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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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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다’는 성립하지 않는다

추억 전쟁을 벌이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X세대의 회고 “현실은 ‘미생’인데 복고에서
위안을 찾아”… 당시를 다르게 기억하는 세대는 추억마저 몰수당한 ‘비국민’이 돼
등록 2015-01-16 15:34 수정 2020-05-03 04:27

“당신은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어제의 그리고 오늘의 종합편성채널이 끝없이 부르는 노래다. 한국인은 성공했다. 우리의 근면함 때문에, 탁월한 지도자 덕분에, 미국의 은총에 힘입어. 이들이 부르는 시끄러운 ‘한국인을 위한 축복송’의 마지막은 물론 규탄이다. 저놈의 민주화 세력들, 진보 나부랭이들을 향한 준엄한 규탄으로 끝난다. 암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현실이 ‘저들을 따르면 이르는’ 지옥으로 환기된다.

‘한국인을 위한 축복송’
이들이 ‘간만에’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났다. 의 덕수씨는 1950년대 흥남부두에서 미군이 띄운 ‘노아의 방주’ 같은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오고, 1960년대 파독 광부로 목숨을 걸고 외화벌이를 하며, 1970년대 베트남전에서 물자를 수출하는 산업역군이 된다. 이들의 눈에는 영화 이 ‘뉴라이트 교과서로 걸어 들어간 덕수씨’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노고를 가장해 독재정권 시기를 산업화 시대로 포장해온 이들은 이런 덕수씨가 주인공인 을 발견하고 열광했다. 영화의 실체엔 절반쯤 눈을 질끈 감고서 “이것은 우리의 영화다!” 선언했다. 영화로 ‘역사 바로잡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산업화 세대의 고생담을 담은 영화 〈국제시장〉(위쪽), 민주화 세대의 고투를 그린 〈변호인〉을 통해 한국의 중·장년은 아련한 시절을 회고할 시간을 가졌다. 한국 흥행영화에서 점점 ‘현재적 문제’가 사라지고 있다.  JK필름 제공, 위더스필름 제공

산업화 세대의 고생담을 담은 영화 〈국제시장〉(위쪽), 민주화 세대의 고투를 그린 〈변호인〉을 통해 한국의 중·장년은 아련한 시절을 회고할 시간을 가졌다. 한국 흥행영화에서 점점 ‘현재적 문제’가 사라지고 있다. JK필름 제공, 위더스필름 제공

이들이 의도한 칭송이 더해져 이 흥행할 무렵 안방에선 ‘토토가’() 열풍이 불었다. 1990년대 인기가수들은 그 시절의 의상을 입고 댄스가요를 불렀다. 시청률은 30%의 유리 천장을 뚫었고 음원 순위의 상위권을 점령했다. 이제는 30~40대에 접어든 1990년대의 엑스(X) 세대는 한류의 원형이 시작된 그 시대를 돌이키며 ‘그때가 좋았지’ 추억에 젖었다.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송희일 감독도 ‘토토가’에 자극받아 김건모의 를 듣다가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렸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이어진 내용은 이렇다.

“그러니까 50~60대는 6·25와 산업화 시대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우리가 참 고생이 많았지’ 회고하고, 1960년대생 486세대는 87체제를 끊임없이 소환하며 ‘아, 민주주의!’ 회고하고, 1970년대생은 드라마와 예능, 가요를 통해 끊임없이 1990년대를 호명하며 ‘그때가 재밌었지’ 문화적 회고를 도모한다. 예컨대 195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까지 한국의 중·장·노년들은 온통 향수와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각기 세대의 존재론적 가치를 셈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야흐로 복고의 백가쟁명.”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는) 산업화 세대, 정치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민주화 세대, 문화적으로 성공한 (세대로 여겨지는) X세대, 훈장을 하나씩 달고서 ‘추억팔이’에 나섰다. 어제의 영광(스스로는 고투로 생각한다)을 오늘에 되살려 상품을 만든다. 추억도 자본이 되는 시대다. 당시를 다르게 기억하는 그 세대는 추억마저 몰수당한 ‘비국민’이 된다. “복고의 반복은 결국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고백이자, 늙은 세대가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기는 위기다.” 이어진 이송희일 감독 글의 일부다. 추억의 단일화, 추억의 자본화는 그렇게 ‘취향의 비국민’을 어제도 오늘도 이중으로 소외시킨다. 그리고 팔 만한 추억이 없는 세대는 어쩌나.

