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멈춰 있었다. 지난 11월19일, 서울 양천구 목1동에 있는 유수지(하천의 수량을 조절하는 천연·인공 저수지) 일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공영주차장으로는 차량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테니스장에선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올해 안에 대규모 임대주택 단지 조성이 시작될 후보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라고는 ‘행복주택 결사반대’라고 적힌 현수막 정도뿐이다. 6개월 전 박근혜 정부의 핵심 주거복지 주택정책인 행복주택 사업의 최대 시범지구로 지정된 목동지구의 현재 모습이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불행한 주택’정부 계획을 중지시킨 건 양천구 주민들이다. ‘연내 2800가구 임대주택 착공’을 발표한 지 사흘 만에 주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순식간에 주민 10만여 명의 서명이 모였다. 서명은 청와대·국토교통부·서울시로 전달됐다. 주민의 강력한 반발에 밀린 정부는 당초 목표했던 7월은커녕 지금까지도 이곳을 사업지구로 공식 지정하지 못하고 있다. 신정호 주민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지적이다. “양천구는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지금도 교통이 혼잡하고 학교도 부족한데 2800가구나 들어오면 답이 없다. 추가로 늘어날 복지비 역시 양천구 재정에는 큰 부담이 된다.”
행복주택 사업이 첫 삽도 뜨기 전에 ‘불행한 주택’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수도권 시범지구 후보지로 지정된 7개 지구 가운데 목동지구 외에도 서울 잠실·송파·공릉지구와 경기 고잔지구의 주민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탓이다. 현재 정식 사업지구 지정에 성공한 곳은 오류·가좌지구뿐이다. 애물단지가 돼버린 행복주택 사업은 원래 박근혜 정부가 마련한 주거복지 정책의 야심작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철도부지 등 저렴한 국공유지에 임대주택을 만든 뒤 대학생,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등에게 주변 시세의 절반에서 3분의 1 가격에 공급한다는 묘안이었다. 취지만 놓고 본다면, 도시 외곽에 저렴한 주택을 지어놓고 저소득층만 입주할 수 있게 한 기존 공공임대주택 건설·공급 방식보다는 보편적인 주거권 실현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임기 중 공급을 목표로 한 물량도 20만 가구로, 전체 공공임대주택 공급 목표치(55만 가구)의 36%에 이른다.
그러나 원대한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난관에 부딪혔다. 졸속 행정이 화근이었다.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집값 하락과 이미지 추락을 이유로 지역사회의 반발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도, 정부는 주민은커녕 자치구와 협의조차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복주택 후보지를 선정했다. 그 결과 정부의 발표 직후 시범지구마다 주민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궐기대회가 열렸다. 국토부 관계자는 “(반발이 심한 후보지는) 여건을 보면서 지구 지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다른 후보지도 알아보고 있다. (10월로 예정됐던) 지방 등 2차 사업지구 후보지를 언제 발표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민간아파트의 4배가 넘는 건축비정부가 기대를 걸고 있는 가좌·오류지구도 올해 안에 공사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직 사업계획조차 확정되지 않은 탓이다. 문제는 턱없이 비싼 건축비다. 박수현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총 1500가구를 건설하는 오류지구에 들어가는 총공사비는 2800억원에 달한다. 토지비를 제외한 순수 건축비가 가구당 1억8667억원이나 된다는 뜻이다. 신혼부부형 주택(36㎡)을 기준으로 하면 평당(3.3㎡) 건축비가 1700만원에 이른다. 같은 방식을 적용했을 때 가좌지구 역시 평당 건축비가 1670만원으로 추정됐다. 일반적으로 수도권에 짓는 민간아파트의 평당 건축비(400만원)의 4배가 넘는 수준이라고 박수현 의원은 주장했다. 철길 위에 인공 대지를 만들어 주택을 건설하는 특수 공법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행복주택 평당 건축비를 국민임대주택 수준인 660만원으로 책정하고 있는 국토부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건축비를 줄이기 위한 설계를 재검토하라고 요청한 상태다.
보편적 주거복지를 내건 다른 정책들도 있으나 마나다. 렌트푸어를 대상으로 한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가 대표적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출시된 ‘목돈 안 드는 전세Ⅰ’(집주인 담보대출)은 11월8일까지 단 2건(총 1400만원)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실패는 예견돼 있었다. 전셋값이 치솟는 시장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방식인 탓이다. 구조는 이렇다. 전세 계약이 갱신되면서 전세금이 올라갈 경우 집주인이 보증금 상승분을 전셋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충당하고, 세입자는 대출금에 대한 이자만 내면 된다. 그러나 전셋집을 구하려는 세입자가 넘쳐나는 전세 대란의 와중에 집주인이 세입자를 대신해 빚을 지려 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런데도 국토부는 이 제도를 밀어붙여 스스로 체면을 구겼다.
어느 집주인이 대신 빚을 져주랴하우스푸어 대책 역시 외면받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따르면, 지난 5월 도입된 ‘보유주택 지분매각제도’는 11월11일 현재 단 한 명의 이용자도 없다. 목돈 안 드는 전세와 마찬가지로 허술하게 설계된 구조 때문이다. 이 방식에선 캠코가 3개월 이상 연체된 하우스푸어의 주택담보대출 채권을 모두 매입하는 대신 집의 지분 일부를 넘겨받을 수 있다. 그 뒤 하우스푸어는 캠코에 맡긴 지분에 대해 은행 대출 이자 수준으로 월세를 내고 살다가 지분을 되찾을 수 있다. 빚을 감당 못하는 하우스푸어들이 집을 경매에 넘기지 않고도 계속 거주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지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다. 하우스푸어가 집 지분의 일부를 매각하려면 캠코가 일단 채무자의 모든 주택담보대출 채권을 은행으로부터 사들여야 하는데, 대부분 은행이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에 채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캠코에 채권을 팔기로 약속한 시중은행은 신한은행과 우리은행 정도다. 두 은행에 빚을 진 하우스푸어가 아니라면 이 제도를 이용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캠코 관계자는 “정부의 책임 분담 요청에도 금융회사에 채권 매각을 강제할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우스푸어로부터) 인수할 수 있는 채권 규모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공공임대주택 건설과 더불어 주거복지 정책의 핵심 제도로 꼽히는 주택바우처(전·월세에 사는 저소득층 주거비의 일부를 정부가 지원) 도입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기대는 높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내년 10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개편하면서 그동안 수급비에 포함됐던 주거급여를 확대한 뒤 주택바우처로 독립시키기로 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주거비 지원을 받는 가구는 올해 73만 가구에서 내년 98만 가구로 늘어나고, 지원금도 가구당 월평균 8만원에서 10만9천원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소액의 임대료 지원은 저소득층의 주거비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정부 예산이 민간 임대시장에 풀리면 임대료만 올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임대료만 더 올릴 ‘주택바우처’박근혜 정부의 주거복지 정책에 대한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학)의 비판은 이렇다.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일련의 주거복지 정책은 개별의 단편적인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주거복지 정책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것들이다. 국민의 보편적 주거 안정을 위해선 행복주택, 주거비 지원 등 여러 대안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그런데 다 따로 논다. 실패는 당연한 결과다.” 주거복지 공약도 다른 경제민주화·복지 공약처럼 화려한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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