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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9일 오후 2시20분 서울 용산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1561열차(익산행)는 3시간18분 만에 충남 장항역에 도착했다. 노란색 기둥들이 떠받친 아치형 지붕이 승강장을 덮고 있었다. 계단과 터널을 지나 들어선 역사는 깔끔한 현대식이었다. 대합실(맞이방)은 50명이 족히 앉을 만큼 넓고, 출발·도착 시각을 알리는 전광판은 큼직했다. 하지만 썰렁했다. 타고 내린 이용객을 다 합쳐도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역사를 나오니 더 썰렁했다. 식당도, 다방도, 모텔도 아무것도 없었다. 벌판만 저 멀리까지 내다보였다. 2007년 장항∼군산 간 철로가 생기면서 종착역(장항선)의 기능을 잃었다지만 참으로 허망했다.
장항시, 역의 쇠락과 함께 천천히무궁화호 열차에서 함께 내린 할머니가 역사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장항읍으로 데려다줄 차편을 기다린다고 했다. 새 장항역사는 더 이상 ‘장항’이 아니었다. 이름만 그대로일 뿐 역사는 장항읍내에서 4~5km나 떨어진 서천군 마서면에 있었다. 역사에서 읍내로 들어가려면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야 했다. 버스는 1~2시간 간격으로 다녔고, 택시 요금은 6천원이 넘었다. 용산~장항 간 요금(1만4200원)과 비교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경로 할인(9900원)이라도 받았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지경이다.
장항은 장항역과 운명 공동체였다.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조선의 수탈 기지로 탄생한 장항은 1931년 장항역이 장항선의 종착지로 세워지면서 관공서와 학교, 공장이 들어섰다. 1936년 장항제련소, 1937년 항구가 완성됐다. 도시는 번창했고 풍요로웠다. 광복 뒤에도 장항역과 장항제련소, 장항은 도시 경제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1989년 제련소가 문을 닫으면서 도시는 활기를 잃었다. 2008년 장항역이 마서면으로 옮겨가고 장항이 군산항에 밀려나자 쇠락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날 오후 6시쯤 도착한 옛 장항역은 으스스했다. 한 달에 두서너 차례 한솔제지 공장을 오가는 화물차를 맞는 ‘장항화물역’으로 바뀌었는데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는 열차가 이곳에 멈추면 이용객들이 우르르 내려 걸어서 7분 거리인 장항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향했다. 서해 바다 너머로 지는 아름다운 해를 바라보는 인파가 북적이던 옛 정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역전 식당은 문을 닫았고 ‘편의점’이란 간판을 내건 허름한 가게는 물건이 텅텅 비어 있었다. 편의점 여주인은 “군산·서천 주민들이 몰려들던 장항역은 옛말”이라고 했다. “장항 주민들도 멀리 떨어진 새 장항역을 찾지 않고 옛 장항역 상권도 다 죽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읍내를 혼자 걸어다니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허물어질 듯 낡은 건물이 곳곳에 서 있고 자물쇠로 굳게 잠긴 가게 앞에는 우편물과 광고물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장항읍사무소에서 가까운 택시 정류장에는 택시 대여섯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택시 기사는 “2시간 만에 손님을 태웠다”고 했다. 그는 침체된 지역 경제와 공동화 현상을 탓했다. “장항은 광주와 함께 읍으로 승격될 만큼 한때 번창했다. 장항역이 떠난 뒤 관공서와 젊은이들도 빠져나가버렸다. 조만간 리로 강등될 판이다.” 택시 기사의 푸념처럼 1970년대 3만5천 명에 이르던 장항읍 인구는 1만5천 명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일제 강제 수용한 폐선 부지, 시민에게로”장항처럼 철도가 도시의 운명을 뒤바꾸는 일은 흔하다. 100여 년 전 철도가 이 땅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그랬다. 철도길이 비껴간 전통도시는 급격히 몰락했는데 공주가 대표적이었다. 개항 이전 공주는 충청권의 행정 중심도시이자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일제가 경부선·호남선을 부설할 때 공주가 아닌 대전을 교차지점으로 선택하면서 운명이 엇갈렸다. 양대 간선철도가 지나간 대전이 신흥도시로 솟아오른 반면 공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상업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물론 행정 중심지 기능도 점차 상실해 1932년 충남도청까지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갔다.
