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체제 붕괴를 공식 언급했다. 이와 함께 지난 2년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던 ‘통일대박론’도 2년 만에 용도 폐기됐다. 경제민주화든 통일대박이든 그 자체의 효과보다는 선거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사보다는 젯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통일대박론, 빈 수레의 요란함우선 통일대박론에서 북한의 체제 붕괴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통일대박론은 통일 비용보다 통일의 편익을 강조했다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뚜렷했다.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통일대박론은 이런 과정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과정과 준비가 없는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빈 수레와 같다. 빈 수레가 내는 요란한 소리였지만 주위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외교와 남북관계가 박 대통령이 가장 잘한 일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는 청와대를 고무시켰다. 급기야 박 대통령은 2015년 10월 세계지식포럼에서 통일대박을 ‘동북아 대박’을 넘어 ‘세계대박’이란 논리로까지 비약시켰다.
통일에 대한 박 대통령의 정치적 활용은 박정희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시로 박정희 시대를 회고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 70주년 기념 8·15 경축사에서 “1972년 남북한은 분단 역사상 최초로 대화를 통해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했다.
광복 70주년은 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인데, 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을 맞은 외교 무대에서 한국은 소외를 자초하는 무능을 보였다. 그래서 한국의 광복 70년은 초라하기만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회고만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시절에 대한 박 대통령의 향수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도 7·4 남북공동성명을 유독 강조했다. 2014년 드레스덴 선언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지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구상은 ‘포용정책의 부정’과 ‘박정희 시대로 회귀’를 특징으로 한다.
포용정책을 부정하기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이룬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도 이행하지 않았다. 사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는 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통일대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담겨져 있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주창했지만 구체적인 이행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6·15 공동선언 4항은 남북의 신뢰를 다지기 위해 경제·문화 등 다방면에서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10·4 선언에서는 이를 위해 세부적으로 40여 개 사안에 대해 합의했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부정하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나 신뢰 프로세스는 말뿐일 수밖에 없는 원천적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의 밑천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뿐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박정희 시절의 긍정적 요소마저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 유산도 제대로 계승 못해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에 발표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긴장상태의 완화를 거쳐 평화통일을 달성’하고, 이를 위해 남북한이 개발·건설·창조의 경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통일 이전에 긴장 완화, 전쟁 방지, 평화 정착 등 중간 단계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지만 당시 청와대는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한에 전쟁을 하지 말고 어느 체제가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가를 경쟁하자고 던져주는 것이 전쟁 억제를 위해 몇십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고등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8·15 평화통일 구상 선언 이후 대북 협상은 남북한 모두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이에 따라 1971년 남북한의 안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안으로,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했다. 북한이 이를 수락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회담이 시작됐다. 남북 적십자회담을 거쳐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선(先) 인도주의 회담-후(後) 남북 당국자 회담’이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대화의 패턴은 이미 박정희 시절에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채 아버지 시절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에만 집착했다. 정작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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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구상은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관계가 더 호전되지 못한 채 남한에선 유신체제, 북한에선 주석제로 이어지며 양쪽의 권위주의 체제가 강화되는 쪽으로 남북관계가 활용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에는 고등 전략은 없고, 남북관계를 유신체제 강화에 이용한 ‘남북관계의 국내 정치화’만 빼닮는 오류를 범했다.
내용이 없는 통일대박론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할 즈음에 박근혜 정부에서는 북한의 도발을 기대(?)하고 의존하는 듯한 발언이 잇달아 나왔다. 2015년 6월 한민구 국방장관은 북한이 10월 당 창건 기념일을 전후해 전략적 수준의 도발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5년 8월에는 국방부에 의해서 ‘김정은 참수 작전(제거 작전)’이 공개되기도 했다.
신 냉전 구도, 외교 실패를 감출 카드한민구 장관의 발언 이후 북한의 ‘10월 도발’은 인공위성 발사일 것이란 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북한은 노동당 창건 70주년에 인공위성 발사를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북한이 노동당 70주년에 맞춰 10월에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5년 5월3일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방문해 “주체조선의 위성은 앞으로도 당 중앙이 결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연이어 우주를 향하여 날아오를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를 북한의 10월 도발설로 확대시키자 도리어 북한은 외교 수단으로 삼았다. 노동당 70주년 행사에 류윈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을 초청해 열병식을 하면서 북-중 관계를 강화했다. 우리 쪽에서 기대한 인공위성 발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민구 장관은 실망했을지 모르겠지만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중 관계를 다지는 외교적인 성과를 얻었다. 인공위성 발사는 처음부터 준비하지도 않은 것인데, 한민구 장관이 판을 키우고 판돈은 북한이 챙긴 셈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뒤통수 맞고, 북한에 외교카드를 쥐어주는 것을 자초했다.
이 와중에 북한이 지난 1월6일 갑작스럽게 핵실험을 하고, 2월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다. 북한의 이번 발사는 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위성 발사를 제약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다. 남북관계와 한-일 관계, 한-중 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해온 한국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국면 전환이 가능한 상황을 맞게 됐다. 게다가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이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박 대통령이 중국과 대립을 초래하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시사한 이후 북한붕괴론으로 해석될 발언까지 꺼내든 것은 과거 냉전 구도로 돌아가는 ‘지정학의 회귀’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아시아에서 한·미·일의 남방 삼각관계와 북·중·러의 북방 삼각관계가 다시 대립하는 신 냉전 구도를 ‘지정학의 회귀’(Return of Geopolitics)라고 말한다. 구한말이나 해방 공간과 같은 지정학의 위기가 다시 초래된다는 것이다. ‘지정학의 회귀’는 남북경제협력과 북방대륙 진출을 통한 한국 경제의 신성장동력 창출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박 대통령이 북한 체제 붕괴까지 언급하는 등 한반도에서 새로운 냉전 긴장감을 높여가며 ‘지정학의 회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외교의 실패를 덮기 위해서라고 본다.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진행된 중국의 전승절 행사 참석 이후 한국이 중국에 기울어졌다는 ‘중국경사론’이 미국과 일본에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박 대통령은 중국경사론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의 중재 아래 한-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을 합의하게 된 배경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합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날개를 달아줬지만 정작 박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박 대통령이 ‘최종적 해결’이라는 ‘아베의 덫’에 걸린 것이다. 중국은 일본군 위안부 합의로 한·미·일 삼각협력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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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는 성과가 없고 대일 외교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도발적으로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박 대통령은 고등 전략이 아닌 즉흥적 대응으로 북한의 체제 붕괴 발언까지 뽑아든 것이다.
연초에 대한상공회의소 박용만 회장은 기자들과 만나서 북한 급변이 아니라 북한의 시장화에 대응하는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정학의 위기를 ‘지경학’(Geoeconomics)으로 대응하면서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자는 제안이었다. ‘지정학의 회귀’는 한국 경제의 출로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북한붕괴론의 수명도 짧을 듯2017년 1월에 출범할 미국의 새 정부는 북한의 핵능력 강화를 방치한 전임 정부의 ‘전략적 인내’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재평가할 것이다. 한국 경제의 출로를 막는 지정학의 위기는 저성장 국면에서 지속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북한붕괴론의 수명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우리 경제가 겪을 위기와 피해가 안보와 경제를 융복합적으로 사고하지 못한 대통령을 뽑은 탓으로 돌려버리기에 너무나 부담이 클 정도로 커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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