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사흘째 울산에는 ‘억수로’ 비가 쏟아져내리고 있다.
그날 저녁, 김성욱(35)은 빗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뒤범벅이 됐다. 김성욱은 현대자동차 울산1공장에서 자동차 문짝 떼어내는 일을 7년 동안 했다. 도어탈착공정(CTS) 작업이다. 정규직과 함께 뒤섞여 일했다. 임금은 정규직의 70% 수준이었다. 노동부와 대법원은 그와 같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를 ‘불법파견’ 노동자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회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10년 넘게 회사를 상대로 싸워왔다. 그날 저녁 김성욱은 문짝을 떼는 대신, 문짝을 막았다. 금속노동조합 현대차지부(정규직 노조)와 아산·전주 비정규직지회가 회사와의 최종합의안에 ‘사인’하러 가는 걸 막기 위해 동료 100여 명과 함께 노조 사무실 문 앞을 지키고 앉았다. “불법파견을 인정 안 하는 회사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고 목 놓아 외쳤다. 김성욱은 현대차 울산비정규직지회(울산지회) 지회장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는 울산(890여 명), 전주(280여 명), 아산(220여 명) 3개 지회로 나뉘어 있다. 그날은 8월18일이었다. 울산지회는 그날의 일을 이른바 ‘8·18 사태’라고 부른다.
8·18 합의 vs 8·18 사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단초를 만들었다’. 8월20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뿌려진 현대차지부 소식지 제목이다. 정규직 노조는 8·18 노사합의를 “비정규직 투쟁 10년 마무리를 위한 큰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이경훈 현대차지부장은 “회사는 물 안 주고 나무를 말려죽이려는 작전이다. 악랄하게 헌법소원을 내어 시간만 끌면서, 촉탁직으로 신규채용을 늘려간다. 그런데 ‘조합원 전원 정규직화’란 원칙만 내세우다가 (비정규직들이) 죽도록 두는 게 맞냐”고 말했다. ‘쓰레기 합의안’이라는 울산지회 비판에 대한 반박이다.
현대차 비정규직은 ‘불법파견 투쟁’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그렇다. 2003년 비정규직 노조 설립, 2004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과 울산1공장 25일 점거농성, 2012~2013년 296일간의 철탑 고공농성. 그 과정에서 조합원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200여 명이 해고되고, 300억원의 손해배상소송·가압류를 당했다. 세계 5위 자동차업체의 명성에 오점으로 남을 일이다. 그런데 문제 해결의 첫 단추를 끼울 8·18 합의가 나왔다. 비정규직 노조의 다수를 차지한 울산지회가 거부한 ‘반쪽짜리’ 합의이긴 하지만, 모두 박수 치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물론 회사도 그 흔한 보도 참고자료 하나 내놓지 않았다. 현대차 관계자는 “노사 간 합의에서 100% 만족은 있을 수 없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긍정적으로 봐달라”고만 말했다.
[8월19일 아산]‘환영’도, ‘기쁨’도 없었다. 현대차 아산공장 앞에 있는 문화관 4층 대강당. 주간 근무를 마친 조합원 190여 명이 모였다. 같은 시간, 전주공장에서도 260여 명이 투표 용지 앞에 섰다. 전날 극적으로 타결된 ‘사내하도급 관련 최종합의’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하기 위해서다. 노사가 불법파견 문제를 놓고 특별교섭을 시작한 지 2년3개월 만에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토록 기다렸던 일이다.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윤아무개씨는 “처음으로 노조 총회 하면서 3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받았다. 원청인 현대차가 행사 준비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더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규직 전환’이라면 날아갈 듯해야 할 텐데,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총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허울만 좋은 ‘특별고용’ 조항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노사합의문의 내용이 처음 공개됐다. 첫째, 2015년 말까지 사내하청 노동자 중 4천 명을 ‘특별고용’한다.(※합의문에는 정규직 ‘전환’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근속연수를 하나도 인정받지 않는 ‘신규채용’ 대신 ‘특별고용’이라는 단어를 썼다. 만 13년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의 경력은 만 4년만 인정받는다. 근속연수의 3분의 1~4분의 1만 인정해준 셈이다. 정규직으로 들어갈 인원도 4천 명이 아니다. 2012년부터 이미 채용한 2038명이 있어서 실제로는 1962명만 뽑게 된다.) 둘째, 노사는 계류 중인 모든 민형사상 소송을 쌍방 취하한다.(※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근로자지위 확인소송과 체불임금 청구소송 취하서를 현대차지부에 제출하고, 특별고용이 확정되면 법원에 취하서를 낸다. 노동자들은 수천만~수억원의 체불임금을 포기한다. 정규직이라면 당연히 받았을 임금이다. 대신에 회사가 소송비용 보전금 200만원을 지급해준다. 울산지회는 합의하지 않았지만 울산공장 비조합원이 특별고용에 지원하면 똑같은 조건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 울산지회를 탈퇴하고 특별고용에 원서를 내는 것까지 막진 않겠다는 뜻이다.) 셋째, 2010년 이후 해고자 56명은 해당 하도급업체에 재입사한다.(※2003년 노조 설립이나 2010년 파업을 주도했던 핵심들은 못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넷째, 지역 및 공정 이동 등이 불가피하면 전환배치를 실시한다.(※공정을 재배치하면 회사는 불법파견 소지가 있는 공정을 모두 ‘블록’으로 따로 떼낼 수 있게 된다. 정규직과 뒤섞여 일하지 않는 사내하청 노동자들만의 별도 공정라인이 생기는 것이다.)
