 문제가 된 물질들을 독성물질로 지정하고 관리했다 해도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막을 수 없었을 거라는 절망적인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단 산업부가 관리하는 생활화학 제품은 8개 품목으로 한정돼 있었고, 그 안에 살균제는 없었다.

애경 가습기메이트나 옥시 가습기당번 제품 모두 출시하기 전에 해당 기업이 산업부에 안전관리 대상인지를 질의한다. 그러나 산업부는 관리 대상이 아니라는 틀에 박힌 답변을 내놓는다. 즉 가습기살균제라는 제품을 제조·판매하면서, 특히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면서 어떤 성분을 사용하는지 정말 안전한 제품이 맞는지 검증하는 기관과 그런 제도는 2015년 6월까지 전무했다.

심지어 산업부는 가습기살균제 관련 민원에 대해 ‘해당 제품에 인증마크를 받고 싶으면 안전관리 대상인 세정제 품목으로 신고하고, 인증마크가 필요 없으면 그냥 살균제 품목으로 신고하라’고 답변한다. 즉 화학제품의 안전관리 대상 포함 여부는 제품의 성분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고 소관 부처가 판단해주는 것도 아니라, 제조·판매하는 사업자가 선택할 수 있었던 셈이다. 상식적으로 안전을 관리하는 제도가 아니라 인증마크를 남발함으로써 안전을 위협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산업부가 잇단 가습기살균제 관련 민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살균제 제품을 안전관리 대상에 포함시켰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생화학제품이 국가통합인증마크인 KC를 받기 위한 인증 절차를 보면 점입가경이다.

예컨대 세정제 품목은 염산, 황산, 수산화나트륨, 수산화칼륨, 테트라클로로에틸렌, 트리클로로에틸렌 등 6개 물질이 없거나 기준치 이하라는 것, 제품 용기가 충분히 단단한지를 확인하면 인증마크가 부여된다. 방향제는 메틸알코올, 폼알데하이드 함량만 기준 이하인지를 확인한다. 즉 가습기살균제 역시 어떤 성분이 들었는지와 상관없이 KC마크를 받았을 거란 말이다. 실제 세정제 품목으로 신고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KC마크를 받은 사례도 있다.

산업부도 환경부도 현행법이나 제도를 위반한 사실이 없다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법 제도는 다른 나라들에 현저히 뒤처진 것인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인지 밝혀야 하지 않나? 국정조사 특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만약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된 성분으로 가습기살균제 용도의 제품을 제조·판매하고자 할 때 과연 출시될 수 있는가’를 외교부를 통해 질의했다. 물론 답변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국민이 궁금해할 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미국처럼 화학제품을 출시할 때 성분을 제출하지 않는 나라의 경우에는 징벌적 손해배상과 강력한 리콜 제도를 두어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조심할 수 있는 장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안전장치가 전혀 없었다. 청문회가 기업의 고의 과실뿐 만 아니라 정부의 책임을 입증하는 데 집중해야만 이미 출시된 다른 많은 화학제품들의 문제까지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

최근 에어컨 항균필터나 중금속 정수기가 차례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매번 가습기살균제 문제처럼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왜 이런 사고가 반복되는지 원인은 의외로 단순하다.

“소관 사항 아니다” 주장만 앵무새처럼

국정조사 특위 활동에 동참하면서 산업부의 엉터리 공산품 안전관리 제도도 충격적이었고, 19대 의원 시절에 대표발의한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건 나쁜 선례를 남긴다’고 강변하는 모습도 충격적이었지만, 가장 압권은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가습기살균제 관련 민원들을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건복지부, 국민권익위원회, 공정위원회, 환경부 등 전체 관계 부처가 가습기살균제는 산업부 소관이라고 하는데도 산업부는 인정하지 않고 가습기살균제라는 품목의 관리를 포기했다.

심지어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진실이 규명된 2011년 8월 이후에도 산업부는 후속 조치나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소관 사항이 아니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민원에 대응하는 각 부처의 행태를 보면 사건의 주범이 산업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라는 점이 명확해진다(상단 사진 참조). 부디 청문회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진 지금 지면을 통해서만이라도 산업부의 만행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장하나 전 국회의원·환경운동연합 생활환경TF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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