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직도 세월호 안에 갇힌 것 같아요”

‘세월호 생존자’ 화물차 기사들 심한 화상과 고통스러운 회상에 괴로운 나날… 치료·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미친 짓이나 다름없던” 수색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잠수사들 ‘울분의 1년’
등록 2015-04-15 12:42 수정 2020-05-03 04:27
서울 영등포구 한강수병원에 나란히 입원 중인 세월호 생존자 윤길옥(왼쪽)·최재영씨. 화물차 운전기사인 두 사람은 사고 당시 학생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배에서 탈출해 목숨을 건졌지만 두 다리에 화상을 입어 1년 동안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한강수병원에 나란히 입원 중인 세월호 생존자 윤길옥(왼쪽)·최재영씨. 화물차 운전기사인 두 사람은 사고 당시 학생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배에서 탈출해 목숨을 건졌지만 두 다리에 화상을 입어 1년 동안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못할 것 같아요. 다시는 일을 못할 것 같아요.” 4월2일 서울 영등포구 한강수병원. 윤길옥(51)씨의 검은 얼굴이 갱도 같았다. 벌써 입원 두 달째다. 왼쪽 발등은 2도 화상, 오른쪽 발등은 3도 화상을 입었다. 세월호 사고 1년 전 1억4천만원을 주고 산 그의 ‘또 다른 발’ 화물차는 맹골수도 찬 바다 펄에 묻혔다. “지금도 서 있지를 못해요. 일어서면 피가 쏠려요. 피가 쏠리면 바늘로 찌르듯 아프니까.” 윤씨는 지난해 4월16일 아침 세월호 선미에 있는 화물차 운전기사들의 방을 나와 배 앞머리 쪽 매점에 갔다. 갑자기 배가 기울어지면서 전기온수통이 윤씨 쪽으로 쓰러지는 찰나, 동료 최재영(51)씨와 온수통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뜨거운 물이 그의 발등에 와락 쏟아졌다. 적색 신호등처럼 눈이 붉게 충혈됐다. 끓는 물에 덴 발보다 정신이 더 아찔했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을 모조리 밖으로 대피시키고 윤씨는 제일 마지막에 탈출을 시도했다. 이미 배는 허연 배를 드러낸 생선과 다를 바 없었다. 바닷물이 머리 위까지 차올랐다. 그는 “죽었구나” 싶었다. 조류에 떠밀렸나, 정신을 차리니 물 위로 떠올라 있었다. “양손 손톱을 보니 다 닳았더라고요. 배의 철판을 얼마나 긁어댔는지….”

산업잠수사 김상우(44)씨는 그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군에서 해난구조대(SSU)로 복무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여객선 침몰사고, 94년 서울 성수대교 붕괴사고, 96년 강원도 강릉 앞바다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몸에서 다시 바다 비린내가 스쳤다. 며칠 뒤 연락이 왔다. 4월22일 맹골수도 현장에 도착해 실종자 수색에 뛰어들었다. 평균 수심 36m의 바다 속으로 수없이 들어갔다. 두 달 만에 그는 잠수병과 허리디스크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물살이 그나마 덜 거센 정조(하루 4차례) 때를 기다렸다가 선체 수색을 하다보니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한 번 잠수 뒤에는 12시간을 휴식해야 한다는 원칙을 잠수사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지킬 수 없었다. 작업 뒤 3시간 휴식이 전부였다. 잠수병이 심해지면 혈관과 신경이 막혀 뼈에 괴사가 일어난다. 몸이 부서진다. 잠수사 7명이 무혈성 괴사로 신음하고 있다. “진도 팽목항에 있던 다이버들 150명이 한꺼번에 몰려온 적이 있어요. 3분도 안 돼 물 밖으로 나와서는 못하겠다며 다 돌아가기도 했어요. 잠수복조차 안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들을 위한 국무총리 소속 ‘피해자 지원 및 희생자 추모위원회’는 4월3일에야 첫 회의를 열었다.

