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기록한 중국의 에서도 포위된 적이 후퇴할 ‘퇴로’ 정도는 열어주라고 권하는 대목이 나온다.
“되돌아가는 (상대) 군사를 막지 말고, 적을 포위 공격할 때 반드시 구멍을 열어주고, 궁지에 몰린 적에게 덤벼들어 공격(핍박)하지 말라.”
더 완벽히 이기려고 과욕을 부려 상대 군사를 몰살시키려 한다면, 죽음을 예감한 상대도 몰살을 각오하고 덤빌 수 있다는 것이다. 퇴로가 막힌 상대가 택하는 극단적인 수단은 극렬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오래된 당직자는 9월17일, 박영선 원내대표의 당 업무 복귀 기자회견을 앞두고 당 대표실 앞에 모인 몇몇 기자들에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마치 물러설 곳 없는 궁지에 몰린 군사가 된 듯한 한탄처럼 들렸다.
‘여한 없는 특별법’ 강조했던 대통령“세월호 특별법이 잘 풀리기 바라는 우리 입장에서 걱정했던 게 뭔지 아세요? (청와대가 정치적으로 계산해) 추석 직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여당에 전향적 변화를 주문하면서 세월호 특별법 문제를 풀어버리는 거였죠. 그렇게 되면 대통령이 추석 직전에 (극적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는 모든 공(공로)을 가져가게 되고, 이런 얘기가 추석 밥상에 올라갔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더군요. ‘역시나’였죠. 16일 대통령이 한 말들을 보세요. 이건 ‘감히 너희가 나를 건드려?’ 하면서 다 죽으라는 얘기처럼 느껴져요. 국회를 정부의 일개 부처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청와대가 더 완벽한 승리를 위해 퇴로 없는 공격을 감행하며 야당과 세월호 유가족들을 몰살에 가까운 패배 또는 극한 저항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9월16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구멍 없는 포위 공격성’ 발언을 쏟아냈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에서 뱉은 자신의 발언 내용을 청와대 참모를 통해 각 언론사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전달해 자신의 뜻을 사회에 전하는 ‘하달 방식’을 택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문제를 푸는 데 대통령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달라며 청와대 인근에서 길바닥 생활을 한 지 26일 만에 나온 응답이다. 이날 대통령의 말은 특별법 논의가 지겹다고 조롱하던 세력이 감탄할 만한 얘기이지만, 대통령에게 막힌 정국의 숨통을 틔우는 정치력을 조금이라도 기대한 유족들에게는 통탄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
대통령은 “(특별법으로 꾸려지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도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지난 5월 유족들과의 만남에서 ‘유족에게 여한이 없는 특별법’을 강조했던 대통령이 유족이 요구하는 특별법의 구체적 내용까지 언급하며 반대에 나선 것이다.
대통령은 또 “지금의 세월호 특별법과 특검 논의는 본질을 벗어났다. 세월호 특별법은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고, 외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특별법과 관련된 야당과 시민단체, 종교계, 일반 시민들의 주장을 박근혜 정부를 위협하려는 불순세력들의 움직임으로 여기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던 해석이 별로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야당 가장 심하게 와해된 바로 그 순간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여권 내부의 기류와 비슷한 인식도 드러냈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왜 참사가 일어났는지) 그동안 대부분 문제점이 드러났고 이제 국가 혁신을 추진해야 할 때다. 하루빨리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유가족 피해 보상 처리를 위한 논의에 시급히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참사 직후 정부와 청와대가 도대체 어떻게 대응했기에 희생자를 구하지 못했는지를 포함해 성역 없는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하지만, 대통령은 대충 다 밝혀진 게 아니냐는 생각을 내비친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질 말이지만, 야당의 전투 체력이 떨어져 만신창이가 됐을 때 세비 반납 문제까지 거론하는 것은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같이 가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한국대통령학연구소 부소장 임동욱 교수
특히 박 대통령은 특별법과 관련한 여야 협상 내용의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며 여야가 재협상을 시도할 여지를 차단했다. “특별법은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3개월째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닫고 있던 침묵을 일순간에 깨고, 입법권을 가진 의회의 권한까지 침해한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적극 개입했다.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특검 후보 2명을 추천하는) 특검 추천위원회의 여당 몫 추천위원을 야당과 유가족의 동의를 거쳐 추천한다는 여야의 2차 합의안(8월19일)이 (여권의) 마지막 결단”이라며 이것 이상 야당과 유족이 요구하지 말라고 장벽을 쳤다. 대통령 발언의 브레이크는 여기에서 걸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시급한 민생 법안이 전혀 심의되지 않고 묶여 있다. 국회가 국민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못할 경우 그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도 돌려드려야(반납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아갔다. 평소 국회의원들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이 들으면 환호할 만한 얘기이겠으나,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국회가 그 과정에서 정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행정·사법·입법(국회)부는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행정부 수장(대통령)의 이번 발언이 입법부의 자율성을 해친 위험한 발언이라고 지적한다.
