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고용 부문과 관련해 정부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는 국정 목표는 ‘고용률 70% 달성’이다. 남성 고용률은 이미 목표치 이상이어서 이 과제는 사실상 여성 고용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 고용, 특히 기혼여성 고용을 효과적으로 높이려면 실제로 우리나라 기혼여성이 필수 가사노동(가계생산활동)에 어느 정도 시간을 쓸 수 있는지 정교하게 추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유급 노동시간을 뺀 뒤 모자라는 부족분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보고서가 나와 주목을 끈다. 지난 10월 한국고용정보원이 내놓은 ‘소득과 시간빈곤 계층을 위한 고용복지정책 수립방안-림팁(LIMTIP) 모델의 한국 사례’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시간빈곤’이란 표현이 유독 눈길을 끈다. 권태희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이 미국의 레비경제학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연구다.
레비경제학연구소는 이른바 ‘금융불안정성 이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가 주도해 설립한 연구소로, 이번 연구는 레비경제학연구소가 개발한 빈곤 측정 모델 림팁을 활용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림팁 모형이 어떤 것인지 간략히 설명해보자. 림팁은 국가 공식 빈곤 측정 척도로 쓰여온 소득빈곤만으로는 실질적인 빈곤 계측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림팁은 기존 전통적인 소득빈곤에다 ‘시간빈곤’ 개념을 포함해 소득과 시간을 통합해 빈곤을 측정하는 모형이다. 점점 더 증가하는 노동시간과 가계생산활동 시간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목을 죄어오는 시간 사용 압박을 받고 있다. 림팁은 수면과 식사 등 삶에 필수적인 시간과 가구당 필수 가사노동에 투입해야 하는 시간, 출퇴근 시간까지를 합산한 뒤 일주일 총 168시간에서 이를 가감해 가구당 가용시간을 산출한다. 여기서 유급 노동시간을 뺀 뒤 모자라는 부족분은 ‘시간빈곤’으로 잡히게 된다.
이제 이 시간빈곤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식사준비·돌봄·보육 등 가계생산에 투입해야 할 시간 중에서 부족한 시간은 시장에서 대체 구매(외식, 가사도우미 고용, 돌봄서비스 이용 등)로 해소해야 하는데, 이를 가사도우미의 시간당 임금(시간부족분의 금전적 가치)으로 환산하면 시간부족분을 메우는 데 드는 가구당 비용이 산출된다. 마지막으로 이 화폐가치를 기존 소득빈곤선에 추가하면 시간빈곤까지 포함한 새로운 빈곤선 임계값이 도출된다.
이를 통해 가구별·개인별로 4개 그룹(시간-소득의 동시빈곤, 소득빈곤, 시간빈곤, 시간과 소득이 빈곤하지 않은 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간빈곤까지 포함하면 가사노동시간 부족으로 발생하는 빈곤이 포착돼 더 현실적인 빈곤 측정이 가능해지고, 새 빈곤선을 효과적인 고용·복지 정책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번 림팁 조사에 사용된 자료는 소득의 경우 2009년 한국복지패널조사(6207가구, 1만6255명), 시간사용은 2009년 통계청의 한국시간사용조사(1만639가구, 2만2812명)이다.
소득빈곤층일수록, 여성이면 더 빈곤이처럼 시간부족의 화폐가치를 넣은 림팁 분석을 거치면 공식 빈곤층에는 숨겨져 있던 상당한 크기의 ‘또 다른 빈곤층’이 드러나게 된다. 연구 결과, 시간빈곤은 우리나라 노동인구 사이에 만연해 2008년 전체 노동인구의 42%(약 930만 명)가 시간부족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가구만 살펴보면, 시간부족의 금전적 가치를 더할 경우 빈곤에 속하는 가구가 거의 3배나 증가했다. 즉, 기혼·미혼을 불문하고 모든 취업가구(가장 혹은 배우자만 취업하거나 둘 다 취업)에서 최저생계비로 계측하는 정부 공식 빈곤율이 2.6%(34만1천 가구)인데 림팁에선 새 빈곤가구가 7.5%(98만3천 가구)로 늘어났다. 숨겨진 빈곤층이 64만2천 가구에 이른다는 얘기다.