윤길옥·최재영씨는 세월호 생존자 가운데 가장 부상이 심한 이들이다. 최씨는 구조 뒤 지금까지 환자복을 벗지 못하고 있다. 무릎 위로 2도 화상, 아래로는 3도 화상이다. 화상보다 고통스러운 건 회상이다. 어두운 병실에 누우면 그날이 다시 떠오른다. “잠을 자려고 저녁때 일부러 아픈 다리를 끌고 병원 근처를 많이 걸어다녀요. 몸이 피곤하면 그나마 잠이 올까봐서요. 새벽 1~2시 병실에 들어가면 불도 다 꺼져 있고 조용한데, 누우면 배 안에 갇힌 느낌이 들어요.” 윤씨는 인터뷰 전날에도 한강성심병원에 가서 정신과 치료약을 보름치 받아왔다. 한 번에 10알 넘게 먹지만 신통치 않다. “한 달에 10시간쯤 자는 것 같아요.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어요. 아픈 건 참을 수 있는데 잠을 못 자는 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잠수사 김관홍(43)씨 또한 하루하루가 무섭다. 그는 4월23일부터 수중 선체 수색에 참여했다. 건장한 체격의 김씨는 수색 작업 일주일 만에 쓰러졌다. 바다에서 나온 뒤 ‘감압 체임버’에 들어서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6시간 만에 병원에 이송돼 응급치료를 받은 그는 사흘 만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오늘처럼 인터뷰를 하면 너무 힘이 듭니다. 화가 나면 조절이 안 돼요. 혼자 미친 사람처럼 걷다보면 서울이 참 작더라고요.” 잠을 자려고 하면 수색 작업 때의 기억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다. 술도 마시고 약도 먹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했다. 곁에 앉은 선배 김상우씨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세월호 사고 뒤 실종자 수색 작업에 뛰어들었던 잠수사 김상우(왼쪽)·김관홍씨. 이들은 제 몸이 부서지는 것을 무릅쓰고 바다에 몸을 던졌지만 결국 정부한테서 토사구팽 당했다며 분노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뒤 실종자 수색 작업에 뛰어들었던 잠수사 김상우(왼쪽)·김관홍씨. 이들은 제 몸이 부서지는 것을 무릅쓰고 바다에 몸을 던졌지만 결국 정부한테서 토사구팽 당했다며 분노하고 있다.

반복적이고 집요하게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회상, 반복적이고 괴로운 꿈, 마치 외상성 사건이 재발하고 있는 것 같은 행동이나 느낌 등 이들이 호소하는 고통은 전형적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이다(,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 2014년 5월). 하지만 적절한 심리치료와 상담을 받지 못했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김관홍씨는 “트라우마 치료 같은 건 없었어요. 스스로 해결하라는 식이지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상우·김관홍씨는 7월10일 세월호 침몰 현장을 떠났다. “우리는 개인 자격으로 구조 작업을 해왔어요. 언딘 소속이 아니에요. 그런데 해경한테 쫓겨난 거죠. 그러고 해경은 88팀에 구조 작업을 맡겼어요.” 구조 현장을 떠나자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 대가로 한몫 단단히 잡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숱했다. 해경은 구조 작업이 한 달쯤 지나서야 임금 얘기를 꺼냈다. 이들이 해경을 통해 지급받은 임금은 평상시의 2분의 1에서 3분의 1에 불과했다. 정확한 임금 액수를 말하면 또다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까봐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두 사람처럼 잠수병으로 쓰러져 병원 치료를 받은 경우에는 입원 기간만큼 임금이 깎였다. 기상이 좋지 못해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 날도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런 날에도 그들은 줄곧 바다 위 바지선에서 비바람을 견뎠다. 실제 잠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물속의 잠수사를 보조하는 작업을 한 경우에는 임금의 3분의 1만 지급됐다.

