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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이 70m 굴뚝 위에서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14-12-27 15:06 수정 2020-05-03 04:27

<font color="#006699">12월13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안 70m 굴뚝에서 김정욱·이창근 두 해고노동자가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대법원의 정리해고 무효 파기환송으로 결국 기댈 곳은 공장 안 동료들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이 공장을 내려다보며 동료들에게 띄우는 편지를 에 보내왔습니다. _편집자</font>


전남 곡성이라는 시골 동네가 있습니다. 지리산을 돌아 섬진강이 흐르고, 태백산맥의 산줄기들이 여전히 위용을 뽐내는 마을입니다. 겨울이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눈이 쏟아지는 산골입니다. 축구공은 동네의 유일한 장난감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습니다.

1993년 7월, 이모부의 소개로 쌍용자동차에 입사했습니다. 2009년 정리해고 때 희망퇴직서를 쓰고 회사를 떠나신 이모부는 중동 왕자들이 즐겨 이용한다는 코란도를 만드는 일을 늘 자랑스럽게 얘기하시곤 했습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이렇게 모이는 게 힘이구나’ </font></font>
김정욱·이창근 쌍용자동차 두 해고노동자가 평택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12월13일 오후 무장한 경찰들이 조합원들의 공장 접근을 막고 있다. 박승화 기자

김정욱·이창근 쌍용자동차 두 해고노동자가 평택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12월13일 오후 무장한 경찰들이 조합원들의 공장 접근을 막고 있다. 박승화 기자

생산 라인에 자재를 보급하는 물류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난생처음 전동지게차를 탔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선배들 중엔 저보다 20살 이상 많은 분도 계셨습니다. 아저씨라고 했더니 “야 이놈아, 형님이라고 불러”라며 혼을 냈습니다. 형님들에게 일도 배우고 퇴근길 소주잔을 기울이며 술도 배웠습니다. 평일에는 종종 밤 11시까지 일하기도 하고 금요일에는 철야라고 밤을 꼬박 새우며 토요일 점심때까지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10월께로 기억납니다. 3개월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노동조합의 정식 조합원이 됐는데, 형님들이 어느 날 노조 행사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형님들을 따라 굴뚝 앞으로 갔습니다. 형님들은 그곳을 ‘민주광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회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형님들 따라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구호도 외쳤습니다.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렇게 모이는 게 힘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님들과 친해지면서 축구를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축구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시골 출신답게 지구력이 좋아 경기 내내 뛰어다녔습니다. 평소와 달리 경기장에 들어서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미드필더로 중앙에 서서 사람들에게 소리 지르며 패스를 합니다. 내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넣으면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축구선수 홍명보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저에게 축구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동네에서도 조기축구회를 했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했으니까 24년이나 됐습니다. 며칠 전에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조기축구회 감독님이 굴뚝 밑에 와서 힘내라고 하고 가셨습니다. 지금 있는 굴뚝에 축구공을 올려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님들한테 잘 보였는지 노조 대의원도 하고 간부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노조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간부들이 조립 라인에서 조금은 편한 지원 부서로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당연히 현장에서는 그런 걸 안 좋게 봤습니다. 간부 생활 하고 한자리 차지하고 그러면 자기들 안위만 생각해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했습니다. 2003년 10월 노조 간부 일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면서 제가 원래 일했던 지원 부서가 아니라 생산 라인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회사는 괜찮은 외곽 부서로 보내준다고 했는데 제가 한 달 가까이 기다려 조립3팀 섀시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겁이 났습니다. 10년 가까이 지원 부서에서 생활하다보니 컨베이어를 탈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편한 부서에서 힘든 곳으로 왔다고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보고 멀리하던 동료들이 같이 생활하고 밥 먹으러 다니면서 조금씩 친해지더니 제가 힘들면 일을 나눠서 해주기도 했습니다. 동료들과 더 친해지고 싶어서 부서 축구팀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이름은 ‘유니콘’으로 지었습니다. 조립3팀 섀시과의 정규직, 비정규직 동료들을 다 쫓아다니며 모았습니다. 100명 중 절반 가까운 사람이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축구를 하면서 더 친해졌고,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같이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회사에 불합리한 것을 바꿔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주야로 일하니까 반대 조 동료들과는 가까워지지 않아서 토요일에 체육대회를 하자고 제안해 조립3팀 전체가 오랜만에 모여 뛰어놀기도 했습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목줄 움켜쥐는 보이지 않는 폭력</font></font>

회사 안에서 고향 사람들과 10년 가까이 모임을 했습니다. 가족들과 밥도 먹고 1년에 한 번씩 2박3일로 놀러다니기도 했습니다. 회사가 비정규직을 포함해 3천 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한 2009년이었습니다. 노조에서 옥쇄파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는 직원들 동원해서 파업을 중단하라며 관제데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송차 위에서 선무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관제데모 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모임도 하고 여행도 다닌 친한 형님이 있는 걸 봤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최소한 나를 생각한다면 오지 않거나 뒤에 서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맨 앞에 서서 제 눈에 들어오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이 형님도 나보다 더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구나 싶었습니다. 관리자들이 앞장서라고 하니까 나올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하게 됐지만 당시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화도 나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감옥을 나와서 공장 앞에 왔습니다. 해고자들이 출근하는 동료들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내가 가서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손을 내밀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돌았습니다. 몸이 긴장되고 등짝에서 식은땀이 났습니다. 우리가 구속되고 나서 해고자들이 동료들 앞에 가까이 가서 선전전을 못한 이유가 있었구나 생각했습니다. 2009년 투쟁하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일 듯이 덤벼들고 우리도 그걸 막는 과정에서 마음을 다치거나 상처를 입다보니 서로 가까이 있는 것조차 겁도 나고 분노도 생긴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부서의 동료들이 저를 초대해줘서 함께 밥을 먹게 됐습니다. 그때 온 사람들 중에 저만 해고되고 나머지는 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공장 안에 있는 동료들이 반갑게 맞이해주고 너무 미안하다고 하고, 술 한잔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더 자주 만나자고 했습니다. 굴뚝에 올라와 있는데 당시 부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손 흔들어주고, 전화를 해주기도 합니다. 통화를 하면서 마흔 넘은 사내놈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형님들, 동료들 보고 싶습니다</font></font>

2009년 이전에는 공장이 참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많이 위축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가하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이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목줄을 움켜쥐고 ‘죽을래, 살래?’ 이렇게 압박하다보니 공장 안에 있는 동료들이 아무 말도 못합니다. 볼 때마다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해고돼서 동료들 죽어가고 우리 삶이 힘들고 고달프다보니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존엄성이 있는데 공장 안의 동료들을 볼 때마다 속이 상했습니다. 이 회사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사람들인데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동료들에게도 누군가가 필요하고, 자기들의 자존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장을 오고 가는 동료들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굴뚝이 아니라 우리 동료들이 고립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가 내리누르는 압박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둘러싸여 힘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려가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굴뚝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동료들의 어깨가 당당하게 펴지고, 우리가 함께 환하게 웃는 시간이 간절히 기다려집니다. 형님들, 동료들 보고 싶습니다.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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