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하느라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졌다.
-더 하지 못한 ○○가 주말에도 떠오른다.
-주말에 ○○를 하느라 친구와의 약속을 못 지킨 경우가 종종 있다.
-친구들이 ○○ 이외의 것에 관심을 표현하거나 더 우선시하면 화가 난다.
-○○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진다.
이런 증상들은 ‘○○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뇌에는 쾌감에 반응하는 곳이 있다. 중뇌에서 전뇌에 이르는 신경회로망이 그곳이다. 이를 ‘대뇌 보상회로’라 부른다. 자극이 오면 이 회로를 통해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전달되면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같은 자극이 계속되면 도파민 양이 조절되지 않아 회로에 문제가 생긴다. 뇌과학에선 이를 중독으로 규정한다. 쾌감을 계속 보장받으려는 같은 행동의 반복이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같은 전통적인 물질 중독에서 특정한 행동을 거듭하는 행위 중독에 이르기까지 중독의 개념은 넓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정신장애 표준개념으로 통용되는 미국 정신의학회의 (2013년 5월·5판)을 보면, 중독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 있어 이전의 ‘물질 남용과 의존’에 국한하지 않고, 도박 같은 행위 중독을 포함하는 ‘중독과 관련 장애’라는 더 넓은 범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도 도박·성·인터넷·쇼핑 중독 등 행위 중독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 중독, 운동 중독, 여가 중독에 대한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행위 중독은 대뇌 보상회로에서의 반응이 물질 중독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과 마찬가지로 인터넷·게임 등에 오래 노출되면 사고력과 기억력, 집중력 등에 관한 중요 기능을 맡고 있는 대뇌 전두엽의 부피가 줄어든다는 게 뇌과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이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인터넷·게임을 멀리하도록 하는 교육철학의 근거로 쓰인다. 행위 중독은 증상의 단계에 있어서도 물질 중독과 유사점을 보인다. 보통 ①갈망(또는 집착) ②금단현상 ③내성 ④사회적 장애 순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한 빈칸 ○○에 들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공부다. 저자들이 만난 학생들은 잠을 포기할 만큼 공부를 갈망(①)했고, 주말에도 공부 생각을 하는 금단현상(②)을 보였으며, 주말 약속을 포기하고서라도 공부량을 채워야 안도할 만큼 내성(③)이 생겼고, 결국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장애(④)가 생겼다. ‘공부 중독’에 관한 국내 연구 결과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는 “아이들에게 공부 중독이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인정되지 않는다. 공부 중독이 오히려 장려되는 사회현상엔 분명히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부엔 중독 대신 ‘몰입’이라는 긍정적 어감의 단어가 붙는다. 어린이들의 학습몰입을 연구한 국내 보고서는 제법 있다. ‘초등학생의 자기효능감, 스트레스와 학습몰입 및 학업성취도의 관계’(김종운·김효은,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2012)에서는 초등학교 5·6학년 학생 47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자기효능감이 높으면 학습과제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강한 집중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교육심리학에서 ‘개인이 스스로 상황을 극복할 수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신념’을 뜻하는 자기효능감이 학습몰입이나 학업성취도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본 것이다.
또 이 논문은 “(대인관계나 학교생활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학업 수행 중 어렵고 힘든 과제에 대하여 외적인 힘이나 강제가 아닌 자신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기게 되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피드백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피드백이 학업 수행 중 자체적으로 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교사가 학생에게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는 것도 학습몰입과 학업성취도를 향상시키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엔 자기통제력에 따른 동기부여, 피드백 등을 통해 학습몰입과 학업성취도를 높여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과학영재 학생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정서와 몰입에 대한 질적 탐구’(이남주·백성혜, 교원교육, 2014)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과학영재반 학생 10명과의 심층면담을 통해 “(이들은 학습, 독서, 연주, 대화, 운동 등에서) 모두 몰입을 통해 시간의 자의식이 소멸되는 집중과 자기통제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 활동들을 행복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국 시카고대학 심리학과 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1975년 고안한 몰입(flow) 개념을 통해 고도의 지적 집중력과 정서적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를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긍정적 단어인 ‘몰입’이 어린이들의 인터넷·게임과 만나면 부정적으로 변한다. 게임은 몰입에 이르는 적합한 수단이다. 게임 연구가인 제인 맥고니걸은 저서 에서 게임의 본질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①목표 ②규칙 ③피드백 ④자발적 참여다. 목표는 구체적인 성취 대상이며, 규칙은 성취를 위한 극복 대상이다. 피드백은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는 약속이며, 동기 유발 장치다. 이는 게임에서 점수, 레벨, 진행률 등으로 나타난다. 자발적 참여는 마음대로 참여하고 끝낼 수 있는 자유다.
