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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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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직 예쁘다, 다 같이 사진 찍으러 가자”

단원고 3일간의 기록… 애통·분노·긴장감의 뒤섞임 속에서
‘슬픔의 의식’과 ‘회복의 노력’이 안간힘으로 밀고 당기며
등록 2014-04-30 14:33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책상 위에 하얀 국화꽃이 놓여 있다. 이문영 moon0@hani.co.kr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책상 위에 하얀 국화꽃이 놓여 있다. 이문영 moon0@hani.co.kr

통곡과 적막이 공존하는 땅이 경기도 안산에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울음이 쓸고 갈 때마다 고요는 안간힘을 짜내 뒤를 따랐습니다. 이 악물고 이룬 침묵 속에선 격렬이 펄펄 끓었습니다. ‘슬픔의 의식’과 ‘회복의 노력’이 밀고 당기며 하루의 시간을 쪼개고 있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학교에 왔다.”

4월22일. 탈진한 엄마에게서 울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문을 들어설 때부터 대답 않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딸을 실은 운구차와 가족들을 태운 버스가 완만한 경사길을 올라 운동장에서 멈췄습니다. 엄마는 “못 보낸다”며 목 놓았고, “가지 말라”며 애원했습니다. 차가운 물속에서 퉁퉁 불었다가 몇 시간 뒤면 뜨거운 불 속에서 재가 될 딸의 몸이었습니다. 학교는 이별로 가는 마지막 문턱이었습니다.

마지막 등교

“여기가 끝이야. 여기 나가면 더는 못 봐.”

엄마는 한 걸음의 보폭이 안타까웠습니다. 딸이 걷고, 뛰고, 웃고, 찡그리며, 색색의 표정으로 수놓았을 공간이 너무 작고 짧았습니다. 부축을 받으며 아끼고 아껴가며 걸었습니다. 딸이 공부하던 2학년 교실 앞에 섰을 때 엄마는 무너졌습니다.

교실마다 아득한 꽃밭이었습니다. 주인을 잃은 책상 위에서 국화들이 활짝 피었습니다. 봄 햇살을 받아 찬란했고, 꽃잎을 힘껏 펼치며 생동했습니다. 피지 못하고 져버린 아이들 수만큼 꽃은 하얗게 만개했습니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오전은 오열로 꽉 차 있었습니다.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학생과 교사들의 발인이 시작(4월19일 1명, 20일 6명, 21일 5명, 22일 11명, 23일 25명, 24일 14명, 25일 23명…)된 뒤 학교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마지막 등교’와 울음소리로 빽빽했습니다. 꼬리를 무는 장례 차량의 통한과 비통으로 운동장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한 학생의 아버지는 학교 본관 앞에 마련된 노제상에 절하며 학교가 울리도록 통곡했습니다. “아버지가 미안하다”며 흐느꼈고, “내 아들 살려내라”며 분노했습니다.

책상과 의자는 눈물에 속한 영토였습니다. 부모는 아들딸의 책상과 의자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손으로 쓸고 얼굴로 비볐습니다. 나무 책상과 의자는 아들딸이 세상에 남긴 온기의 부스러기였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의 교과서와 공책에 얼굴을 묻고 책장 사이에 새겨진 시간과 기억을 수습했습니다. 칠판 옆에서 학급 공지용 화이트보드는 적고 있었습니다. ‘과제: 꼭 돌아오기.’

4월23일. 운구 행렬이 지나간 오후 학교는 적막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소리가 침묵을 깰까 두려워 모두가 말소리를 죽여 이야기했고, 발소리를 죽여 걸었으며, 숨소리를 죽여 호흡했습니다. 담 너머 단원중학교의 수업 종소리만 간간이 학교로 건너왔습니다.

