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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자로 그녀들은 말한다

SNS로 알려진 ‘데이트 폭력’ 폭로가 보인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양상… 조직의 보호, 공동체 윤리 등 폭로가 던진 몇 가지 생각할 것들
등록 2015-07-01 17:01 수정 2020-05-03 09:54

2000년 혹은 1999년 어느 주말, 집회에서 한 장의 유인물을 받았다. 아니 주웠을 수도 있다. 정확하게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운동사회 성차별에 대한 비판으로 기억한다. ‘컵을 깨자’ 같은 문장이 느낌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21세기에도 심지어 사회운동 안에도 여전히 여성 활동가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운동권 가부장’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100인위)의 출발이 됐던 여성활동가모임이 뿌렸던 유인물로 기억한다. 100인위 활동은 노골적인 성차별 비판에서 은폐된 성폭력 사건 공개로 이어진다.

억압에 대한 저항, 혐오에 대한 반발

‘적’에게 이용될지 모른다는 조직 보호 논리가 성폭력 사건을 가리는 핑계가 되기도 하는지, 공론화가 필요하다. 했다. ‘데이트 폭력’ 폭로에서 보듯, 이제 피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직접 알린다. 연합뉴스

‘적’에게 이용될지 모른다는 조직 보호 논리가 성폭력 사건을 가리는 핑계가 되기도 하는지, 공론화가 필요하다. 했다. ‘데이트 폭력’ 폭로에서 보듯, 이제 피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직접 알린다. 연합뉴스

당시는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폭력에 좀더 주목하는 ‘영페미니즘’이 떠오르던 시기였다. (아마도) 오랫동안 조직 보호 논리로 은폐되고, 쉬쉬하던 성폭력을 공론화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조차 어렵다는 운동사회 여성 활동가들의 절박한 마음이 100인위로 모였다. 가해자 실명 공개, 피해자 중심주의. 당시 100인위 활동의 원칙이면서 한편으로 논란이 됐던 원칙이다. 그것도 성폭력이야? 그 사람은 사회운동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피해자 말을 어떻게 믿어? 당시에 나왔고 지금도 반복되는 끈질기고 지독한 의문들이다. 당초 생각보다 길어지고 복잡해진 상황과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같은 법적 용어는 오랫동안 100인위를 괴롭혔다고 들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폭로가 잇따라 나왔다. 청년 논객, 전직 노동운동가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앞서 ‘나는 페미니스트다’ 운동이 있다. 여성 혐오를 거울상으로 반사하는 메르스 갤러리도 있다. 누구는 메르스 갤러리에서 여성이 폭행당하는 만화 컷들을 모아서 고발한 것이 데이트 폭력 폭로에 영향을 끼쳤다고 짐작한다. 하여튼 ‘김치녀’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만연한 여성 혐오에 대한 반발이 있다. 100인위가 ‘억압(적 가부장 문화)에 대한 거부’로 보인다면, 데이트 폭력 폭로는 ‘(여성) 혐오에 대한 반발’과 맥락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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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조직에 보호를 요청하지 않는다. 최소한 폭로의 초기엔 조직에 해결을 호소하지도 않았다(나중에 달라질 수도 있다). 단독자로 그녀들은 썼지만, 전파력이 강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공론화 기능을 했다. 그녀들 중 일부는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실명은 물론 피해자 자신의 실명도 공개했다. 잇따른 폭로글에서 ‘앞서 문제를 제기한 그녀의 용기에 용기를 얻어’와 비슷한 말들이 나온다. 폭로글 일부에 나오듯, 그녀들은 폭로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라는, 한국 사회에서 종종 오명이 될 레테르로 남을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알렸다.

법이 구제하지 못하는 피해
그녀들 곁에 누가 있는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무엇이 데이트 폭력이고,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지, 공론화가 필요하다.

피해는 있으되 가해를 처벌할 법정이 없는 경우가 많다. 현실의 법정은 ‘그 따위’ ‘그 정도’ 피해를 구제할 마음도 능력도 없다. ‘그래서 맞았어, 안 맞았어?’ 경찰이나 검찰같이 법을 대리하는 이들을 통해 나오는 질문을 가장한 추궁은 ‘그 따위’로 귀결된다. 그러나 마이너리티라든가, 여성이라든가, 상당수 사회적 약자는 법정으로 소환되지 않는 피해를 (남모르게) 자주 당한다.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 같은 다수가 동의하는 소환의 ‘테이블’ 위에 꺼내놓기 힘든 말들이다. 혼자 삭이고 울분이 쌓일 수밖에 없다.

하여튼 돌아가서, 폭로글을 읽고 나면 그녀들이 당한 피해로 남는 것들이 있다. 일부 명백한 물리적 폭력도 있지만, ‘소리 지르고 욕해서 심한 위협을 느꼈다’ ‘휴대전화를 던졌다/부쉈다’ 같은 것들이다. 현실과 괴리된, 피해에 무심한 실정법은 이런 것을 ‘참작’할지언정 ‘처벌’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법이 외면하는 이런 고통은 어떻게 다뤄지고, 구제되고, 위로받아야 하는가? 법적으로 처벌되지 않으면 면죄부를 얻는 것과 같은 현실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뜨거운 감정, 밀착된 관계’라는 연애의 맥락은 어떻게 고려돼야 하는가?

폭로는 자격을 요한다. 이른바 ‘사생활’ 폭로가 공분을 사려면 ‘천인공노할’ 내용으로 점철돼야 한다. 그러나 데이트 폭력 폭로글이 주장하는 폭력은 아니나 다를까, 일부의 반박을 낳고 반감을 산다. 법치주의에 감염된 사회가 금과옥조로 삼는 ‘사법적 처벌 기준’이 유령처럼 댓글들 사이를 떠돈다. ‘법으로 해결하시죠’ 같은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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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성)폭력 사건들은 대개 가해자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맡은 직위를 그만두라 같은 것들이다. 그녀들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쓴 글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교육을 받으란 것이냐, 보상을 하라는 것이냐’ 되물었다. 그녀들은 ‘더 이상 데이트 폭력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사람의 실상을 알리고 싶다’ 정도의 동기를 밝혔을 뿐이다. 사과도 달갑지 않다는 표현도 있었다. 물론 결과는 있다. 아주 유명인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그 동네에서는 유명한, 요즘 말로 하면 ‘네임드’ 정도의 표현이 붙을 이들(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예전처럼 활동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녀들 곁에 누가 있나

무언가 많이 보기는 했고, 현실을 많이 알게는 됐고, 상당수 사람은 ‘배웠다’ ‘고맙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무엇은 없다. 이전 사건들처럼 대책위가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들 곁에 누가 있는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데이트 폭력 문제를 다뤄온 여성단체에 도움을 구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도 있다.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전하고, 어떤 준비를 할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닥칠지 몰라서다. “폭로가 상대에 대항하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 가슴에 못했던 얘기를 내려놓는 의미가 크다. 이후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 덧내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100인위 활동을 했던 한 활동가의 걱정이다. 무엇이 데이트 폭력이고,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지, 공론화가 필요하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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