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계간 봄호에 발표된 김명수 시인의 시 ‘하급반 교과서’다. 2017년부터 중·고교에서 국사를 배우는 학생들도 시 속 풍경으로 내몰리게 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국사 교과서를 국정 체제로 바꾼 해는 1974년이다. 그해 책 한 권이 미국에서 출판됐다. . 독일 출신의 미국 비판사회학자 허버트 마르쿠제가 쓴 책이다. 고도산업사회가 불러온 인간소외 현상을 분석했다. 특히 억압된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을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사회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박근혜 정부는 10월12일 ‘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대놓고 학생들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교육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급반 교과서’의 교실에서 ‘일차원적 인간’으로 훈육하겠다는 선언이다.
1972년 10월17일 선포된 유신체제, 2015년 10월12일 강행한 국사 교과서 국정화. 둘의 공통점은 단연 ‘10월 유신’이다. 오직 한 권의 국사 교과서가 강요되던 군사독재 시절에 벌어진 몇 가지 장면을 톺아본다.
유신보다 교과서가 먼저였다. 1972년 5월 청와대와 문교부는 국사교육강화위원회를 만들었다. “교육의 국적을 찾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마디가 출발이었다. 국사 교과를 사회에서 분리해 신설하고,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게 뼈대였다. 5개월 뒤인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됐고, 이듬해인 1973년 6월 정부는 초·중·고 국사 교과서를 검인정에서 국정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극심한 검열·통제 교과서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그리고 1년도 안 된 1974년 봄부터 새 국정교과서로 수업이 이뤄졌다. 2년5개월 걸린 경부고속도로 건설보다 더 빠른 속도전이었다. 국정교과서가 ‘성전’이자 ‘유일본’이 되면서 기존 검정교과서 22종은 휴짓조각이 돼버렸다.
1982년 전두환 정권에서도 국사 교과서는 수난을 겪었다. 그해 6월 일본 문부성은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교과서 내용 가운데 일제의 중국·조선 침략 사실이 왜곡돼 있다는 등의 사실이 알려졌다. 국내 여론이 들끓었다. 이른바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이다. 곧바로 문교부는 일본 교과서(16종) 분석에 들어갔다. 같은 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16종에서 24개 항목 167곳이 잘못 서술됐다는 보고를 국회에 하기도 했다.
정부는 서둘러 국사 교과서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민족사 재정립, 한-일 관계 서술 재검토 따위의 개정 지침이 국사편찬위에 하달됐다.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이 일어난 지 6개월 만인 그해 12월 국사편찬위 위원들에게 개정 교과서 중간본이 전달됐다. 그리고 그달 말 교과서 개정 작업이 종료됐다. 위원들이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중학교용 2권, 고교용 2권에 대한 검토를 마치도록 한 것이다. 이듬해 3월 새 국사 교과서는 결국 학교 현장에 보급됐다. 일본 교과서 파동이 불거진 뒤 8~9개월 만에 국사 교과서를 뚝딱 고친 것이다. 이런 졸속 개정 탓에 이후 수백 곳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중복해서 서술하는 등의 오류가 발견됐다.
현 정부는 2017년 3월 학교 현장에 새 교과서를 공급하겠다고 공언했다. 제작 기간이 1년4개월에 불과하다. 교육부는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여 고품질의 교과서를 개발하겠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역량과 경험을 고려했을 때 충분한 기간”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2. 유신정권 충성세력이 벌인 ‘검정교과서 파동’유신 시절 국정교과서는 공무원·출판사에도 때아닌 날벼락을 내렸다. 1974년 검인정 교과서를 내던 출판사는 110곳이 넘었다. 국사의 경우 중·고교 각각 11종, 모두 22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발행되고 있었다.
1977년 2월24일 오전 10시 청와대 지휘 아래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와 국세청 직원들이 교과서 제작법인 4곳에 들이닥쳤다. 이들 법인이 “교과서 내용 수정과 가격 인상을 둘러싸고 문교부 담당자들과 결탁, 뇌물을 주었”다는 게 정부 발표였다. 문교부 편수국장 등 13명이 구속되고 16명이 입건됐다. 문교부 공무원 19명은 사표를 내야 했다. 국세청은 관련 업자들에게 세금 탈루액 127억원을 추징하겠다고 나섰다. 세칭 ‘검정교과서 파동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공무원-업자 사이에 벌어진 뇌물수수가 아니었다.
그해 초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카터 대통령은 3단계 주한미군 철수안을 발표했다. 국내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부터 ‘서정쇄신’이라는 이름으로 공무원 숙정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유신체제 강화를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신정권에 충성하는 세력들이 검정교과서 파동 사건을 조작·발표했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이 사건과 관련해 1990년 대법원은 사건 자체가 왜곡됐다는 확인을 하기도 했다. 추징된 세금은 이후 진행된 소송 결과 대부분 환급됐다. 하지만 사건 후폭풍으로 100곳 가까운 출판사들이 교과서 업계에서 사라져버렸다. 일부 출판사 사장은 충격으로 쓰러져 숨지기도 했다.
