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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달라는 국가정보원을 믿을 수 없는 이유

임아무개씨 죽음 뒤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이 털어놓은 심경들… “조직이 날 보호해주지 않으리란 생각에 부담이 컸을 것” 서둘러 ‘직원 일동’ 명의 성명 내놓은 것은 국정원을 믿어달라며 “청와대와 야당에 던지는 메시지일 듯”이라는 해석도
등록 2015-07-28 15:36 수정 2020-05-03 04:28
한 죽음이 있다. 딸 둘을 둔, 45살의 국가정보원 소속 임아무개씨다. 지난 7월18일 야산에서 죽음을 택한 그는 사이버 보안 전문가였다. 죽음과 맞서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국정원의 수사 대상이었던 55살의 김형근씨다. 그는 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삶의 시공간이 다른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국정원의 도·감청이다. 국정원은 김씨의 국가보안법 혐의를 뒷받침하려고 2010~2011년 패킷 감청(인터넷 전용회선 감청) 방식으로 그의 생활을 들여다봤다. 김씨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리는 사이 국정원은 감청의 진화를 시도했다. 국정원은 2010년부터 이탈리아의 해킹팀과 접촉해 2012년 1월 컴퓨터, 스마트폰의 모든 것을 엿보는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임씨라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그는 해킹 프로그램을 둘러싼 의혹을 홀로 짊어지겠다는 듯 돌연 죽음을 선택했다.
은 이번호에서 임씨의 죽음과 김씨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국정원의 감청 욕망이 조직의 한 개인(임씨)을, 사회의 한 인간(김씨)을 어떤 곳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 사안을 협업 취재해온 과 탐사저널리즘센터 의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검찰 수사로 넘어간 ‘해킹 도·감청 의혹 사건’에서 풀어야 할 과제를 정리했다.
취재 송호진·이완·김효실·김선식·전진식 기자, 편집 이정연 기자, 디자인 장광석
컴퓨터 그래픽/장광석

컴퓨터 그래픽/장광석

해킹을 통한 국가정보원의 국내 민간인 사찰 여부는 아직 의혹의 지대에 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한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씨의 죽음, ‘국정원 직원 일동’의 집단 성명은 두 가지 사실을 비교적 또렷하게 확인시킨다. 임씨의 자살을 둘러싼 각종 의문은 국정원에 대한 불신의 크기를 방증하며, ‘직원 일동’이란 명의를 도용해 여론에 공개적으로 맞선 수뇌부의 성난 얼굴은 국정원이 ‘정치적 정보기관’임을 확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됐다.

1. 조직이 보호하지 않은 죽음?“내가 뒤집어쓰고 가는 것이 정보맨으로서의 자세가 아니겠느냐라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지만 감찰 쪽 조사를 받으며 뭔가 상당한 심적 압박을 받은 것 같다.”_국정원 한 관계자

임씨가 죽음에 이른 동기는 장막에 가려져 있다. 학창 시절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꿈꿨던 그는 육사에 들어간 첫째딸이 생도 정복을 입고 아빠의 영정을 들게 될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머뭇거렸을지 모르지만, 결국 극단의 파멸을 택했다. 그는 해킹 프로그램의 구입과 운용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다고 국정원이 밝힌 인물이다. 해외 거주 북한 공작원 등을 감시하는 부서로부터 해킹 대상자의 연락처 등을 받아 해킹 작업을 진행한 기술자란 설명이다.

“(불법적인) 선거 개입이나 내국인 사찰은 없었다”는 국정원의 해명대로라면 ‘해킹 목표물’을 선택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그가 죽음의 짐을 짊어질 이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죽기 전에 삭제했다는 해킹 관련 기록에 말할 수 없는 비밀, 즉 국정원의 불법적 일탈이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지난 7월14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바로 이 기록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 인사는 “기록이 복원돼도 삭제를 시도한 행위 때문에 현재 제기된 의혹을 완전히 씻는 건 사실상 어렵게 됐다”고 말한다.

모든 걸 혼자 떠안듯 떠난 그의 죽음에 국정원 내부 감찰의 압박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야당 쪽은 의심한다.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임씨에게 정치적 논란이 벌어진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국회 정보위원회 관계자는 “현재 국정원 감찰실장은 원세훈 전 원장 시절 측근으로 불린 사람”이라고 했다. 해킹 프로그램은 원 전 원장 시절인 2012년 초 구입됐고, 이번 사태의 파장이 2012년 대통령 선거 개입 사건으로 구속된 원 전 원장 등에게 확대되고 있었다. 임씨가 죽은 당일 오전에도 감찰 조사가 예정돼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국정원 출신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감찰을 받은 게 아니다. 감찰실에서 전화로 몇 가지 물어본 정도였다”고 반박한다.

