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채널에서 하는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보는데, 가끔 이 경기가 2006년 독일 월드컵인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인지 헛갈린다. 외국 선수들 면면을 조금 아는 편인데 그렇다. 공이 하프라인을 넘어서는 순간 화면에 잡히는 입간판의 도시 이름을 보고서야 ‘아, 여기가 남아공이구나’ ‘저기가 프랑스였구나’ 확신한다. 월드컵 골 장면들을 나름 외우는 편인데도 그렇다. 이상하다, 4년마다 열리지만 월드컵 경기가 마구 심장을 뛰게 하지 않는다. 온전한 몰입이 어렵다.
한국만큼 축구 경기 보기 좋은 나라도 없다는 얘기가 있다. 1만~2만원 들여서 케이블 채널 서비스에 가입하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등 보지 못할 정상급 클럽 경기가 별로 없다. 그러니 월드컵 경기에 나오는 선수들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부터 든다. 쟤가 팀에선 어떻게 했는데, 왜 저기선 저렇게밖에 못하나? 잉글랜드 대표팀이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면 몇 위나 될까?
한결같은 유니폼, 한결같은 한계이걸 과잉 세계화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축구 세계화의 부작용? 월드컵을 앞두고 신문에서 시리즈로 실리는 정상급 선수들의 면면부터 핥듯이 읽으면서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기다리던 옛날이 차라리 좋았단 배부른 생각도 든다. 겨우 프리미어리그 정도를 듬성듬성 보지만, 월드컵 경기 휘슬이 울려도 마구 설레지 않는다. 칠레의 알렉시스 산체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유명해지겠고, 포르투갈의 루이스 나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처럼 문전으로 치고 가다가 다시 허무한 마지막 터치로 기회를 날려버리겠지. 남자가 여장을 하거나 전신에 웃기는 분장을 하거나 전통 의상을 입거나, 관중 모습도 이제는 눈에 선하다. 명작이 아닌 영화의 재방송을 보는 느낌을 어쩔! 심하게 말하면, 이건 너무 많은 인터넷 후기를 봐서 정작 현지에 가서는 실물 확인 수준에 그치는 여행 같다. 몰입은 옅어지고 기시감은 강해졌다. 잘하면 16강 진출인 미국이나 못해도 16강 진출인 멕시코, 정말로 한결같은 유니폼처럼 정말로 한결같이 한계를 드러내는 나이지리아 같은 팀들을 보면, 좀 지겨운 반복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대사가 생각난다. 이것은 한국이 8회 연속 본선에 진출한 덕분에 생긴 후유증일까? 월드컵 단골손님인 국가들이 너무 익숙해져서 생긴 일이니 말이다.
둘 다 졌어야 할 한-러 경기선수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지쳐 보인다.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국내 리그에 유럽 리그까지 빼놓지 않고 출장한 선수들은 완벽한 컨디션이 아니다. 우리가 알던 그 선수가 아니다. 챔피언스리그 4강, 결승까지 뛰어야 했던 에이스들은 더 그렇다. 괴력의 기동성을 발휘하는 아리언 로번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 가벼운 부상이나 누적된 피로에 시달린다. 자본이 먼저인 세상이니 마음이 아무리 월드컵 콩밭에 가 있어도 천문학적 연봉을 주는 소속팀 경기를 소홀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별예선은 뜨거운 낮에도 열리므로 더워서 제대로 뛰지를 못한다. 이제 월드컵은 절정의 컨디션에 있는 최고의 선수들을 보는 대회가 아니다. 특히 잉글랜드 리그는 유난히 경기 수가 많다. 다른 유럽 리그에 견줘 컵대회가 하나 더 있다. 그래서 “잉글랜드는 게임 수를 줄이지 않으면 월드컵 우승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리그의 명성에 비해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부진한 이유 중 하나다.
“경기가 어땠어?” “둘 다 이길 자격은 없었지.” “그래서 비겼잖아.” “둘 다 졌어야 했어.” 한국만이 아니다. 넋 놓고 혀를 두르게 만드는 팀이 없다. 1998년 아트사커, 2002년 삼바축구, 2010년 티키타카처럼 ‘이건 뭐지’ 하는 축구가 아직은 없다.
“경기가 어땠어?” “둘 다 이길 자격은 없었지.” “그래서 비겼잖아.” “둘 다 졌어야 했어.” 한국과 러시아 경기가 끝나고 직장 동료와 나눈 조금 ‘독한’ 대화다. 경기 내내 골라인 아웃이 많고, 위협적인 찬스가 적었다. 첫 번째 경기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경기 내용이 충실하지도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원정 16강 진출도 했으니, 그것보다 목표가 높아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만이 아니다. 넋 놓고 혀를 두르게 만드는 팀이 없다. 1998년 프랑스의 아트사커, 2002년 브라질의 삼바축구, 2010년 스페인의 티키타카(탁구공이 왔다갔다 한다는 뜻의 스페인어)처럼 ‘이건 뭐지’ 하는 축구가 아직은 없다. 선수도 그렇다. 지난 월드컵과 이번 월드컵 사이에 최고의 선수는 바뀌지 않았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라이벌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지난 월드컵의 사비 에르난데스같이 놀라운 패싱을 하는 선수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쉬어가는 월드컵의 느낌이다.
그리고 세계 축구 평준화는 어디 갔나. 세기말, 세기초의 월드컵에는 아프리카 축구의 흥분이 있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이 8강,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세네갈이 8강에 오르며 이어진 변방의 돌풍이 있었다. 변방의 세력이 중심을 뒤흔드는 기운이 한동안 월드컵 열기를 더했다. 한국의 월드컵 4강 같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16강을 넘어 돌풍을 일으킬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팀은 찾기 어렵다. 1승을 하거나 16강에 오르더라도, 이 정도의 성과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물론 스페인이 떨어지고 잉글랜드가 탈락했다. 그러나 유럽 일부의 부진은 중남미 팀들의 득세로 메워질 확률이 높다. 이것은 월드컵 주최 대륙인 남미와 유럽이 ‘티키타카’ 하며 주고받아온 전통이다. 오랜만의 남미 월드컵이라 새로울 뿐 역사에 없었던 현상이 아니다. 비유컨대, 남경필 새누리당 후보나 김진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나 누가 경기도지사가 돼도 어차피 보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반복된 구도 안의 변주가 아니라 구도의 전복이 심장을 두근대게 한다.
주술에 걸릴 기회는 남았지만골도 많이 나오고 이변도 많은데, 왜 이렇게 재미가 덜하지? 이런 불만에서 브라질 월드컵 삐딱하게 보기는 시작됐다. 아직은 조별예선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월드컵 주술에 걸릴 기회는 남았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월드컵 재방송을 보다가 ‘여기가 남아공인지, 브라질인지…’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익숙한데 기억나지 않는다면 서글픈 일이다. 이미 그렇게 많은 월드컵을 지나쳤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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