일제는 또 철도역을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잡았다. 일본에서 철도역과 도시 중심부 사이의 평균거리가 0.6km인 데 비해, 한국은 1km였다. 요즘처럼 시가지가 이미 개발돼 땅값 부담이 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는 철도역 주변의 금싸라기 땅을 일본인이 차지하도록 한 전략이었다. 일본은 철도역 터를 넓게 책정하고는 그 일대 농민을 내쫓았다. 그러고는 일본인에게 그 땅을 싼값에 넘겨버렸다. 철도역 주변으로 새로운 도로가 나고 도시시설이 들어서자 땅값은 치솟았다. 일본인들은 자연스레 돈방석에 앉았다. 철도역이 이전되면 새 역사 주변의 땅값이 3~4배 뛰는 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한국근대사를 철도로 조망한 을 쓴 박천홍씨는 “자본은 교통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철길, 철도역 이전이 기존 상권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다. 도시 계획을 세울 때 이러한 철도의 힘을 고려해야 했다”고 말했다.
철도, 철도역 이전은 전국 곳곳에서 논쟁을 낳고 있다. 동해남부선(부산진~포항) 복선전철화로 새 노선이 개통되면서 지난해 12월부터 열차 운행이 중단된 부산 해운대~송정 간 옛 철길도 그랬다. 북태평양 해안을 끼고 달리는 이 구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길로 꼽혀왔다. 한국철도시설공단과 부산시는 폐선된 9.8km 철길을 자전거길과 산책로로 만들고, 특히 바다와 해안절벽으로 이어지는 미포~송정 구간(4.8km)은 레일바이크 등 민자사업을 유치할 것이라고 밝혔다(그린레일웨이 조성사업). 이를 위해 폐선 부지의 지역 주민 통행을 차단하고 철길을 철거하는 등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게다가 옛 해운대역사 부지 2만6400m²(8천 평)도 민자사업으로 개발한다며 모집 공고를 냈다.
하지만 지역에선 이러한 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상업화한다는 이유에서다. “폐선 부지는 80년 전 일제 수탈기에 강제 수용당했던 지역 주민의 땅이다. 이제라도 주민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돌려줘야 한다. 수익사업의 장으로 전락시키고 주민의 출입을 제한하는 민자사업에 반대한다.” 부산 해운대구의회 ‘동해남부선 폐선 부지 시민공원 조성 특별위원회’(동해남부선 특위)를 이끄는 박욱영(57) 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철도시설공단의 난개발을 막아 “토건업자의 이익보다 주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자”고 제안했다. 박 위원장의 발의로 해운대구의회는 폐선 부지 시민공원화 결의문을 채택했지만 철도시설공단 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자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앞서 철도시설공단은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Switchback) 구간도 시장의 손에 넘겼다. ‘자세를 반대로 바꾸다’라는 의미의 스위치백은 급경사가 많은 산악지형에서 열차를 운행하기 위해 철길을 ‘갈지(之)자’형으로 놓는 걸 말한다. 열차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지그재그 방식으로 운행된다. 스위치백은 1963년 고도 차이가 435m에 달하는 영동선(영주~강릉) 도계역~나한정역~흥전역~통리역 구간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설치됐다. 열차가 속도를 줄여 뒤로 달리는 이색 체험을 이용객들은 만끽했다. 스위치백을 경험하려고 영동선을 3차례 탔다는 주연희(65)씨는 “앞으로 뒤로 천천히 움직이는 기관차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게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2년 6월 스위치백은 영동선에서 사라졌다. 산속을 뚫어 루프(Loop)식 나선형 철길을 놓은 솔안터널(16.24km)로 바뀌었다. 운행시간은 20분 정도 줄어들었다.