포장된 휴머니즘은 누구에게 호소하나

그렇다면 민주화운동 세대는? 이전에 같은 영화가 있었다. 최루탄과 화염병을 주고받으며 싸웠던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은 투표장으로 옮겨졌고, 담론으로 확장됐다. 그들이 사랑하는 영화를 얼마나 많은 국민이 보느냐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표를 얻느냐를 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적 선택의 징표로 1천만 관객은 그래서 중요하다. 문화비평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에서 사실은 사회주의자였을 학생은 휴머니스트로 포장되고, 에서 덕수는 역사나 국가와 상관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 시대의 중심 인물인 의 대학생 운동권과 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워져 있다. 둘 다 공히 개인의 탁월성을 칭송하는 작품인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는) 산업화 세대, 정치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민주화 세대, 문화적으로 성공한 (세대로 여겨지는) X세대, 훈장을 하나씩 달고서 ‘추억팔이’에 나섰다. 어제의 영광(스스로는 고투로 생각한다)을 오늘에 되살려 상품을 만든다. 추억도 자본이 되는 시대다.


한국인에게는 탁월한 개인을 상상하게 하는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는) 역사가 있다. 그렇게 산업화와 민주화는 실물감이 있어서 자극하면 반응하는 영광의 코드가 됐다. 그렇다면 포장된 휴머니즘은 누구에게 호소하는가? 이택광 교수는 “의 휴머니즘은 X세대에게 호소한다”고 분석했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담론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캐스팅보트는 X세대가 쥔다는 것이다. 정치적·문화적 부동층인 X세대의 지지를 얻어야 담론 투쟁의 승자가 된다. 중·장년의 추억 전쟁에서 X세대 이하의 청년은 선거의 유권자로 동원되는 것처럼 영화의 관객으로 동원된다. 이 교수는 “은 X세대의 취향에 맞춘 영화지만 논쟁 구도에서 이들은 없었다”며 “그런 이들이 ‘토토가’를 통해 전면에 등장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X세대는 누구였나? 이들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미지의 X를 부여받은 세대였다. 이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쳐온 기성세대가 보기에 무언가 성취할 의욕이 없는, 소비문화에 빠진 ‘이상한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의 걱정을 사던 세대였던 것이다. “회의하고, 딴죽 걸고, 찌질하고” 같은 수식어는 집단주의를 거부한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를 특징짓는 말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토토가’를 통해 화려하게 무대로 복귀했다. 하필 “나, X세대?”라는 카피의 화장품 광고 모델인 배우 이병헌이 난처한 논란에 휩싸인 때였다. 이병헌, 장동건, 배용준 같은 X세대 배우들은 여전히 대중문화에서 ‘톱 중의 톱’ 자리를 차지한 현역이다. 최소한 X세대 배우들은 지난 20년간 뱀파이어 같은 세월을 누렸다.


추억이 흉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현재도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토토가’는 여전히 현역인 김종국, 엄정화 같은 이들과 소식이 궁금한 터보의 김정남, S.E.S의 슈 같은 출연진을 황금 비율로 섞어놓았다. 마치 부장으로 진급한 이들이 팔팔한 신입사원 시절을 회고하는 듯한 흐뭇함이 있고, 퇴직한 동료의 안부를 오랜만에 확인하는 반가움도 있다.