국정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전직 인사는 이 의원의 주장에 “천만의 말씀”이라고 다르게 얘기했다. 그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정원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임씨가 속했던 부서장이 차장을 거쳐 원장에게 보고하거나, 이 보고가 사실인지 또 사실관계가 진짜 무엇인지 감찰실에서 (별도로) 확인한다. 원장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전화 몇 통으로 될 일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지난 4월 4급으로 승진한 임씨의 죽음에 감찰실의 조사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줬는지 가늠하긴 어렵다. 다만 2010년까지 국정원 신입사원과 직원들을 15년간 교육한 김계동 연세대 교수는 “승진과 (감찰을 통한) 징계는 국정원 직원들을 통제하고 조직에 충성하게 만드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했다. 감찰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5급 사무관부터 시작하는 고시 출신들과 달리 높은 경쟁률을 뚫은 국정원 공채 직원은 7급과 9급으로 출발한다. 승진의 갈망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계급 정년제가 있어 일정 기간 다음 각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퇴직해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 감찰 행위는 국정원 직원들을 강하게 옥죄는 수단이 된다. 2012년 대선 개입 성격의 글을 인터넷·트위터에 올린 심리전단 소속 인사도 “감사·감찰 부서에서 우리 부서가 제대로 업무를 하는지 수시로 감찰 활동을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기도 했다.

언론의 감시가 어려운 국정원의 폐쇄성 때문에 감찰과 징계가 부당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우려도 직원들 사이에 존재한다. 2010년 이후 해직된 한 직원의 경우 사석에서 원장과 관련해 욕설을 했다가 조사를 받은 것이 해직의 도화선이 됐다는 게 국정원 내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신분을 감추는 등 사회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차단한 채 지내는 국정원 직원들은 감찰을 받아 조직 내부의 자기 기반이 위태로울 것이란 신호가 감지되면 불안감이 커진다고 한다.

해킹 프로그램 사태로 목숨을 끊은 국가정보원 직원 임아무개씨의 첫째딸이 지난 7월21일 아빠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장례식장을 나서고 있다. 임씨는 유서에서 육사생도인 첫째딸을 자신의 “희망이자 꿈”이라고 적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해킹 프로그램 사태로 목숨을 끊은 국가정보원 직원 임아무개씨의 첫째딸이 지난 7월21일 아빠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장례식장을 나서고 있다. 임씨는 유서에서 육사생도인 첫째딸을 자신의 “희망이자 꿈”이라고 적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추정이지만 고인이 된 임씨의 경우 사회적 논란이 일어 결과적으로 조직에 부담을 준 점, 내가 뒤집어쓰고 가는 것이 정보맨으로서의 자세가 아니겠느냐라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지만 감찰 쪽 조사를 받으며 뭔가 상당한 심적 압박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임씨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의 첫 문장에서 “여보”라고 아내를 부른 뒤 “짊어질 짐들이 너무 무겁다”고 토로했다.

국정원의 한 직원은 다른 각도로 그의 죽음을 바라봤다. “조직이 결국 나를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컸을 수 있다”고 그는 짐작했다. 지금까지 국정원 관련 사건들을 보면 ‘국정원 조직’과 ‘책임 라인’은 논란의 핵심에서 빠져나가고, 국정원 쪽은 개인의 과욕,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은 개인의 일탈이 부른 사건으로 축소·변질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임씨 입장에선 향후 수사가 진행되거나 국회 정보위원회 조사가 이어지면 해킹 프로그램 구입 실무자인 자신이 불려다니며 논란의 중심에 설 것을 우려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씨의 죽음 이후에도 국정원과 여권에선 해킹 프로그램 구입 여부와 비용에 대한 결재권자와 보고라인, 임씨에게 대상자를 넘겨주며 해킹을 요구한 수사부서의 책임 등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된 윗선과 다른 부서로 정치적 논란이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해킹을 지시하거나 의뢰한 부서와 사람들은 빠지고 (해킹 프로그램 운영의) 기술자인 임씨가 다 떠안게 됐다는 내부 불만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임씨가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죽음을 택한 결정적 동기에 대한 규명은 결국 ‘해킹 도·감청 의혹’과 관련된 책임자가 어느 선까지인지, 이 사건이 불거진 뒤 국정원 내부가 조직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확인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국정원에 오래 근무한 다른 인사는 “임씨를 조사한 국정원의 감찰조서를 보면 그가 어떤 배경에서 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 불법 해킹 의혹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안철수 의원은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원인과 배경에 대한 수사 당국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2. ‘일동’이 허락하지 않은 ‘직원 일동 성명서’“지난 6월30일 대통령의 국정원 비밀 방문 이후 해킹 프로그램 사태가 또 터졌다. 이러다 자칫 여당발 국정원 개편론이 나오는 격동이 올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청와대 눈치를 본 성명서란 느낌을 받았다.”_국회 정보위원회 관계자