운행시간 20분 줄이려고스위치백 구간은 관광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이원스위치백리조트가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삼포리 일대 72만m²(22만 평)에 655억원(철도시설공단 3억원 포함)을 들여 철도 체험형 리조트를 건설한다. 착공식은 지난해 5월에 열렸다. 강원랜드가 100% 출자해 설립한 하이원스위치백리조트는 도계읍과 통리역 사이 16.5km 스위치백 구간 인근에 인클라인 철도(강삭철도)와 레일바이크, 증기기관형 관광열차, 탄광체험 갱도를 활용한 유리테마조형공원, 숙박시설(30객실) 등을 세울 계획이다. 인클라인은 로프로 열차를 끌어올리는 방식인데 스위치백 이전 1940~50년대에 활용됐다.
박근혜 정부는 폐선 부지를 개발할 뿐 아니라 아예 철도 노선도 민간에 개방할 계획이다. 철도 민영화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6월26일 발표한 ‘철도산업 발전방안’을 보면, 공익서비스보상(PSO) 대상(8개 벽지 노선) 중 원가 투입 대비 3배 이상의 적자율을 보이는 노선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운영을 중단하고 민간에 개방한다고 돼 있다. 정선선(아우라지~민둥산)과 진해선(창원~통해)이 우선 검토 대상이다. 민간기업이 참여하지 않으면 운영 책임을 지방자치단체에 넘길 예정이다(제3섹터 방식). 또 부전(부산)~울산, 소사(경기 부천)~원시(안산), 성남~여주 등 건설 중인 노선은 코레일과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입찰에 부쳐 정부보조금을 적게 받는 운영자에게 맡기겠다는 구상이다(최저보조금 입찰제).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은 “비록 적자가 나더라도 지역의 균형발전, 국민의 보편적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역 철도 노선을 유지하는 게 공기업의 책무다. 정부가 이를 저버리겠다고 선언했으니 일반 열차(무궁화호·새마을호)가 운행되는 지역의 주민들이 최대 피해를 입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주민의 피해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코레일이 농촌 지역의 소규모 철도역을 잇따라 무인화하거나 폐쇄하고 있다. 코레일은 2007년부터 5년 동안 한 해 20여 곳의 철도역을 줄여왔다. 하루 승객 100명 미만의 간이역이 주로 퇴출 대상이었다. 목표는 전국 600여 개 철도역 가운데 300여 개를 ‘정비’하는 것이다. 경제 논리에 떠밀려 철도역이 무인역으로 바뀌면 이용객이 더 줄어들고 끝내 문을 닫는 수순을 밟는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 빠진 개구리처럼 대부분의 철도역은 저항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매표소 없는 역, 버스는 타기 힘든 역지난해 10월 무인역으로 바뀐 영동선 임기역을 지난 2월6일 방문했다. 경북 봉화군 소천면 임기리, 두음리, 서천리 등 5개 산골마을 주민 700여 명이 이용한다는데 폐가처럼 스산했다. 화장실도 매표소도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매일 아침 8시56분과 저녁 7시49분에 상·하행선이 정차하지만 역무원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갑상선 질환을 앓아 서울 청량리로 병원을 다니는 권영순(82) 할머니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임기역에) 매표소가 없어지니까 아주 고약해. 기차를 타면 (경북) 영주 가는 차표는 (승무원이) 열차 안에서 끊어줘. 근데 서울 차표는 안 돼. 영주역에서 끊으면 자리가 없고. 팔십 넘은 노인네가 어떻게 청량리까지 몇 시간을 서서 가나. 석 달 전에는 영주역에서 오도 가도 못했잖아.” 임기역에 역무원이 있을 때는 영주∼서울 구간 열차표를 며칠 전에 예약할 수 있어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열차 이용이 불편한 탓에 권 할머니는 병원 방문을 한 차례 미뤘다. 대신 서울에 사는 딸이 약을 우편으로 보냈다.