대중문화 소비자로 X세대도 여전히 젊은 편이다. 이들은 때로 아이돌 그룹의 이모팬, 삼촌팬으로 불린다. 이모·삼촌이 즐겼던 추억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많이 ‘후지지’ 않다. 잠시 지나가는 유행가로 오늘에 되살려 10~20대가 잠깐 같이 놀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는 “1990년대 대중문화는 오래됐으나 너무 구식은 아닌 것, 리메이크하거나 재해석할 만한 것으로 수용된다”며 “‘토토가’에서 보듯이 연속성의 친근함과 단절성의 신기함이 동시에 있다”고 분석했다. X세대는 여전히 소년의 취향을 간직한 키덜트 세대로 남아 있다. 심 교수는 “만혼을 하고 아이도 늦게 낳는 이들은 문화를 소비할 여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의 추억은 영화 , 드라마 시리즈 등을 통해 빠르게 회고됐다. 이제는 1990년대를 재구성한 콘텐츠도 아니다. ‘토토가’를 통해 1990년대 원형질의 콘텐츠가 호응을 얻는다. 길이 3~4분짜리 가요는 집단적 회고에 가장 알맞은 장르다. 영화는 극장이 필요하고, 드라마는 다 함께 보기엔 길다. 원래 X세대는 ‘우리’를 거부한 세대였다. ‘토토가’를 통해 만들어진 ‘우리’ 앞에서, 갑자기 어른이 된 X세대의 일부는 당황한다.

추억이 흉하지 않으려면…

이런 세대적 회고는 불가피하게 추억의 단일화로 이어진다. 사실 추억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간편한 회고에서 중간계급 대학생의 향수는 모두의 추억으로 단일화된다. 이택광 교수의 분석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가 아니었지만 내부의 균열이 드러나면 불편한 진실이 등장한다. 휴머니즘으로 포장하고 노스탤지어를 넣어야 ‘우리는 하나였다’는 과거형이 완성된다. 도저히 지금 ‘우리는 하나다’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추억의 단일화는 취향의 비국민을 만든다.

추억이 흉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현재도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토토가’는 여전히 현역인 김종국, 엄정화 같은 이들과 소식이 궁금한 터보의 김정남, S.E.S의 슈 같은 출연진을 황금 비율로 섞어놓았다. 마치 부장으로 진급한 이들이 팔팔한 신입사원 시절을 회고하는 듯한 흐뭇함이 있고, 퇴직한 동료의 안부를 오랜만에 확인하는 반가움도 있다. 잊혀진 이들에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족사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본은 암투병하는 어머니를 모셨고, 슈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고, 쿨의 김성수는 엄마를 잃은 딸을 위해 산다. 이렇게 대중과 멀어진 이유가 가족드라마로 재현된다. 섭외의 문제도 있지만, ‘토토가’에는 실패를 자극하는 기억은 의도했든 아니든 삭제돼 있다.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김현정과 소찬휘는 잊혀지되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의 아버지는 X세대의 아버지다. 나이와 세대로 보아서 그렇다. 양극화가 가장 심한 세대지만, 한국의 노년은 여전히 정치에서 힘이 세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명명한 보수언론은 이들을 끈질기게 ‘아버지’로 호명했다. 여전히 당신이 현역이고 나라의 주인이라는 호명은 어쨌든 성공했다. 보수는 중·장년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정권을 찾았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문화적 서사였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이후로 가족과 아버지를 다룬 영화는 꾸준히 호응을 얻었다. 이송희일 감독은 “2009년 이후 향수영화가 부흥하기 시작했다”며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 이후 할리우드에서도 향수영화 열풍이 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절은 변했고 가부장제는 흔들린다. 이송희일 감독은 “가부장제가 붕괴되는 가운데 새 가부장상을 만들지 못하니까 회고로 들어가 과거를 미화한다”고 덧붙였다.

아련한 향수는 구린 향수가 되었다

이렇게 실체가 모호한 과거는 상상된 현실이 된다. 아메리칸드림 때문에 가 설득력을 얻었던 것처럼, 한강의 기적이 있어서 도 ‘먹힌다’. 그러나 추억의 과잉은 현재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심영섭 교수는 “현실은 ‘미생’인데 복고에서 위안을 찾는다”고 말했다. 탈정치를 권하는 사회에서 아련한 향수는 구린 향수가 되었다. 1970년대 부동산 개발을 다룬 영화 , 포크가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등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추억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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