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한테) 토사구팽 당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듣지만, 나는 지금이 편하다.”
김종인 전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추진단장의 속내는 복잡해 보였다. 그는 경제민주화의 상징적인 존재다. 1987년 개헌 때 민정당 의원으로서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을 넣도록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했고,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했던 노태우 정부 시절엔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를 주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1년 그를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면서 ‘경제민주화’란 날개옷을 입혔다. 그러나 옷은 몸에 잘 맞지 않았다. 김종인 위원장이 주장했던 ‘재벌 기업의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등 핵심 내용은 정작 선거공약에선 빠졌다. 선거운동 내내 박근혜와 김종인 둘 사이엔 자주 불협화음이 일었다. 선녀는 날개옷을 입고 결국 대통령이 됐지만, 날개옷을 선물해준 이는 홀로 남겨졌다.
새누리당과 현 정부 관료 안 믿어
지난 10월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YMCA 대강당에서 ‘경제민주화’를 주제로 강연에 나선 김종인 위원장을 만났다. 최근 그는 “경제민주화에 대해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며 공식 인터뷰는 마다해온 터였다. 하지만 평소의 직설화법 그대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정치권을 향한 비판에 거침이 없었다. 2시간여의 강연을 마치고 나선 기자 몇몇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근황도 전했다.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의지가 남아 있는 걸로 보느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분명한 건, 박 대통령이 지난 1년 내내 경제민주화를 굉장히 강도 높게 부르짖었다. 원칙과 신의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그걸 무조건 저버리리라고는 생각 안 한다. 반대도 있고 하니까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완벽하게 경제민주화를 할지 안 할지는 몰라도 적당히 없던 일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이 선택한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기대랄까. 김 위원장은 2007년 박 대통령과 처음 친분을 쌓은 이후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경제 멘토’ 역할을 했다. 우려가 없을 리 없지만, 날선 비판은 잠시 미뤄두려는 듯했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 취임 1년쯤 지나면 다 말하겠다”고도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새누리당 의원들이나 현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믿지 않는다. 경제민주화를 추동할 배후세력으로 믿는 구석은 따로 있다. 바로 국민이다. “양극화, 대·중소기업 간 갈등, 골목상권 몰락 등은 전부 대기업의 끊임없는 탐욕에 의해 일어난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나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기업의 탐욕이 경제를 파탄으로 이끈 예다. 이런 사회구조 탓에 경제민주화를 이뤄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고 지난 대선 때 선거 이슈로 떠올랐다. 1987년 정치민주화를 이룬 것도 국민들이 역동성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국민이 원하면 정치권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는 이미 시대적인 흐름이다. 이걸 읽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특히 노태우 정부 이후의 역대 대통령들을 가리켜 “박정희 콤플렉스에 갇혀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대통령으로 칭송받은 박정희처럼 하고 싶어서 대통령들이 경제성장률에 집착한다는 분석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자본을 특정 기업에 몰아주고 업종마다 시장 진입을 엄격히 제한해서 재벌들이 오늘날처럼 컸다. 그래놓고 이제 와선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시장 진입장벽을 왜 둬야 하냐’고 한다. 요즘 탈세·횡령으로 구속된 재벌 총수들이 다 전경련 회장, 부회장 출신이다. 소액주주 사외이사를 이사회에 참여시켜서 총수들 전횡을 막겠다는 게 상법 개정안의 취지다."
최고집권자의 실천 의지가 중요김종인 위원장은 올 연말이나 내년 초께 독일로 연구차 3개월간 떠나 있을 예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조언을 구하러 김종인 위원장을 처음 찾아왔었다. “보수적인 메르켈 총리는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했다. 결국 최고집권자의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 경제민주화를 성공으로 이끌 힘은 제도가 아니라 의지에서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곱씹어봐야 할 말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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