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재판장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

성폭력 피해자와 동행하는 ‘지원단’이 본 재판… 어떤 때는 재판장이 신뢰관계인

동석을 거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신문 제지하기도 하고
등록 2014-11-01 14:52 수정 2020-05-03 04:27

법정은 누구에게나 낯선 공간이다. 성폭력의 피해를 입고 법원을 찾은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법정 증언을 요청받은 피해자들은 대부분 법정에서 증언하는 상황 자체에 위축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피해 사실에 대한 의심이 가득한 공간, 때로 가해자까지 있는 이 공간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안정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재판부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는 때로 직접 법정 증언에 나서야 한다. 가해자가 범행을 적극 부인하는 경우 재판부가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사실 확인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목적에서다. 형사재판 자체가 가해자 신문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재판장은 가해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접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직접 피해 상황을 증언하는 것은, 재판장이 피해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판단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최근 법 개정 통해 다양한 제도 마련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지난해부터 시민들과 함께 성폭력 피해자들의 재판을 동행해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지난해부터 시민들과 함께 성폭력 피해자들의 재판을 동행해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그 낯섦을 알기에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지난해부터 성폭력 피해자들의 재판을 동행하며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과 함께 재판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름하여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성폭력피해자 재판동행지원단’(지원단)이다. 2013년부터 2014년 현재까지 118명이 지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사법부가 마련한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피해자에게 ‘권리’로 적용되고 있는지 점검해왔다. 지난 10월22일 한국여성민우회는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법원이란’ 기획포럼을 열어 1년6개월 동안 모니터링한 결과물을 발표했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온전히 피해자로 보기보다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보는 사법기관의 문제를 재확인했다.” 지원단에 참여한 시민들은 이렇게 재판 동행 후기를 밝혔다. 무엇이 제3자인 그들로 하여금 의심과 불신을 체감하고 공감하도록 한 것일까.

우리에게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법 개정을 통해 형사재판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됐다. 인적 지원으로 피해자 신뢰관계인 동석, 증인지원관, 진술조력인 제도 등이 확보됐고 증인을 보호하기 위해 증인지원실·화상증언실 등의 공간과 비공개심리 제도가 생겼다. 모두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겪는 2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로서 긍정적 의미가 있다. 지원단이 동행한 17건의 사건에서도 14개 사건의 피해자가 지원제도를 활용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선 제도가 유명무실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지원제도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면 제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증인소환장과 함께 피해자 지원제도 안내장이 동봉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 즉 재판부에 따라 피해자가 체감하는 온도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최악의 경우 재판장은 피해자 지원제도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 증언시 심리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신뢰관계인 동석을 요청할 수 있다. 여성민우회 지원단이 동행한 한 사건에서는 이를 위해 피해자가 증언시 상담원이 동석할 수 있도록 사전 신청까지 해두었다. 하지만 공판 당일 황당한 일이 생겼다. 재판장이 신뢰관계인 동석에 관한 법 조항을 상담원에게 물으며 상담원을 퇴정 조처한 것이다. 반면 또 다른 재판장은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에서도 퇴정 조처를 하지 않고 방청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해다녀야 하는 법원”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도 ‘사람’에 좌우되었다. 지원단이 동행한 5차례의 공판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국선변호사도 있었다. 피해자가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조차 변호인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상담원마저 신뢰관계인 동석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퇴정 조처된 뒤 피해자는 혼자 법정에서 진술해야 했다.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인적 사항이 노출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대법원은 ‘성폭력 범죄 사건의 증인신문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규칙’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피해자 등의 주소, 성명, 연령, 직업 그 밖에 피해자를 특정하여 파악할 수 있는 인적 사항 등이 공개되거나 타인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규칙을 숙지한 판사는 다르다. 한 재판장은 증인신문을 할 때 “피해자의 이름 대신 ‘피해자’로 지칭해달라”고 권고해 재판 내내 피해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담당 재판부의 재량과 의지에 따라 피해자의 신변 안전마저 달라지는 셈이다. 일반 시민의 눈이 때론 더 정확한 법이다. 지원단에 참여한 한 여성민우회 회원은 이런 지적도 내놨다. “같은 통로, 같은 엘리베이터, 같은 출입구.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해다녀야만 하는 법원의 환경!”(지원단 노새)


규칙을 숙지한 판사는 다르다. 한 재판장은 증인신문을 할 때 “피해자의 이름 대신 ‘피해자’로 지칭해달라”고 권고해 재판 내내 피해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담당 재판부의 재량과 의지에 따라 피해자의 신변 안전마저 달라지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성폭력 피해자에게 법정은 때로 2차 피해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다양하게 구성된 피해자 지원제도가 보편적으로 잘 적용된다면 피해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 지원단 참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변호인의 집요하고 지엽적인 신문 사항들로 인해 피해자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는데, 재판장의 적절한 신문 제지와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물도 마셔가면서 답변하라는 태도에 안심이 되었다. 놀랍도록 권위적이고 2차 가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재판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이러한 재판부의 태도가 신선하기까지 했다.”(지원단 주홍글씨)

지원단에 참여한 시민들은 이 경험을 통해 피해자가 형사재판 과정에서 겪은 2차 피해에 함께 분노하고 공감했다.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정의로운 사법부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동행 활동을 하면서 사법부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실재함을 알게 되었고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피해자의 증언은 방청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너무나 절절하게 다가왔다. 나는 피해자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했고, 또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피해자의 용기 있는 결단과 선택에 절로 경탄했다.”(지원단 최지우)

당신도 공감하고 분노하고 경탄하길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문제제기를 할 때 재판 관계자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재판 동행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동참하길 원하는 분들을 기다리고 있다(http://fc.womenlink.or.kr, 02-335-1858).

지은정(모후아)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