‘비공개 합의서’도 언급됐다. 아산·전주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이른 시일 안에 정규직으로 고용될 수 있도록 노사가 ‘최선’을 다하고, 2016~2017년 정규직 채용 인원의 60% 이상을 사내하청 노동자 가운데서 뽑도록 하는 내용 등이다.
합의 내용을 두고서 날선 공방이 오갔다. “특별고용이라는 말로 포장했을 뿐이지, 2012년부터 회사가 시행해온 (사내하청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신규채용과 대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해고자) “올해는 끝나겠지라는 희망으로 버티기 힘들다. 나와 가족의 인생은 최소한 책임져야 할 것 같다.”(대의원) 때론 울먹이는 호소도 이어졌다.
원칙보다는 실리가 통했다. 찬성률 57.1%. 투표 결과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전주도 71.6%의 찬성률로 합의안이 통과됐다.
하루짜리 단기계약직이 조립하는 차[8월20일 울산]외부와 내부, 그리고 내부에서도 서로를 등 돌리게 하는 노동 분열 전략은 통했다. 울산 비정규지회는 지난 7월 초 교섭 불참을 선언했고, 상급단체인 금속노조도 최종 교섭에서 손을 뗐다. 8·18 합의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오랜 ‘감정의 골’도 더 깊어졌다. 애초 회사는 고용유연성을 위해 비정규직 확대라는 손쉬운 방식을 택했고, 정규직은 고용안정의 방패막이로 비정규직을 활용했다. 비정규직이 노사 담합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현대차지부는 금속노조의 ‘1사 1노조’ 규약에 따라, 비정규직 노조를 통합하는 규칙 개정안을 세 차례나 부결시킨 바도 있다.
울산4공장에 근무 중인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지난해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에서, 비정규직에게 힘든 일을 떠넘겼다”며 공개적으로 통렬한 ‘반성문’을 썼다. 그는 “사내하청 문제가 설사 해결된다 하더라도 1400~1800명에 이르는 촉탁직이 앞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2년부터 회사는 한시적인 하청노동자 대신 단기계약직(촉탁직)을 직접 고용하기 시작했다. 개정된 파견법이 시행됨에 따라 한시적인 하청노동자도 불법파견에 해당하면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를 피해가기 위해서다.
촉탁직으로는 하루짜리 단기계약직도 있다. 몇 시간 교육받고 주말특근 자동차 생산공정에 투입된다. 이들의 고용 기간은 1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노조 가입 대상도 아니다. 회사 관계자는 “촉탁직은 휴직이나 산재로 인한 정규직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만 고용하고 있다. 추가로 인원을 늘리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촉탁직이 불법파견 논란을 뒤이을 ‘불씨’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회사가 고용유연성 확보를 위해, 사내하청 대신 촉탁직을 활용할 거라는 예상에서다.