임기역과 마찬가지로 무인역으로 바뀐 이웃 현동역에 사는 최노미(83) 할머니도 “열차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버스를 타려면 고갯길을 30분이나 걸어야 해. 눈이 오면 아예 못 움직여. 춘양으로 나가서 갈아타야 하고, 멀미해서 어지럽고 아주 힘들어.” 대구와 부산에 사는 아들·딸을 만나려고 열차를 이용하는 최 할머니는 “열차가 (버스보다) 편하고 싸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래도 “(철도가) 많이 밑지면 어쩌냐”고 걱정했다. ‘적자’ ‘비효율화’라는 단어는 산골 할머니의 마음도 부담스럽게 했다. 사회공공연구소 송유나 연구위원은 “공기업이 공공재를 공급한 뒤 조세수입을 통해 적자를 보전하는 것은 비효율이 아니라 사회의 소득재분배 과정이다. 공공성 영역에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사회적 양극화만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김주만 철도노조 영주본부 교육선전국장은 무엇보다 안전사고를 우려했다. “영동선은 일제 때 만들어진 노후 철길인데다 역사 앞쪽에 건널목이 있다. 눈도 귀도 어두운 어르신들이 곡선 철길에서 자칫 안전사고를 당할까봐 걱정스럽다. 임기역과 현동역의 무인화로 춘양~분천 간 21km 거리에 안전인력이 배치되지 않게 됐다.”
지역 주민이 힘을 모으면 다른 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임기역·현동역과 함께 코레일이 무인역으로 바꾸려던 전남 화순 이양역과 무안 몽탄역 등은 ‘생존’했다. 전남도의회가 지난해 9월 ‘철도역 무인화 및 폐쇄 계획의 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결의안은 “코레일이 철도의 공공성과 대중성을 외면하고 농촌 지역 교통약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정책을 밀어붙인다”고 비판했다. 무안 출신의 정영덕 도의원은 “시골의 역사(驛舍)는 열차를 타는 건물일 뿐 아니라 마을의 역사(歷史)”라며 “여러 세대의 사연과 추억이 깃든 철도역을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시골의 역사는 마을의 역사”적자 노선은 고속철도(KTX)가 교차 보조할 수도 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철도 같은 네트워크 산업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 기준으로 KTX에서만 5천억원 남짓 영업이익을 기록해 나머지 일반 열차의 적자를 메웠다. 그런데도 운송사업에서 4142억원의 영업손실이 생겼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새마을호(56.8%)와 무궁화호(48.5%) 등 일반 열차의 요금이 원가에 훨씬 못 미친다. 둘째, 일반 철도 노선 22개 가운데 1개를 제외하곤 적자인데 정부는 8개 벽지 노선에만 PSO를 지원한다. 그 보상률도 77% 수준이다. 2012년 일반 철도 운영으로 코레일이 1조2289억원가량의 손실을 입었지만 정부가 지원한 PSO는 3040억원에 그쳤다. 지난 5년간 직원 2711명을 줄이고 수차례 임금을 동결하는 등 나름의 자구 노력을 했는데도 코레일이 영업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정부의 PSO가 늘지 않으면 KTX 흑자로 일반 철도 적자를 메우는 교차 보조가 유일한 해법이다.
문제는 이마저도 난관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서울 강남권역과 경기도 성남시 분당을 지나는 ‘알짜 노선’인 수서발 KTX를 코레일의 자회사에 넘김으로써 코레일의 KTX 수익마저 곤두박질할 위기에 처했다. 결국 일반 열차에까지 악영향을 끼쳐 벽지 철도 이용객들은 더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일반 열차의 요금이 오르거나 노인·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요금 할인이 축소될지 모른다. 비효율의 상징으로 찍힌 일부 적자 노선은 아예 폐지될 수도 있다. 알짜 노선을 먼저 떼어내고 적자 노선을 마저 떼어내는 것, 이것이 철도 효율화의 본질이다. 저 멀리 달려가는 ‘효율화 폭주기관차’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부산·영주·봉화·서천=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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