‘9월16일 대통령의 기습공격’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의표를 찌르는 것이 이기는 싸움의 기본이라는 의 철칙을 따른 모범이라 할 순 있다. ‘원세훈의 국가정보원’이 2012년 대통령 선거 기간에 정치 개입을 했지만 선거 개입을 하지 않았다는 1심 재판부의 판결(9월11일)로 대선 승리의 정당성을 1차적으로 확보하며 전세를 가다듬은 청와대는 야당이 가장 심하게 와해된 순간을 택해 공습을 시도했다. 9월16일은 거대 양당의 한 축을 지탱하던 제1야당의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탈당을 거론하며 당을 혼란에 밀어넣던 절정의 순간이었다. 전원을 꺼뒀던 박 원내대표의 휴대전화가 그나마 켜져 ‘설득의 통화’라도 시도할 수 있다며 제1야당의 관계자들이 한숨을 돌리던 틈에, 대통령의 발언이 터진 것이다.
“사회적 갈등 비용 유발한 행위”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발언 직후 새누리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불러 자신의 의지를 구두로 재차 전달했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선 역설적으로 박 대통령의 강경 발언이 제1야당 내부 혼란의 일시적 휴전을 부추겨 ‘박영선 원내대표의 당무 복귀’를 가능하게 한 외적 요인이 됐다는 자조도 나오지만, 어쨌든 새정치연합은 내분에다 외부 압박(청와대)까지 겹쳐 제1야당의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받은 날이었다.
새정치연합의 충청권 의원은 “상대를 제압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이 재현됐다. 자신을 향해 비판하면 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야 하는데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 힘으로 눌러버리려 한다”고 우려했다. 김관영 새정치연합 의원은 “박 대통령이 민생과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국회에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며 협상의 여지를 막았다. 오히려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 비용을 더 유발한 행위다”라고 지적했다.
한국대통령학연구소 부소장인 임동욱 교수도 대통령의 발언에 아쉬움을 표했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질 말이지만, 야당의 전투 체력이 떨어져 만신창이가 됐을 때 세비 반납 문제까지 거론하는 것은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여기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여권 내부에선 평가가 엇갈린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세월호 특별법 협상의)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이렇게 발언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옹호했다. 오히려 그는 박 대통령이 확고한 입장을 밝힌 만큼 새정치연합이 유족의 기대치를 낮춰 특별법 합의를 마무리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열린 게 아니냐고 설명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다른 초선 의원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약간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당내에 있다. 청와대 참모와 정무수석은 (이런 강한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옆에서 무슨 보좌를 한 것이냐고 말하는 의원들도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재선 의원은 “그날 청와대로 간 당 지도부도 ‘특별법은 당에 맡겨달라’고 얘기해야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온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과 새정치연합의 이상민 법제사법위원장 등이 재합의안을 이끌기 위해 유족들을 만나며 중재를 시도하는 상황에서 특별법 협상의 마지노선을 설정한 박 대통령의 발언이 나와 의장실도 다소 곤혹스러워했다. 의장실 핵심 관계자는 “유족 등과 얘기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발언으로 어려워지게 생겼다”고 전했다.
여당의 배려와 결단에 기댄 협상가뜩이나 당내 혼란을 겪은 새정치연합은 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운신의 폭이 쪼그라든 여권을 상대로 특별법 재협상의 구멍을 뚫어야 한다. 이런 상황 앞에서 새정치연합의 한 주요 당직자는 난감함을 내비쳤다. “제1야당의 처지와 명예를 위해서라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이완구 원내대표가 8월19일 특별법 2차 합의안보다 좀더 양보해주는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더 있겠느냐.”
이렇게 궁지에 몰린 한쪽이 상대의 배려와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협상을 정치학 교재에서 ‘합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하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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