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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야단 피하는 매뉴얼만

‘분명히 지시’ ‘당신들은 왜’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호통에 시스템 제대로 작동할까
참사 대응에서 ‘제왕적 리더십’의 한계 적나라하게 드러나
등록 2014-05-02 09:46 수정 2020-05-03 04:27
박근혜 대통령이 4월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책임자 엄벌’을 강조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4월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책임자 엄벌’을 강조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야구감독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가. 좋은 선수를 발굴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 감독해야 한다. 그런데 감독이 ‘나는 잘났는데 선수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의 서복경 선임연구위원의 말이다. 그는 지난 4월16일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진 뒤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 박근혜 대통령을 ‘야구감독’에 비유해 설명했다. 이어 “이번 사건이 이전 정부에서부터 축적된 문제라는 분석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유권자들이 왜 선거를 통해 정부를 바꾸겠나. 정부를 바꿨다는 것은 이전 정부와 다르게 새로운 정부를 책임지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6월4일 지방선거가 두려워서인가”

박 대통령이 지난 4월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28장 분량의 원고지를 20분 동안 읽어 내려가며 강조한 내용을 두고 비판이 무성하다. 그는 회의에서 “지난 4월7일 회의 때 3천 개가 넘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작동하는지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이번 사고를 보면 이 지시가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풀이하면, “나는 4월에 분명히 지시를 했다. 이 지시만 잘 이행했어도 이번 사고를 잘 수습할 수 있었는데, 당신들은 왜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이런 혼란을 일으키느냐”다.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다.

그동안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이런저런 현안에서 한발 물러선 자세를 견지해왔다. 그 결과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청와대의 채동욱 전 경찰총장 찍어누르기, 국정원 간첩 증거 조작 등 대형 사건이 줄줄이 터져도 대통령의 지지율은 견고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앞으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미국·영국·독일 등 외신들마저 박 대통령의 책임 회피 발언을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외신들은 박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무엇보다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였다”고 말한 것을 두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미국 은 4월21일 ‘박 대통령이 승무원들을 규탄하는 것이 옳았나?’라는 기사에서 “박 대통령이 정부가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선장과 승무원들을 공개석상에서 규탄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6월4일 지방선거가 두려워서인가?’라는 내용의 칼럼을 소개하면서 책임 회피를 통한 정치적 노림수를 지적하기도 했다. 영국 도 4월21일 “세월호 침몰은 아주 끔찍한 일이지만 이를 ‘살인’으로 볼 수는 없다”고 강조하며 “서방에서는 이러한 국가적 비극에 뒤늦은 대처를 할 경우 지지율은 물론이고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썼다. 독일 도 4월22일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여전히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이다. 청와대가 사건 초기부터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4월23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안보·통일·정보·국방’ 분야의 컨트롤타워일 뿐”이라고 해명해 더 큰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4월24일 “해양수산부의 위기관리 실무매뉴얼을 분석한 결과, 선박 사고에서 실질적인 컨트롤타워는 국가안보실이 맡아야 한다는 내용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부처별 혼선이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특공대 투입하라”는 깨알 지시에

국가적인 사건에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을 경우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는 바로 대통령이다. 물론 대통령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대통령 혼자 모든 것을 다 하라는 뜻이 아니다. 대통령의 ‘깨알 리더십’은 오히려 책임 주체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부처별 혼선을 빚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 사고 발생 직후 박 대통령이 해양경찰청장에게 “특공대를 투입하라”고 지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 정부에서 재난 관리를 담당했던 한 인사는 “당시 해경은 사고 지점을 뱅뱅 돌며 특공대 투입 방법을 최우선적으로 찾기 위해 고민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오히려 발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도 사고 초기 민간 잠수부 등이 구조 작업에 투입되지 못한 것에 대해 “특공대를 투입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랐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밑에 있는 사람이 일을 할 수 있게 자율권을 주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대통령이 ‘제대로 안 하면 엄벌하겠다’는 것만 강조하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이 제왕적 리더십에서 벗어나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밑에 있는 사람이 일을 할 수 있게 자율권을 주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대통령이 ‘제대로 안 하면 엄벌하겠다’는 것만 강조하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권 초반에 책임총리·책임장관제를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해서는 책임의 대표성이 생길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도 4월17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통령이 해난 위기 대처 전문가가 아님은 당연하다. 대통령의 역할은 위기 대처를 하는 기관들이 제대로 움직이도록 권한을 실어주고 기관 간 공조를 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후방 지원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각 부처에 독립성을 주고 고유의 역할을 맡기되 잘못됐을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거꾸로 부처가 알아서 해야 할 일에 참견하고 일이 잘못됐을 경우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겼다. 이번 사건을 통해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는 박 대통령 특유의 ‘제왕적 리더십’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유체이탈 화법’ 꼼수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이는 급격히 빠지고 있는 지지율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4월23일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6.5%를 기록해 참사 직후보다 14.5%포인트가 하락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진도 방문 직후인 18일 71%까지 상승했으나, 이번주 들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들의 전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총체적인 의미에서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이 불가피하다.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도 “그동안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만 적극 움직였다면 이제는 반대하는 세력도 적극 움직일 가능성이 커졌다. 지지율이 뒤처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대하는 세력도 적극 움직일 가능성”

박근혜 정부는 시험대에 올라섰다.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는 국가로서 오로지 ‘정치적 억압’의 기능만을 담당해왔다. 청와대가 전방위적으로 가담해 채동욱 전 검찰청장을 낙마시킨 것과 국정원이 증거까지 조작해가며 간첩을 만들어내려 한 것 등이 상징적인 사례다. 국민은 이렇게 거세고 강한 모습을 보였던 정부가 정작 국가의 공적 기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재난 상황에서 아무 역할도 해내지 못한 채 무능한 민낯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집단적 ‘트라우마’에 빠졌다. 과연 대통령은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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