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에서 52명의 세월호 유가족이 삭발한 지난 4월2일, 하늘에선 비가 쏟아졌다. “떠난 아이들이 엄마·아빠 머리 깎는 모습 보고 쏟는 눈물”이라고 한 유가족이 비를 맞으며 말했다. 떠난 자식은 비를 내리며 울고, 남은 자식은 부모 등 뒤에서 숨죽여 울었다.
단원고 2학년6반 고 최윤민양의 아버지 최성용(52)씨도 삭발했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철회를 위해 유족들이 택한 삭발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빠가 삭발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울음을 삼켜야 했어요.”
윤민양의 언니 윤아(24)씨는 “아빠의 의지를 아니까 깨끗해진 머리를 봐도 슬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상복을 입은 세월호 유가족들은 4월4일과 5일에 걸쳐 영정을 안고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걸었다. 윤아씨도 도보행진에 참여했다.
“저 혼자 슬퍼한다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알려야 했어요.”
본래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집회에 나가본 적도 없었다. 대학에 다니다 취업을 했다. 평범한 삶이었다. 그의 일상은 2014년 4월16일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참사 1주기가 다 되도록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세월호 이후 제가 독해졌어요. 도보행진만 해도 그래요. 다리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윤민이랑 약속했으니까 끝까지 갈 거예요.”
윤아씨 외에 12명의 형제자매들도 그 길을 함께 걸었다. 세월호 사고로 동생, 오빠, 형, 언니, 누나를 잃은 형제자매들은 영정을 안은 부모들의 행렬을 따랐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져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도보행진 이튿날 오전 형제자매들은 세월호 시행령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73명이 성명에 참여했다.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목소리를 내는 첫걸음이었다. 이들은 그날 이후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성명서를 발표한 뒤 경기도 광명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광화문까지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반나절을 꼬박 걸어 도착한 광화문 세월호 농성 천막에서 그들은 이석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특조위에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자리였다.
“저희는 1년 동안 제대로 삶을 산 적이 없어요. 4월16일에 멈춰 있어요.” 고 박성호군의 둘째누나 박예나(20)씨는 울먹이며 말했다. 대학생인 예나씨는 동생을 잃은 뒤에도 학교에 나갔다. 동생의 죽음으로 힘겨워하는 부모님께 짐을 지워드릴 순 없었다. 학교 다니기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농성하러 나간 어머니 대신 막내동생을 돌봤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괴로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숨이 막혔어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살기 위해 같은 처지의 형제자매들을 만났어요.”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위로하고희생자의 형제자매 중 안산에 거주하는 이는 총 168명이다. 그중 윤아씨나 예나씨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형제자매는 30명 안팎이다. 사고 당시의 아픔을 감당할 수 없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이도 많다. 희생자보다 나이가 어린 초등학생과 중학생 동생들은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이다.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나 고등학생들이 주로 모인다. 정부 차원에서 상담이나 치유를 진행했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다. 생존자나 희생자 형제자매들을 치료해야 할 ‘환자’로만 바라보는 관점도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담은 이들을 더 예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몇몇 형제자매들은 이름이나 얼굴이 공개되길 원하지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당할까 두려워서다.
3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만날 수 있었던 공간은 안산사회복지관네트워크 ‘우리함께’였다. 우리함께는 세월호 참사 직후 ‘이웃’으로서 유족들에게 손을 내민 사회복지단체다. 우리함께에는 상담 프로그램이 없다. 대신 함께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이웃처럼 곁에서 위로한다. 우리함께는 지난해 11월 안산시 고잔동의 한 빌라를 분양받아 형제자매들이 머물 수 있는 사랑방을 만들었다. 형제자매들은 직접 벽지를 고르고 실내를 채울 물건들을 장만했다.
“사랑방에 모인 형제자매들이 부모님들의 삭발을 생중계로 지켜봤어요. 자기들끼리 ‘누구 엄마가 머리를 밀 때는 눈물이 났는데, 우리 아빠가 삭발하는 거 보니 웃음이 나’ 이런 농담을 해요.” 박성현 우리함께 사무국장이 말했다. 우리함께엔 서로를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이 모였다. 같은 아픔을 겪었기에 서로를 잘 이해한다. 그래서 무거운 슬픔도 웃음으로 삼킬 수 있었다.
지난 4월5일 오전 발표한 세월호 시행령 반대 성명서도 이 공간에서 준비됐다. 엄마·아빠의 삭발식이 성명서 준비를 마음먹은 정점이었다. “고왔던 엄마가 삭발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이 상황은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고 남지현양의 언니 남서현(23)씨는 말했다.
성명서에 연명할 형제자매들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다. 연락처가 없는 형제자매들에게 닿기 위해 희생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친구 목록을 살피기도 했다. 그렇게 73명의 연명을 받아냈다. 박성현 사무국장은 “굉장히 힘든 첫걸음을 뗀 것”이라고 했다. “그 걸음을 통해 본인들 것이 아닌 죄책감을 이젠 덜어냈으면 좋겠어요.”
성명서를 준비하는 동안 부모님들의 우려도 있었다. “너희까지 잃을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형제자매들은 “함께 싸우는 것이 우리가 치유되는 길”이라 설득했다. 손사래를 치던 부모들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의지를 다지고 애써 웃어도 유가족의 가슴은 시퍼런 멍투성이다. 예나씨는 유가족들에 대한 편견이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다고 했다. 분노를 표출하면 사람들은 떼를 부린다며 돌아선다. “동생이 병으로 죽었으면 당연히 슬프기만 했을 거예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잖아요.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했던 이 나라의 밑바닥이 드러난 건데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형제자매들은 4월12일 오후 3시 광화문에서 ‘너에게 보내는 편지’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성명서 발표 이후 두 번째 활동이다. 스케치북에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적고 손팻말을 드는 퍼포먼스다. 편지의 수신인인 ‘너’는 떠난 형제자매들과 세월호를 잊어가는 사람들이다. “안전사회와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평행선을 달린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히는 일일 거예요. 제 세대에 안전한 사회가 오지 않더라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윤아씨가 말했다.
예나씨는 동생 성호군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성호야 많이 보고 싶다. 널 위해, 희생된 모든 이를 위해 항상 기억하고 기도하고 행동할게.”
이수현*에서 2014년 하반기 인턴으로 활동했던 이수현씨가 현장 취재 뒤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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