현재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현대차 정규직은 4만7천여 명, 사내하청은 5500여 명, 촉탁직은 1500여 명이다. 회사는 불법파견을 순순히 인정하는 길 대신, 불법파견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길을 택했다. 8·18 합의를 계기로 회사가 말하는 이른바 ‘인력 선순환 구조’는 더 탄탄해질 전망이다. 정년퇴직 등으로 빠져나가는 정규직 자리를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해서 채우고,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는 최대한 줄여서 정규직과 뒤섞이지 않는 다른 공정에 재배치하겠다는 구상이다. 최병승 판결이 2012년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자, 회사 쪽은 공정 재배치 작업에 속도를 내왔다. 하나로 흐르던 컨베이어벨트에서 뚝 떨어져나온 ‘블록’들이 생겨났다. 사내하청 노동자들만 밀집된 공간이다.
소 취하하면 근속연수 인정하겠다는 반협박그 결과 2010년 8500명에 이르렀던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5500명 선으로 줄었다. 애초 2016년까지 정년퇴직자와 전주공장 2교대제 전환 등으로 3600여 명을 새로 채용했어야 하니, 신규채용이나 특별고용으로 사내하청 노동자를 4천 명 뽑는 게 회사 입장에선 손해가 아니다.
더구나 9월18일부터는 정규직과 같은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에게 임금을 차별하면 차별 금액의 3배 이상을 보상해줘야 하는 제도가 시행된다. 사내하청이 줄어들고, 블록화가 이뤄질수록 회사는 ‘진흙탕’에서 슬금슬금 빠져나올 수 있다. 그것도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배상 없이.
“현대차의 불법행위를 규명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노사합의에 의해 불법파견 문제가 허물어지는 건 잘못된 결론이다. 대법원 판결에서 명시한 불법파견 행위에 대한 책임조차 회사에 묻지 못했다. 회사는 불법파견 사실 자체를 인정하거나 사과하지도 않은 채, 노동자들에게 근로자지위소송 포기를 요구했다.” 현대차 생산 현장으로 돌아가 있는 박유기 전 금속노조 위원장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8월21일 서울 서초동]180cm가 넘는 건장한 사내의 어깨가 들썩인다. 정홍주(35)의 얼굴 위로 후드득 장대비가 퍼붓는다. 그는 이틀밤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노숙농성하며 사내하청 노동자 1569명의 근로자지위소송 판결 선고를 기다려왔다. 그런데 선고 15시간을 앞두고 갑자기 선고가 3주 뒤로 연기됐다. 재판부는 원고 중에 75명이 소 취하서를 내어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댔다. 그는 2002년 사내하청 노동자로 입사해 현대차 울산3공장에서 9년을 일했다. “11년 동안 싸워온 첫 결과물이 오늘 예정돼 있었다. 선고 연기 통보를 받고 눈물이 흘렀다. 목이 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법원의 선고 연기를 규탄하며 ‘정몽구 구속’을 외치는 구호 소리는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사이로 순식간에 스며들어버렸다. 법원이 이럴진대, 검찰이 먼저 정몽구 회장의 파견법 위반 혐의를 수사할 리 없다.
회사는 8·18 합의 이후 발빠르게 움직였다. “소 취하서가 공장 안에 돌아다니고 있다. 소 취하를 하면 신규채용 때 하나도 인정 못 받은 근속연수를 인정해주겠다는 반협박이다.” 사내 협력업체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다가 2012년 정규직으로 신규채용된 ㅁ씨는 “주변에 ‘내지 말라’고 말리고 있다. 회사가 불법파견을 해놓고선 선심 쓰듯이 정규직으로 채용해준다고 하는 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일 땐 몰라서 근로자지위소송을 못 냈는데, 이제라도 체불임금 소송을 낼 거다”라고 말했다. 회사는 또 이날 공장 안에 생산인력 채용 공고문을 붙였다. 현대차 변호인이 법원에 낸 ‘선고기일 연기신청서’를 보면, 현대차는 9월까지 400명을 뽑고 연말까지 600명을 더 특별고용할 예정이다. 이대로라면 정규직이 되기 위해 원서를 내려는 원고들의 소 취하 신청은 연말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불법파견 문제 해결의 새로운 사례
“현대차가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냈다. 불법파견을 피해갈 수단을 곳곳에 마련해놓은 거다. 한편에선 소 취하 등을 통해 시간 지연 작전을 펴면서 노동자들의 조급한 마음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에선 공정 재배치를 통해 불법파견 소지를 없애는 모든 과정이 거의 완성 단계다.”(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 현대차의 ‘새로운 생각’(new thinking)은 참으로 ‘올드’(old)하다.
아산·울산=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아산=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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