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만 60년째.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담배 관련 소송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 담배가 법정에 선 것은 195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다. 초창기 소송은 흡연 피해자가 “담배업체가 담배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와 “흡연과 폐암 등 질병이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1994년까지 담배업체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담배업체가 내세운 “담배의 위험성을 알고도 자발적으로 피운 것은 흡연자의 책임”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인과관계 있으나 배상 책임은 없다’미국에서 담배 소송의 전기가 마련된 건, 1994년 미국 담배업체 ‘브라운앤드윌리엄슨’(B&W)의 제프리 위건드 박사가 담배의 유해성을 담은 내부 문건을 폭로하면서부터였다. 그 뒤 흡연 피해자와 유가족, 그리고 주정부도 담배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이어갔다. 흡연 피해자들에게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의미로 천문학적 배상금이 지급됐다. 1997년에는 미국 법정에서 “담배가 유해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1998년에는 뉴욕주 등 8개 주정부가 필립모리스 등을 상대로 흡연 관련 질병 치료 비용 청구소송을 냈다. 담배업체들은 주정부와 소송 철회를 조건으로 2025년까지 2060억달러의 배상금을 내놓는 데 합의했다.
국내에서 담배 소송이 시작된 건, 미국에서 소송 결과가 한창 쏟아질 무렵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물을 때 형벌적 의미로 금액을 추가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없는 탓에 손해배상 액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국내 최초의 담배 소송은 1999년 폐암 말기 환자였던 외항선원 김안부(사망)씨와 가족 등 5명이 국가와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를 상대로 1억7600만원을 배상하라며 낸 소송이었다.
담배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한 판결은 아직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담배 소송으로는 폐암 등의 흡연 피해자와 유족 등이 낸 2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1999년 폐암·후두암 환자 등 7명과 그들의 가족·유족 등 30명이 국가와 KT&G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현재 대법원 소송이 진행 중이다. 2011년 2월 서울고등법원 민사9부는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개별 환자들의 폐암 발병 가운데 일부는 흡연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정했지만, 담배 유해성의 은폐나 니코틴 함량 조작과 같은 불법행위에 대한 입증이 없다며 “담배 제조업체(KT&G)의 배상 책임은 없다”고 밝혔다. 소송 당사자인 흡연 피해자 7명 가운데 6명은 이미 암으로 숨졌다. 최근에는 퇴직한 남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직장 내 간접흡연으로 인한 산업재해 인정을 요구하는 행정소송도 진행 중이다.
전매청 시절 자료도 공개하지 않아국내 담배 소송으로는 흡연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뿐만 아니라 담배의 유해성을 확인하는 정보공개 청구소송도 있었다. 2003년 한국금연운동협의회는 흡연 피해자를 대신해 KT&G 부설연구소의 담배 유해성 연구 문건 464건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당시 재판부였던 서울중앙지법은 KT&G에 문서제출 명령을 내린 바 있다. 2009년에는 경기도가 수출용 담배로는 화재안전담배를 제조·판매하면서 국내용으로는 화재안전담배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화재 위험이 높은 첨가물을 사용했다며 KT&G를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지난 2월 수원지방법원 민사10부는 “담뱃불 화재는 대부분 흡연자가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채 담배를 버리거나 방치할 때 발생한다”며 “피고의 담배가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하지 않은 이상 피고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담배 소송이 오랜 시간 이어지고 대부분 담배업체의 승소로 끝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보 부족’이다. 담배 소송을 맡고 있는 정미화 변호사(법무법인 남산)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회원국인 우리나라가 KT&G 등 담배업체의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FCTC 조항에 따라 담배 피해를 줄이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정부가 KT&G가 민영화되기 전 전매청 시절부터 보유하고 있는 담배 관련 자료조차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고 지적했다.
담배 소송 관련 전문가 그룹에 대해 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보고서 ‘담배회사 내부 문건 속 한국인 과학자 분석’을 보자. “1987년 11월 담배회사의 후원으로 ‘실내공기 질 도쿄 국제회의’가 열렸다. 당시 담배회사는 이러한 국제회의를 통해 ‘실내공기 오염이 간접흡연 때문이 아니라 일산화탄소·라돈 등의 물질 때문이며 환기 시스템이 잘못 설계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주장을 퍼뜨림으로써 과학계와 규제 당국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도쿄 국제회의 자료집에 한국의 두 의대 교수가 쓴 ‘한국 실내공기 오염의 특징’이라는 제목의 발표문이 실려 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그중 한 의대 교수는 2007년 폐암·후두암 환자 등 7명과 그들의 가족·유족 등 30명이 국가와 KT&G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 재판에 5명의 연구팀 가운데 1명으로 참여해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감정평가서를 내놓았다. 담배회사가 후원한 국제회의에 참가했던 연구자가 담배 소송의 객관적 감정평가자로 나서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해 KT&G는 “담배 소송과 관련해 연구, 보고문서 등 심리에 필요한 충분한 자료를 모두 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 담배의 위험성을 알고도 자발적으로 피운 것은 흡연자의 책임이라는 논리 뿐만아니라 담배를 하자있는 제품으로 볼 수 없다는 점과 경고의무 위반이 없기 때문에 제조·판매 상의 위법행위가 인정되지 않은 점, 더구나 흡연자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 역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소송에서 원고가 패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30만 명 질병 정보를 바탕으로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이 담배업체를 상대로 10조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검토하면서 국내 담배 소송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건보는 지난 8월 1992~95년 일반 검진을 받은 공무원·사립학교 교직원과 30살 이상 피부양자 130만 명의 질병 정보를 2011년 말까지 추적 조사한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 대상자 가운데 흡연자는 암에 걸릴 위험이 비흡연자보다 최고 6.5배 높았고, 남성 흡연자의 후두암 발생 위험도는 비흡연자의 6.5배, 폐암과 식도암 발생 위험도는 각각 4.6배, 3.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보가 담배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공공기관의 대규모 자료가 공개된다는 점에서 흡연과 폐암 등의 연관성을 입증하기가 수월할 가능성이 높다. 담배 전쟁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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