학습몰입에 좋은, 자기통제력에 따른 동기부여와 피드백 체계가 게임 안엔 구축돼 있다. 이 때문에 칙센트미하이는 “게임은 명백한 몰입의 원천이고 놀이는 매우 탁월한 몰입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게임이나 놀이를 일상의 도피처로 삼는다면 문제가 아닐까? 맥고니걸은 “아직도 일상에서의 몰입을 경험하는 일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동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인터넷·게임에 빠져 있는 현실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은 놀고 싶고, 선택 가능한 놀이 수단을 즐기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희진 대구 서도초등학교 교사는 “아이들의 게임 이용을 중독으로 규정하고 무조건 제한하자는 것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다. 게임은 이미 음악·영화처럼 문화 장르로 정착해 있어서 게임을 차단하는 것 자체가 반교육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게임을 하는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현장학습을 가는 버스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스마트폰 게임)방 만들어’라는 말이다. 아이들은 게임을 어울려 같이 한다. 그 과정에서 사이버 따돌림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잦다. 핫스팟(무선 데이터 공유 기능) 켜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데이터가 많이 남은 아이로 나뉘는 양상도 확연하다.”
인터넷·게임 말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어보자는 제안도 나온다. 김경륜 인하대 아동학과 교수는 “어린이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아서 중독이 생긴다고 본다. 어린이들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어른들은 더 늘려주지 못한다. 이 때문에 어린이들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일을 발견하지 못한 채 잠깐 시간 내서 할 수 있는 스마트폰 같은 것들에 과몰입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허락받는 위치에 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문화가 필요하고, 그래야 아이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어린이들의 사정은 녹록지 않다. 문제집 사겠다는 명분으로 용돈을 받아 오락실에 갔다가 들통난 시절은 호시절이다.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의 시간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인터넷·게임하는 시간만이 아니다. 이희진 교사는 “아이들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분 되지 않는다. 10분만 늦게 와도 부모님이 야단친다. 인터넷 게임이 아니라 축구를 해도 ‘너 또 학교 앞에서 축구 하다가 늦었지?’라고 하면 아이는 5분밖에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일상 대부분의 활동에서 아이들은 시간 결정권이 없다”고 설명했다.
어린이들이 놀 명분은 충분하다. 어린이들은 놀고 싶다. 배경내 활동가는 “어린이들이 인권을 얘기할 때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권리가 쉴 권리, 놀 권리, 의견을 존중받을 수 있는 권리, 이렇게 세 가지다”라고 말했다. 어린이들에게 놀이는 필수적이다. 배경내 활동가는 “어린이에게 노는 것은 창조적인 동시에 자기주도적인 시간이고 새로운 걸 실험하고 모험을 시도하는 시간이다. 그 점에서 놀 권리는 굉장히 중요한 권리다. 창조와 쉼과 공부가 같이 녹아 있는 놀이의 중요성을 사회가 인정한다면 스마트폰 게임 말고도 다양한 놀이문화가 어린이들에게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희진 교사는 “다른 풍부한 자극이 있다면 아이들이 게임 중독 같은 데 빠지진 않을 것이다. 다양한 자극과 경험, 교육을 모색하자는 초등교육의 목표에 맞게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나가면 좋겠다”고 했다.
유엔은 1989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제정했다. 국내에서도 1991년 이 협약을 비준했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있다. 이 협약 제31조에 아동의 놀이와 여가에 대한 권리를 정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2013년 3월 그 내용을 구체화한 일반논평을 내놓았다. 특히 놀이에 대해 “행동, 활동, 과정으로서의 놀이는 어린이 스스로 시도하고 통제하고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경륜 교수는 “스스로 선택한 활동을 아이들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권리가 보장되려면 아이들의 의사 표현의 자유와 같은 참여권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사회 인식은 그에 못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공부나 게임에 ‘중독’된 어린이가 다른 몰입과 즐거움도 체험할 수 있는 여건은 누가 마련할 수 있을까? 당위와 명분은 오래됐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1923년 발표한 아동권리공약 3장에서 이미 지적했다. “어린이에게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만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라.”
김선식 기자 ks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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