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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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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계가 쑥대밭이 된 지 1년

지난해 ‘살생부’ 적힌 대로 대통령이 “나쁜 사람” 지목한 국·과장 경질 뒤,

전남·전북·세종 등 지역 승마협회장에게도 “청와대 지시” 앞세워 사퇴 강권 의혹
등록 2014-12-10 15:57 수정 2020-05-03 04:27
정윤회씨의 딸 정아무개 선수가 지난해 7월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마장마술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정윤회씨의 딸 정아무개 선수가 지난해 7월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마장마술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고3 딸을 위한 치맛바람일까. 대통령 비선의 국정 농단일까.

“엄마 치맛바람이 워낙 셌는데…, 심판 판정에 항의도 하고…. 예전에 승마협회 전무를 하다가 비리로 징역을 산 사람이 있는데, 그 전무가 그 엄마랑 친해졌던 모양이야. 그 전무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지금 승마협회 행정을 지배하고 있어.”(한 대한승마협회 고위 관계자)

여기서 ‘엄마’는 정윤회씨의 전 부인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를 말한다. 그리고 엄마랑 친한 ‘그 전무’는 박아무개 전 승마협회 전무로 문화체육관광부 국·실장의 전격 경질을 촉발한 이른바 ‘살생부’의 작성자로 전해진다. 딸은 지난 9월 인천 아시안게임 승마 마장마술 부문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판정 시비, 이례적으로 상주경찰서 직접 수사

최씨와 정윤회씨가 본격적으로 승마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계기는 지난해 4월 경북 상주에서 열린 한국마사회컵 전국승마대회다. 문체부와 승마협회 등의 말을 종합하면, 당시 판정 시비가 일자 상주경찰서는 시합 다음날 대회 심판위원장을 불러 참고인 조사를 하고, 심판진을 두 차례나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례적인 수사에 대해 “첩보에 의한 내사”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경찰 수사는 내사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당시 대회의 심판으로서 경찰 조사를 받았던 승마협회 관계자는 “판정 시비는 협회에서 해결해야 할 일인데 경찰이 나서서 그 자체가 의아했다. 당시 (정윤회씨 부부의 영향으로) 윗선에서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협회 창설 이래 판정 시비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없는데, 일종의 엄포용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당시 정씨 부부의 딸인 정아무개(18) 선수는 국가대표 선발을 놓고 김아무개 선수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는데, 4월 대회 때는 김 선수가 정 선수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판정 시비가 일었고 이것이 경찰 조사의 빌미로 작용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승마계에 팽배했다.


“감사에서 특별히 나온 것은 없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그 지랄 하니까, 청와대 지시 사항이라고 그러고….”
- 지난해 강원체육회 관계자가 강원승마협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경찰 조사 직후인 5월, 전례 없는 승마협회 조사·감사에선 청와대가 등장했다. 당시 조사·감사를 둘러싼 사정을 잘 아는 문체부 인사는 “청와대 지시에는 (최씨와 가까운) 박씨를 만나 승마계의 비리나 문제점을 파악해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문체부 관계자들은 박씨를 만난 뒤 승마계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고, 박씨뿐만 아니라 반대쪽의 의견까지 청취해 “정윤회씨 쪽이나 반대쪽이나 다 문제가 많아서 정화가 필요하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승마협회 조사에 대한체육회를 건너뛰면서까지 문체부가 직접 나섰다는 점도 이례적이지만, 승마계의 문제에 대해 한 개인에게 청취해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가이드라인 또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문제는 이른바 ‘가이드라인’을 넘어선 조사와 실행계획을 제출한 국장과 과장에 대한 전격적인 경질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경질은 국장과 과장이 박근혜 정부 들어 첫 스포츠 정책인 ‘스포츠비전 2018’을 발표하고, 체육계 전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겠다고 기자간담회를 연 지 일주일 만에 이뤄졌다.

두 담당 공무원의 경질 이후 승마계는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전남·전북·세종 등 지역 승마협회장들의 사퇴 과정에서 윗선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주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9일 국회 정론관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박종소 전 전북승마협회장은 “지난해 11월부터 사퇴 압박이 들어왔다. (당시 사퇴 압박을 하는 정부 쪽 관계자가) 대한민국 최고 기관을 언급하면서 ‘물러나시는 게 좋겠다. 부딪히면 하나도 이득 볼 것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가 확보한 강원승마협회장과 강원체육회 관계자의 통화 녹취록을 보면, 강원체육회 관계자는 강원승마협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감사에서 특별히 나온 것은 없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그 지랄 하니까, 청와대 지시 사항이라고 그러고…”라는 표현으로 ‘윗선의 지시’를 언급하는가 하면, “예산 축소” “우수 선수 관리비 미지급”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10·26 이후 혹은 1986년 이후

이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개입’한 정황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당시 유진룡 문체부 장관을 집무실로 불러 정씨 부부와 관련된 승마협회 조사에 관여한 문체부 국·실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국·실장의 경질 또는 좌천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문체부 관계자는 “당시 승마협회 관련 감사 지시와 인사야말로 (정윤회씨 부부가 국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승마협회를 쑥대밭으로 만든 1년을 되짚으면서 정씨와 함께 최씨를 재삼 주목해보는 것은 최씨와 박 대통령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정윤회씨 등 비선 라인의 국정 개입 의혹에 최씨의 역할도 눈여겨봐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최씨는 1970년대 후반 박 대통령이 영부인 역할을 하던 시절 측근으로 알려진 고 최태민씨의 다섯째 딸이다. 최태민씨는 당시 ‘구국봉사단 총재’ 등의 직함을 갖고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최씨가 박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 시기로, 특히 10·26 이후 박 대통령이 고립된 생활을 하던 시절에 최씨는 말벗으로 지내며 신뢰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작 최씨 본인이 박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언급한 것은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 1987년 인터뷰를 보면 “개인적으로 (박근혜 이사장을) 만난 것은 지난해(1986년) 어린이회관에서 (본 게) 처음이었다”며 “(박 이사장이) ‘열심히 해보라’며 아버지 안부를 물어 ‘잘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이 운영하던 잡지사의 파업 과정에서 최태민·최순실씨 부녀의 간섭과 전횡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 사실에 근거해 박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가 밀접했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육영재단은) 최태민·최순실씨 등 외부 인사들의 간섭 없이 운영됐다”며 당시 제기된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늦어도 1980년대 중반부터는 두 사람의 인연이 계속돼온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최씨의 사촌들도 박 대통령과 인연

최씨만이 아니라 최씨의 사촌들과 박 대통령의 인연도 공개된 적이 있다. 최씨의 한 사촌(56)은 2012년 와의 인터뷰에서 “1988년께 백부님(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이 한때 이사장을 맡은) 영남대에서 일을 시켰고, 대학 박물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품을 관리하는 업무 등을 맡은 적이 있다”며 “백부님이 들어가 살라고 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주한 바 있는) 신당동 가옥에 들어가 빈집을 관리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과거사 때문에 정씨가 1990년대 중반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 역할을 한 것 또한 최씨와 박 대통령의 관계 때문 아니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하어영 정치부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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