사건 뒤 정권은 국정교과서를 1종교과서로, 검인정을 2종을 분류하는 새 제도를 내놨다. 그러나 사건 전까지 국정교과서는 중·고교 국어·국사뿐이었지만, 이후 중학교용과 실업계 고교용 다른 과목까지 모두 국정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국정교과서가 더 확대된 것이다.
3. ‘국정교과서 욕망’ 버린 적 없는 정부교과서를 독점하려는 욕망을 정부는 단 한 차례도 포기한 적이 없다. 교과서 발행 방식을 국정 또는 검인정으로 할지는 초·중등교육법 제29조 2항의 위임에 따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명시돼 있다. 이 규정이 처음 생긴 때가 바로 앞서 든 ‘검정교과서 파동 사건’이 벌어진 1977년이다. 사건 뒤 박정희 정권은 기존 ‘교과용 도서 저작·검인정령’을 폐지하고 새 규정을 제정했다. 지금까지 이 규정은 모두 19차례 개정됐지만 주무 장관이 언제든 특정 과목을 국정교과서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한 적이 없다.
“국정도서는 교육부 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교과목의 교과용 도서로 한다”는 현행 조항이 존속하는 한 국사뿐만 아니라 어느 교과목도 장관 고시만으로 국정화가 가능하다. 1992년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비춰볼 때, 이 규정은 교육제도를 반드시 법률로 제정하도록 한 헌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 백지위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위반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교과서 국정화가 정권 의지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질 수 있는 것도 해당 규정이 국회가 통제할 수 있는 법률이 아니라 대통령령에 모두 위임된 탓이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터진 국회법 파동의 출발은 행정부의 시행령이 법률을 위반하는 문제를 국회에서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다. 시행령은 상위 법령인 법률이 위임한 범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제출된 국회법 개정안(제98조의2 3항)을 보면 “상임위원회는 소관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제출한 대통령령·총리령·부령 등 행정입법이 법률의 취지 또는 내용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소관 중앙행정기관의 장에게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수정·변경 요구받은 사항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소관상임위원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만약 국회법 개정안이 재의결돼 시행되었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근거인 해당 규정이 대통령령이기 때문에 국회 차원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6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냈고 법안은 방치 상태다.
4. 놀라워라, 1986년과 2015년의 논조 대변신도 눈길을 끈다. 이 신문은 1986년 8월15일부터 29일까지 2주간에 걸쳐 ‘국사 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는 제목의 특별기획 기사를 무려 11차례 내보냈다. 해당 기사는 국사 국정교과서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뒤 그 원인으로 국정화를 지목했다. 1974년판과 1983년판 모두 숱한 잘못이 있다고 분석했다. ‘국정화 이후 단순화돼… 논쟁 있는 부분은 모두 빠져. 검인정 환원… 민족사 생명력 살려야’ 같은 제목을 이제 와서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국정화를 폐지하고 검인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국정교과서 편찬 총책임자인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발언을 인용한 부분은 더 놀랍다.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것이 문제다. 워낙 교과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심리가 크고 학설이 분분하다보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집필을 꺼리고 있다. 국사편찬위에서 집필자를 구하는 데 큰 애를 먹고 있다. 위원장 안면을 보아서 집필해주는 학자도 있다.”
연재 마지막 기사의 마지막 문장으로 단재 신채호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민족이 살고 죽기는 역사에 달려 있다.” 현재 이 신문은 정부 방침 발표 뒤 곧바로 ‘현대사 검정교과서 이것이 문제다’라는 문패를 달고 날마다 ‘검정교과서가 좌편향됐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1974년 국사 국정교과서가 처음 뿌려진 뒤 계간 은 곧바로 ‘국사 교과서의 문제점’ 특집을 실었다. 총론 성격의 글을 맡은 강만길 고려대 교수는 국사 국정교과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정부 전담으로 유일한 국사 교과서가 서술·사용되는 경우 (…) 이 국정교과서는 당시의 정권이 가지는 역사적 성격 및 그 위치까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이 교과서만에 의한 국사 교육을 통하여 그 정권이 가지는 성격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반면 고대사 부분 비판을 맡은 김정배 교수는 다른 필자들과 사뭇 다른 글을 썼다. “집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의미 있는 설득력과 체계를 갖게 되었음은 매우 다행한 일” “평자 자신의 무지에서 오히려 잘못을 범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김 교수는 지난 3월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됐고, ‘올바른 역사 교과서’의 집필 총책임자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참고 문헌 (한국교과서연구재단·2002), (신주백·2010), (류승열·2001), (한국검정교과서·2010), 계간 1974년 여름호, 1986년 8월15~29일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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