다친 몸을 추스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통증·재활 치료는 지난해 말로 지원이 중단됐다가 2월 초 재개됐지만 이마저도 3월28일자로 끊긴 상태다. 김상우씨는 “날짜를 정해놓고 병이 나으라고 하면 낫겠느냐”고 되물었다. 사고 1년이 지났지만 이들 민간 잠수사에 대한 보상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경은 수난구호법에 근거해 치료·보상을 약속했지만 관할 지방자치단체인 전남도는 규정에 없다는 이유로 지급을 거부했다. 수난구호법 제29조 3항은 수난구호 업무에 종사한 사람이 사망 또는 장애를 입은 경우에만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견디다 못한 민간 잠수사 20여 명은 사고 발생 1년이 코앞인 4월 초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선정 신청을 했다. 그나마 의상자로 지정되면 보상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구조 작업에 자문을 했던 선임 공우영 잠수사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에 특히 분노했다. 지난해 5월6일 추가로 실종자 수색에 투입된 인력 중 한 명이던 이광옥 잠수사가 첫 잠수에서 사고로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해경의 요청으로 수색 작업 자문을 했던 공우영씨가 해경의 책임을 덮어썼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구조 작업의 안전 총괄 책임은 당연히 해경에 있다. 우리는 그들의 지시대로 수색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씨가 천안함 사고 때도 참여했던 경험이 있어서 해경이 그에게 자문했던 것이다. 해경 책임자한테 왜 공씨가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바뀌었느냐고 물었더니 ‘변호사 사면 된다’는 식으로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윤길옥·최재영씨 같은 사고 생존자들도 괴롭기는 매한가지다. 천우신조로 살아남았지만 돌아온 건 정부가 지급한 생계지원비 석 달치, 그리고 그 액수와 비슷한 지자체 지원금이 전부다. 정부의 생계지원비는 지난해 시간당 최저임금 5210원을 기준으로 한 달치 209시간을 적용한 108만8890원 수준이다. 그나마 식구 수에 따라 차등 지급됐다.

윤씨는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부인이 대형마트 점원으로 일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리고 있다. 최씨 가족은 은행 대출로 생활비를 메우다보니 빚이 7천만원에 이른다. 최씨는 고향의 노모에게 사고 소식조차 못 알렸다. 지난 설에 노모를 모시고 동생들까지 모두 최씨 집에서 차례를 지냈지만, 그는 노모가 자신의 화상 자국을 볼까 싶어 내내 바짓단에 손이 갔다.

윤길옥씨는 지난해 10월 용기를 냈다. 4년 할부로 화물차를 새로 샀다. 배는 도저히 탈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집이 있는 제주도 안에서만 한 달 반 동안 화물일을 하다 운전대를 놓아버렸다. “순간순간 정신이 가버리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신호등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고….” 윤씨는 다른 기사를 구해 차를 맡기고 다시 병원에 누웠다. 최재영씨는 두 달 전부터 경기도 안산의 유가족 사무실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찾아간다.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화물차 기사들에게도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화상 부위 수술을 하면 거동이 더욱 어려워 아예 수술을 가을로 미뤘다. 그러나 화물차 운전은 다시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잠수사 김상우·김관홍씨는 언제 다시 바다에 갈 수 있을지 기약도 못한다. “미친 짓이나 다름없던” 수색 작업의 후유증으로 허리와 어깨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일거리가 있더라도 아픈 사실이 드러나면 퇴짜를 맞을 게 뻔하다.

바다 위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았지만, 그 아비규환의 풍랑을 헤치고 단 한 사람이라도 찾으려고 바닷물에 뛰어들었지만, 이들에게 지난 1년 국가는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현장에 갔다. 그게 죄라면 죄다. 그런데 역사적 교훈을 생각 못했다. 사람들한테 욕먹고 따돌림당한다는 것. 국가가 우리를 토사구팽한 것 아니냐. 선거에 이용해먹으려고 치료·보상 문제도 계속 연기시켰다는 생각이 든다.”(김관홍씨) “개인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 지금 대통령이 그분 따님 아닌가. 어린 생명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됐는데, 정부가 국가 재난이라고 선포해놓고 실제로는 ‘너희들이 알아서 버텨라’라는 식으로 하면 어떻게 국가를 믿고 이 나라에 살 수 있겠나.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없어진 느낌이다.”(최재영씨)

인터뷰 도중 병원 옆 큰길에서 소방차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윤길옥씨가 급히 창문을 열었다. “큰불이 났나보네요.” 그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글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