학교엔 단원고와 인근 학교 학생들이 써붙인 메모가 가득했습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부탁과, “버텨만 달라”는 애원과, “어서 살아 나오라”는 명령으로 뒤덮였습니다. 배에서 생존한 학생은 75명입니다. 19명이 구조된 반이 있는가 하면(1반 19명, 2반 11명, 3반 8명, 4반 9명, 5반 9명, 6반 13명), 단 한 명이 살아남은 반(7반 1명, 8반 2명, 9반 2명, 10반 1명)도 있습니다. 250명의 학생이 죽거나 아직 바닷속에 있습니다(4월24일 오후 1시 현재). 단원고 건물 벽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포개진 메모지들이 봄바람에 쓸려 사르르 떨었습니다.

3학년 선배는 사고 첫날 생존자 명단에서 ㅈ의 이름을 발견하고 안심했습니다. 그에게 ‘SNS 문자 답변을 빨리 하지 않는다’며 핀잔을 주던 후배였습니다. 얼마 안 돼 ㅈ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선배는 종이에 써 후배의 교실 창문에 붙였습니다. “어디에 있는 거야. 맨날 나한테 답장 늦는다고 하더니 너는 언제까지 연락 없을 거야?”

창문틀 빵에도 담배 한 개비에도

선배 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ㅁ에게 화를 냈습니다. “임(인)마, 너 형 보고 싶다며. 그럼 빨리 나와야지. 나 계속 전화하는데 자꾸 (네 휴대전화에서) 새소리만 들려. 나 그 소리 그만 듣고 싶어. 이제 전화 좀 받아.” 연극부 후배는 ‘오빠’ 소리 듣고 싶어 하던 ㅈ에게 ‘선배’라고만 불렀던 일을 후회했습니다. “돌아오면 질리도록 오빠라고 해드릴게요. 그니깐 제발….”

미처 하지 못한 말과, 표현하지 못한 마음과, 이루지 못한 관계와, 완성하지 못한 사랑이 글자들 위에서 소리 없이 웅성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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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차웅아, 극락왕생하기 바란다.”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사망한 정차웅군의 교실 칠판에선 그를 기리는 분필 글씨가 큼지막했습니다. 교실 문마다 추위를 견디라며 핫팩이 붙어 있었고, 창문틀에 놓인 빵에도 글이 딸려 있었습니다. “빨리 와서 먹어요. 음식 버리면 안 돼.” 담배 한 개비가 눈에 띄었습니다. “돌아와서 담배 한 대 피워야지. 돌아오면 피워도 돼. -형.” 교사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도 간절했습니다. “이거 다 몰래카메라죠? 이거 꿈인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주세요.” 세월호 침몰은 이 초록의 계절이 감당할 수 있는 참혹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짧게 썼습니다. “꽃 아직 예쁘다. 다 같이 사진 찍으러 가자.”

어른과 기성을 향한 극도의 불신은 선명했습니다. “눈뜨고 아이들을 잃는 이 나라가 너무 밉고 말도 안 된다”고 했고, “나중에 성공해서 다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언니 오빠들에게 어른들의 말만 따르라고 했나요”…. 떠들썩한 수습 대책 발표와 구조 현장 생중계 속에서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그들은 믿음을 거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 흘러가는 방향을 보면 좋은 세상과 나쁜 세상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슬픔을 담아낼 언어도, 이 격렬한 분노에 변명할 염치도, 한국의 정치와 행정과 언론은 갖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3학년들의 등교 재개(사고 뒤 9일째)를 준비하며 학교는 침묵 속에서 부산했습니다.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들이 3학년 교실을 중심으로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학교 시청각실에선 소아청소년 정신의학 전문가들이 자녀들의 상처와 대면하는 방법을 부모에게 조언했습니다.

이날 학교 인근의 안산올림픽기념관엔 임시 합동분향소가 마련됐습니다. 분향소 정면엔 영정 사진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 얼굴들이 모셔졌습니다. 밤늦게까지 수백m를 기다려 조문을 마친 시민들은 길 건너 단원고 앞까지 걸어와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안산은 온통 진도였습니다.

“아이들이 오히려 선생님을 걱정하네요”

저녁 늦게 한 안산 시민이 학교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차라리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더라면….” 그는 흐느꼈습니다. “제주도에 처음 간 아이도 많았을 텐데 좋은 곳 보고 좋은 것 먹고 죽었다면 덜 원통했을 걸….” 그도 고등학생 딸이 있다고 했습니다.

