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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비법이 사찰에 날개 달겠네

장비 설치 통한 감청은 국정원의 오랜 숙원, 새누리당 ‘이통사 설치 의무화’한 통비법 개정안 내놔, 시민단체는 지난 4월 ‘사이버사찰금지법’ 입법 청원
등록 2015-07-14 14:41 수정 2020-05-03 09:54

감청 장비 설치를 통한 휴대전화에 대한 실질적 감청은 국가정보원의 오랜 숙원이었다.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이런 요청을 수용해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개정을 시도했고,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은 국정원의 무제한 감청이 이뤄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해왔다.

이병호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 있다”

2003년 8월 ‘국정원 댓글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온 국정원 직원들이 신분 보호의 이유를 들어 가림막 뒤에서 청문회에 응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2003년 8월 ‘국정원 댓글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온 국정원 직원들이 신분 보호의 이유를 들어 가림막 뒤에서 청문회에 응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지금도 검찰·국정원이 법원의 영장을 받으면 휴대전화 등 유·무선 통신의 통신제한조치(감청)가 가능하다. 통신비밀보호법에선 중대 범죄 수사, 국가안보(간첩·테러 행위 등) 범죄 등 감청을 신청할 수 있는 요건을 제한하고 있다. 일반 중대 범죄의 경우 최대 2개월, 국가안보 사안은 최장 4개월까지 감청할 수 있다. 일부 긴박한 상황의 경우 바로 감청할 수 있으나 감청을 시작한 직후 36시간 이내에 법원 허가를 받지 못하면 즉각 중단해야 한다.

국정원은 그간 감청 장비가 없어 법이 제한적으로 보장한 휴대전화 감청이 불가능하다며 장비 설치의 확대를 요구해왔다. 국정원은 옛 안전기획부가 1997년 불법 도청했던 사실이 2005년 7월 이른바 ‘엑스파일 사건’을 통해 드러난 뒤 자체 보유하던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취임한 이병호 신임 국정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현 통비법 때문에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새누리당은 17~18대 국회에 이어 19대 국회에서도 ‘이동통신사에 휴대전화 감청 장비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통비법 개정안을 냈다. 19대에선 2014년 1월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이어 2015년 6월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전화, 인터넷, SNS 등 통신 서비스를 담당하는 전기통신사업자에게 감청 장비 설치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는 통비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검찰·국정원 등이 휴대전화의 통화 내용 등을 감청할 수 있도록 이동통신사가 감청 장비를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통신사가 설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통신사업자 매출액의 100분의 3 이하에 해당하는 금액을 이행강제금으로 1년에 1회에 한하여 부과”하는 조항도 넣었다. 이들 법안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그는 이 개정안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현행법은 휴대전화를 포함한 모든 전기통신에 대해 법원의 영장에 따라 감청을 허용하고 있지만, 휴대전화 감청에 필요한 설비 등의 불비로 수사기관이 영장을 집행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휴대전화 등에 대한 감청 실패는 단순히 수사기관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을 넘어 국가안보 수호 및 국민의 생명보호에 치명적인 위협 요소”라고 설명했다.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2015년 6월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제출한 개정안에는 “통신사업자 매출액의 100분의 3 이하에 해당하는 금액을 이행강제금으로 1년에 1회에 한하여 부과”하는 조항도 있다.

하지만 야당은 이 개정안에 반대한다. “국정원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과 사찰의 우려를 씻을 대책도 없이 휴대전화 감청을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통신사가 국정원의 감청 부속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시민의 안전과 국가안보를 위해 제한된 감청은 불가피하지만 국정원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휴대전화 감청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전해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5월 ‘통신비밀 보호를 위한 입법토론회’에서 “수사기관이 감청 영장을 통해 통신자료를 수집하면서 범죄 혐의와 관련이 없는 제3자와의 사적 대화까지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있다”며 국가기관의 통신비밀 침해 우려를 지적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 33개 단체는 2910명의 청원인이 참여한 일명 ‘사이버사찰금지법’(통비법 개정안)을 지난 4월 입법 청원했다. 현행법이 오히려 수사·정보기관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낸 입법 청원안에는 ‘범죄 수사를 위해 제공된 사이버 정보의 사찰용 이용 금지, 분기별 감청 보고서 국회 체출 및 공표 의무화’ 등을 담고 있다.

국정원의 폭넓은 휴대전화 감청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국정원이 불법적인 도·감청, 사이버 사찰 등을 벌여온 불신이 누적된 탓이기도 하다. 1993년 통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당시 안기부가 1998년 4월까지 법망을 벗어난 불법 도청 전담조직 ‘미림팀’을 운영하며 정·재계 인사들의 활동을 감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은 2005년 ‘엑스파일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도청 작업이 2002년 3월까지 진행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이 인터넷 댓글과 트위터 등을 통해 여론 조작에 나선 것이 추가되면서 국정원에 대한 불신이 가중됐다.

이 프로그램으로 대선 때 불법 감청?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해킹해 실시간으로 도·감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이탈리아 소프트웨어 업체로부터 구입한 정황이 최근 드러나면서 국정원이 해킹 프로그램으로 휴대전화 감청 등에 나섰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국정원의 위장 명칭으로 알려진 ‘대한민국 육군 5163부대’가 2012년 해당 업체에 구입 비용을 지급하고 올해 초까지 유지·보수 비용을 낸 것으로 확인되면서 2012년 대선 때부터 불법 감청을 벌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2012년부터 올해 초까지 국정원에서 재직한 국정원장은 대선 여론 조작 혐의로 구속된 원세훈 전 원장, 남재준 전 원장,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근무 중인 이병기 전 원장이다. 김성수 새정치연합 대변인은 “국정원은 이 프로그램의 구입 여부와 사용처 등을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국회 차원의 진상 규명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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