임씨는 자신의 유서에서 원장, 차장, 국장, 동료들에게 “죄송하다”며 조직을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오히려 국정원에 의해 정치적으로 활용됐다. 그가 경기도 용인의 한 야산에서 생을 정리한 지 하루 뒤인 일요일(7월19일) 저녁 8시33분, 통일부 대변인실에서 통일부 출입 기자들에게 ‘국정원 보도자료’를 전자우편으로 전달했다. 국가정보기관 사상 유례가 없는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서였다.

‘동료 직원을 보내며’란 제목이 붙은 이 성명서에서 직원 일동은 임씨의 죽음을 상당히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성명서의 문장에선 국정원의 격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언론과 정치권의 해킹 의혹 제기에 대해 “개탄스런” “무책임한 발상” “백해무익”과 같은 표현들로 맞대응했다. 국정원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우리는 똘똘 뭉쳐 있으니 함부로 건들지 말라며 여론, 언론, 정치권(야당)에 치받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평했다.

‘직원 일동’에 포함된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많은 직원들이 2012년 대선 개입 사건, 2013년 국정원의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의 경우 우리가 심했다고 생각했지만, 해킹 프로그램까지 활용해 민간인을 사찰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직원들 사이에선 강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해당 성명서를) 회람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작성되고 누구의 선에서 (작성이) 이뤄졌는지 알 순 없다”고 했다.

직원들이 모두 동의하지 않은 이상한 ‘직원 일동 성명서’가 배포된 것이다. 국정원 고위직 출신 인사는 “원장, 1~3차장 등 간부들 사이에서 직원 일동 명의로 내자는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성명서 내용에는 국정원장이 직접 지시한 방향과 지침이 반영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오른쪽)이 29일 오후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차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오른쪽)이 29일 오후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차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국정원은 왜 ‘직원 일동’이란 초유의 성명서를 다급하게 뿌렸을까? 지난 3월 취임한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내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소신을 드러내왔다. 이런 이 원장이 “(해킹 기술로) 국내 민간인을 사찰하지 않았다”는 내부 보고를 받은 뒤 정치 개입 의혹을 차단하려다 ‘직원 일동 성명서’란 무리수를 뒀다는 시선도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관계자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야당과 국민을 상대로 낸 성명서가 아니라 청와대와 여당에 던지는 메시지”라고 보았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이뤄진 건 2012년이지만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건 현 정부에서다. 국정원의 간첩 증거 조작 사건도 현 정부에서 벌어졌다. 국정원이 현 정부에 상당한 부담을 준 것이다. 그런데 지난 6월30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을 비밀 방문했다. 국정원에 일종의 정치적 사면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 방문 이후 해킹 프로그램 사태가 또 터졌다. 이러다 자칫 여당발 국정원 개편론이 나오는 격동이 올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청와대 눈치를 본 성명서란 느낌을 받았다.”

최대한 여권을 안심시키려는 메시지란 뜻이다. 김계동 교수는 “정치적 이슈가 된 사안에 국정원이 ‘직원 일동’이란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반론을 펴는 자체가 정치 행위”라고 지적했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고발로 이번 사태는 수사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이미 여론은 국내 민간인을 상대로 해킹 도·감청까지 했을 수 있다고 국정원을 불신하고 있다. 심지어 죽은 임씨가 탄 차량(마티즈)을 국정원이 조작했을 것이란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의혹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한국 정보기관의 위상. ‘국정원 직원 일동’이 정말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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