4월24일 아침. 3학년 학생들의 등교가 시작됐습니다. 진입로로 후배들의 영구 차량이 오갈 때마다 학생들은 멈춰서서 조의를 표했습니다. 교문에서 맞는 선생님 품으로 뛰어가 안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3학년 505명 중 480명(유족·장례식 참석자 등 24명 공결 처리)이 등교했습니다.

학교 안은 긴장감으로 팽팽했습니다. 장례의식과 수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학교의 공기는 쇳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아침 8시20분에 첫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학생들은 상담전문가들과 상처를 치유하고 떠나보내는 이야기(교육부와 경기도교육청은 학교 안에 상담심리치유센터 설치·운영)를 나눴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표정 없이 생각에 잠긴 학생이 많았습니다. ‘단원고 회복 프로그램’이 가동됐습니다. 학생·교사·학부모를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교육과정이 집중 지원(단원고 유경험자 중 학생·학부모가 원하는 교사 우선 충원, 선택교과 다수 개설 등)될 예정입니다. “아이들이 오히려 선생님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첫 수업을 마친 김학미 3학년 부장교사는 전했습니다. “교사들이 큰 힘을 얻고 있다”며 그는 울먹였습니다.

지금처럼 학교가 애달프고 간절한 적은 없었습니다. 휴교 조처가 있은 뒤에도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를 오갔습니다. 3학년 학생의 제안으로 촛불집회를 열었고, 선후배와 선생님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는 글을 썼으며,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이들의 마지막을 배웅했습니다. 서로 만나 이야기하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함께 라면을 나눠 먹다가, 가끔 옛날처럼 수다도 떨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힘에 의지해 생에 두 번 다시 없을 비극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혼자 울고 아파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감정은 같은 상처를 공유한 친구들 속에서 표출해야 치유가 빠르다고 합니다. 바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소중한 이들에게 동아줄이 되기 위해서라도 학교는 회복되고 분주해져야 합니다. 1학년과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2학년 13명은 4월28일부터 등교(구조된 2학년들은 ‘사고 뒤 4주께부터 등교’ 논의)가 예정돼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국가는 사람의 총합으로서 가시화됩니다. 사람 가운데가 아니면 국가가 있어야 할 곳은 없습니다. 단원고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슬픔의 최전선입니다. 단원고의 치유는 세월호 침몰의 상처를 우리 사회가 극복해낼 수 있을지 가늠하는 시험대입니다. 단원고가 회복되지 않으면 누구의 충격도 회복될 수 없습니다.

3학년 수업 중에도 운동장에선 자식 잃은 부모들의 통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업이 없는 교사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가족을 맞았습니다. 운동장 입구부터 본관 건물 앞까지 교사들 수십 명이 살아남은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도열했습니다. 누구도 가족의 얼굴과 학생의 영정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유족과 학생들 앞에서 그들은 울음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소리 높여 통곡할 때마다, 교사들은 소리 죽여 흐느꼈습니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온 힘을 다해

교사들도 피해자였습니다. 세월호를 탄 교사 14명 중 12명(스스로 목숨을 끊은 강민규 교감 포함)이 사망했거나 실종됐습니다. 교사들의 휴대전화엔 해경들이 신상 확인을 요청하며 타전하는 제자들의 주검 사진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부모들보다 먼저 학생들의 처참한 모습을 받아들고 그들의 마음은 찢겨 폐허가 됐습니다.

학생들 몇 명이 선생님들 뒤에서 눈으로 유가족을 맞았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2학년 교실을 들여다보고는 한숨짓고 눈물지었습니다. 문이 닫힌 2학년 교무실 옆에서 우는 친구를 토닥이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숨죽인 하루였습니다. 아무도 제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학교에서 뒷산의 까치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습니다.

일상이란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껍질 얇은 달걀처럼 두 손으로 감싸쥐고 마음 다해 보듬어야 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는 처참 앞에서야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이날 교사들은 학교 주위 곳곳에 흩어져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배웅했습니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온 힘을 다해, 학교는 견디고 있었습니다.

안산=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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