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에게 손자는 변변찮은 찌질이다. 놀고 먹는 데만 관심 있는 손자는 농사일이며 집안일에 젬병이다. 손자도 할아버지가 마뜩잖다. 제사를 지낼 때도 해병대 군복을 입고 ‘필승’을 외치고, 입에 ‘빨갱이’를 달고 사는 수구꼴통 노인네다. 그래도 지긋지긋한 할아버지의 곁을 손자는 떠날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땅 투자로 일군 재산 30억원을 물려받기 위해서다. 핏줄이 당기는 할아버지도 유산을 미끼로 손자를 묶어둔다. 그저 암에 걸린 할아버지가 빨리 죽기만을 손자는 바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갈수록 팔팔해지기만 한다. 참다 못한 손자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또래 여성에게 할아버지를 유혹한 뒤 ‘복상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세대 소속감’ 높아진 계기는 급격한 고령화지난해 8월 개봉한 영화 의 줄거리다. 나약한 20대 손자와 꼰대인 70대 할아버지가 자산과 부양 의무 교환을 놓고 벌이는 황당무계한 갈등이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영화적 설정의 독특함을 걷어내면 세대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이 읽힌다. 경험과 가치관이 다른 청년세대와 노인세대 간 긴장이 기존 정치적·정서적 ‘세대 갈등’ 구도를 넘어서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생존경쟁으로 치닫는다고 보는 것이다. ‘세대전쟁론’적 인식이다. 정말 한국에선 ‘세대 결투’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세대 문제를 연구해온 다수의 전문가들은 세대 갈등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세대 간 충돌 지점이 이념·정치·문화 분야에서 경제적 이해관계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의 분석이다. “과거 세대 갈등은 주로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의 일시적 반항과 반발을 길들이고 무마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정서적 긴장과 충돌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엔 누가 제한된 자원을 점유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갈등이 표출된다. 부모의 정년을 연장하면 자녀세대의 취업 기회가 타격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청년세대와 노인세대가 재화나 경제적 기회를 두고 경쟁의식을 느끼게 된 원인은 ‘불안’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모든 세대는 생애주기에 따라 여러 불안을 단계적으로 경험해왔다. 비싼 등록금, 취업난, 적은 소득, 불안정한 주거, 높은 사교육비, 빈곤한 노후 등을 비슷하게 경험한 각 세대는 공동운명체 의식을 갖게 된다.
세대전쟁론을 부추기는 건 정부다. 표가 안 되는 청년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밀어붙이며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까닭이다. 기초연금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을 청년세대에게 떠넘기는 꼼수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청년세대, 노인세대의 ‘세대 소속감’이 높아진 계기는 급격한 고령화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늙어감에 따라 청년세대와 노인세대는 젊거나 늙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을 덜 받거나, 부양 부담을 더 지게 됐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렇게 풀이했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이식되면서 한국 사회 구조가 빡빡해졌다. 이 와중에 몫을 누가 가져가느냐의 갈등이 심화됐다. 계층 갈등과 함께 세대 갈등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모든 연령에서 실업률이 호전되고 있는데, 청년 실업률만 심화된다면 세대 갈등의 소지가 된다.” 세대가 계급이나 젠더처럼 사회 불평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강한 가족주의, 세대 갈등 완충지대청년세대와 노인세대가 고달픈 삶을 살면서 경제적 득실에 민감해지긴 했지만, 이들이 세대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서울대 사회학과 연구팀이 2012년 15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세대 갈등이 매우 심각하다’거나 ‘심각한 편이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20대 이상 모든 세대에서 55~62%로 나타났다. 모든 세대가 최근의 세대 갈등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경제 현안으로 들어가면 세대 간 첨예한 인식 대립이 나타나지 않는다. ‘청년 무주택자를 위해 집값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비율이 모든 세대에서 70% 안팎으로, ‘노년층 복지를 위한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주장에 찬성하는 비율은 40% 안팎으로 엇비슷하게 나타났다. 연구를 책임진 박경숙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한국 특유의 강한 가족주의가 세대 갈등의 완충지대가 돼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가족 안에서 소득·자산의 분배가 비교적 잘 이뤄지는 덕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세대 간 불평등을 덜 느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사회보험료를 더 내더라도 공적연금 확대에 찬성하는 건 연금 덕에 부모를 부양하는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세대 갈등이 촉발될 경제사회 구조는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세대 갈등은 더 심화될 수 있다”고 박 교수는 전망했다.