맞벌이 취업가구의 경우, 공식 빈곤율은 1.9%(9만6천 가구)인데 림팁에선 7.5%(38만2천 가구)로 높아진다. 숨겨진 빈곤층이 5.6%(28만6천 가구) 존재하는 셈이다. 나아가, 남편이 생계를 부양하고 배우자는 전업주부인 가구의 공식 빈곤선 기준은 2.1%(9만5천 가구)인데 림팁에선 새 빈곤가구 비중이 3.9%(18만 가구)로 증가했다.
소득부족액으로 보면, 모든 빈곤가구에 걸쳐 월평균 림팁 소득부족액은 공식 소득부족액(25만원)보다 1.8배 높은 44만원으로 나타났다. 맞벌이 취업 중인 소득빈곤가구만으로 좁혀보면, 공식 소득부족액은 23만원이지만 림팁 소득부족액은 54만원으로 훨씬 늘어났다. 권태희 부연구위원은 “현재의 국가 공식 빈곤 계측은 실제 충족되지 못하는 소득 필요분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다”며 “가계생산에서 시간부족을 고려하면 일을 하고 있지만 빈곤에 허덕이는 ‘노동빈곤’ 계층 통계에 심각한 누락이 빚어지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시간빈곤은 소득빈곤층일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시간-소득의 ‘이중 빈곤’인 것인데, 소득빈곤가구의 시간빈곤(80%)은 비소득빈곤가구(55%)에 견줘 매우 높았다. 이는 고연봉 전문직이 근로 빈곤층보다 시간빈곤을 겪기 쉽다는 일각의 인식과는 다른 결과로, 시간빈곤이 소득빈곤층에 불균형적으로 더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 부연구위원은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경향이 있는 빈곤층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을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은 시장대체재를 구매해야 한다”며 “이 비용을 반영해 최저임금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비취업남성보다 많은 취업여성 가사노동특히 시간부족의 성별 격차가 매우 커서 시간부족을 경험하는 전체 노동인구(930만 명) 중 약 56%(510만 명)가 여성이었다. 취업자만으로 좁혀 시간부족을 보면, 남성 시간제 노동자(노동시간 주당 35시간 미만)의 경우 2%에 그쳤으나, 여성 시간제 노동자의 시간부족률은 18%였다. 상용직 역시, 여성의 시간부족률이 70%로 남성(36%)보다 2배가량 높았다. 이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가계생산활동에서 남성에 견줘 훨씬 더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흥미로운 건 노동시간의 차이가 가계생산시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노동시간은 남성 주당 51∼52시간, 여성 주당 47∼49시간으로 거의 균일한 반면, 가계생산에 필요한 주당 시간은 여성 25시간과 남성 9시간으로 큰 격차가 있다. 놀랍게도 필수 가계생산에 쓰이는 평균 시간은 남성이 벌고 여성은 전업주부인 가구나 맞벌이 가구나 거의 동일했다. 즉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들이 ‘이중 부담’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남성 가장의 하루 가사노동시간은 주당 평균 37분인 데 비해 여성은 3시간15분에 이른다. 심지어 취업여성은 비취업 상태로 집 안에 있는 남성 가장보다 더 많은 양의 가사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취업가구만을 대상으로 보면, 맞벌이 가구의 72%가 시간빈곤만 경험하고 있었으나, 맞벌이로 소득빈곤 임계값 이상을 벌고 있음에도 긴 노동시간과 가계생산의 과도한 부담으로 여성 취업자들은 시간부족의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권 부연구위원은 “가계생산은 사회적 재생산 활동이다. 일과 삶의 조화를 구호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시간빈곤을 주요 정책 개념으로 고려해 반영해야 한다”며 “남성이 집 안에서 가계생산시간을 늘리는 데는 인식과 태도에 한계가 있다. 우선 새로운 림팁 빈곤 지표를 정책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지표를 도입하면 기혼여성이 더 많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또 더 오래 노동시장에 잔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권 부연구위원은 “시간빈곤을 고려해 보육 등 공공서비스 제공을 확대하면 저출산 대책도 될 수 있다”며 “공평한 성별 임금정책을 통해 여성이 가계생산에만 시간을 쓰는 기회비용을 높이면 여성의 고용 기회가 높아지고 자연히 남성이 가사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게 돼 취업여성의 시간빈곤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경제부 기자 kyewa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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