세대전쟁론에서 선제공격에 나선 세력은 청년세대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린 산업화 세대에 비해 삶의 조건이 열악한 청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논리에서다. 청년들의 삶이 고되기는 하다. 무엇보다 고용 환경이 척박하다. 지난 2월 전체 취업자 수는 12년 만에 최고로 증가했다. 이 와중에도 청년 실업률은 2001년 이후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통계청).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저임금 일자리인 탓에 소득 기반은 약한데 사회적 책임은 무겁다. 노후의 최후 안전판인 국민연금만 보더라도, 1943년생 만 70살 남성 가입자는 낸 보험료보다 2.8배 많은 연금을 타고 있지만, 1990년생은 이 비율이 1.62배로 떨어진다(한국재정학회).
정부, 기초연금 비용 청년에게 떠넘겨그러나 탐욕스러운 노인이 자신의 몫을 노린다고 청년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들의 생활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노인이 허다하고, 국민연금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그 결과 2012년 기준 65살 이상 노인 빈곤율(중위가구 소득의 50%에 못 미치는 가구 비율)은 48.4%로, 전체 근로연령층(만 18~64살) 빈곤율(12%)의 4배에 이른다(통계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주은선 경기대 교수(사회복지학)의 설명은 이렇다. “한국은 모든 세대에 대한 복지 지출이 적다. 복지예산 규모가 매우 낮은 상황에서 노인복지 예산과 청년복지 예산의 비중을 비교하는 것은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인복지로의 사회복지 지출 집중은 연금제도가 발달한 서구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제 한국은 정부의 전체 지출 가운데 사회보장비(실업자·노약자·아동 등의 최소 생활 지원에 들어가는 비용)의 비중이 13.1%(2011년 기준)로, OECD 회원국 평균(35.6%)을 크게 밑돈다. 청년세대와 노인세대가 밥그릇 싸움에 전력투구한다고 보기엔 그릇에 담긴 밥이 너무나 보잘것없는 상황이다.
“높은 부동산 가격, 불안정한 고용 구조 등 구조적 문제가 마치 세대 갈등 때문인 것처럼 호도되면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행정학)
세대전쟁론을 부추기는 건 정부다. 표가 안 되는 청년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밀어붙이며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까닭이다. 대표적으로 기초연금이 있다. 박근혜 정부는 모든 노인에게 매달 20만원씩 준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만약 정부의 수정안대로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기초연금이 노인에게 차등 지급되면 40대는 평생 1541만원, 30대는 2782만원, 20대는 4260만원을 손해볼 것으로 추정된다(국회예산정책처). 기초연금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을 청년세대에게 떠넘기려는 꼼수다. 청년단체들이 처음으로 연석회의를 꾸려 집단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인의 주 소득원인 이자·배당 소득, 임대소득 등은 가만히 놔눈 채 청년의 주 소득원인 근로소득세 부담만 늘린 정부의 세제개편안과 노인이 보유한 집값을 떠받치려고 청년들이 빚내어 무리하게 집을 사게 하는 부동산 정책도 세대 간 형평성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꼽힌다. 이태형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대표는 “청년들이 정부의 기초연금안이나 세제개편안에 반대한다고 해서 ‘청년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인식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도 노인이 되기 때문에 노인을 위한 공적연금과 사회안전망을 든든하게 하는 데 적극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낸 만큼 나중에 돌려받을 것이란 신뢰도 주지 않으면서, 20대의 몫을 빼앗아 60대에게 주려는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정책 실패 책임 떠넘기기도 편리세대전쟁론은 기득권에 남는 장사다. 자원 분배는 ‘세대 간 제로섬게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부, 정치권, 기업은 일자리와 각종 복지제도를 확대해나가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청년 일자리를 늘리려면 기존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야 한다’는 논리는 정부와 기업이 세대전쟁론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사례다. 쓸모는 이뿐이 아니다. 정부의 정책이 실패할 경우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청년세대나 노인세대에게 떠넘기기도 편리하다. 정부가 기초연금 수정안이 결국 ‘세대 간에 불공평하다’는 여론에 밀려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를 반대한 청년을 ‘불효자식’으로 만들면 끝이다. 물론 세대전쟁론이 자주 동원될수록 가난한 여러 세대가 힘을 모아 정치를 변혁시킬 수 있는 동력은 약화되고, 사회연대 의식도 산산조각 나게 마련이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행정학)는 “높은 부동산 가격, 불안정한 고용 구조 등 구조적 문제가 마치 세대 갈등 때문인 것처럼 호도되면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체 없는 세대전쟁론은 모든 세대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왜곡된 분배 구조는 감추고, 사회안전망 확대 요구는 묵살할 수 있는 기득권의 기막힌 묘수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참고 문헌박경숙 등 (2013), 박종훈 (2013), 박길성 (2013), 함인희 ‘세대 갈등의 현주소와 세대 통합의 전망’(2013),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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