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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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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한 사회, 파시스트가 원하는 사회

‘남보다 조금 늦게 돌을 던진다고 큰일 나지 않는 상황’,
지금의 난장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들
등록 2013-09-11 11:14 수정 2020-05-03 04:27
내란 음모와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의 통합진보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4일 오후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서 체포동의안이 표결된 뒤 단상에 올라 ‘내란음모 조작 국정원 해체‘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내란 음모와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의 통합진보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4일 오후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서 체포동의안이 표결된 뒤 단상에 올라 ‘내란음모 조작 국정원 해체‘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병역거부자 공현씨는 녹취록을 읽지 않는다. 읽고 싶지만 참는다. “그걸 봐버리면 국정원에 놀아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안다. 녹취록이 완전한 날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맥락이 중요한데, 세부적인 말이라도 국정원이 고쳤다면,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호기심이 들어도 그는 녹취록을 읽지 않는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솔직히 말하자’. 녹취록은 놀랍다. 정말 저렇게 말했을까 싶을 만큼 놀랍다. 그러나 다시 솔직히, 너무 놀라는 척하지는 말자. ‘저 사람들 원래 저래’ 경고를 해도 무시하던 이들이, ‘저들도 변했어’ 하면서 손잡던 이들이, 녹취록 앞에서 금긋기에 여념이 없다. 성찰은 없고, 고발은 많고, 비난은 넘친다. ‘종북척결 부흥회’에 자신을 진보라 부르는 이들의 손가락질도 보인다.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죄를 미워하지 아니 용인하지 말자. 지금껏 증거는 녹취록뿐이다.


“처벌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보 진영 안의 문화지체는 극복돼야 한다. 자주파가 진보정치, 노동운동 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진보 진영 다수도 자신의 실리를 위해 이들의 낡은 면모를 알면서도 은근히 활용해왔다.” -홍세화 발행인

언제나 판단의 최종 근거는 ‘명백히 현존하는 위험’이 되어야 한다. 누구는 허망하다 하고 누구는 지겹다고 하겠지만, 다시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 돌아간다.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공안 당국과 이에 맞서온 인권운동가, 이른바 경기동부연합과 경쟁해온 진보정당 활동가 그리고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고생한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남보다 조금 늦게 돌을 던진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성명1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던지자 치면, 진보신당에서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꾼 이들이 가장 먼저일지 모른다. 이른바 자주파와 도저히 당을 같이 할 수 없다며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했고, 다시 이들과 통합 문제를 놓고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전·현직 진보신당 대표가 당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탈당한 이들이 만든 정의당이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에 찬성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노동당의 성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석기 체포동의안 처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평등·생태·평화를 가장 중대한 과제로 삼는 노동당은 당연히 이석기 의원 등이 포함된 통합진보당 내 일부 조직의 발상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도 “이들 문제와는 별개로, 국회에 제출된 체포동의안은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실체적 위험성을 인정하기 힘든 함량 미달의 형법상 ‘내란 음모’ 혐의, 더구나 체포동의안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피의사실 일체가 공개되거나 영장 발부 전 피의자 소환 절차까지도 생략된 절차적 문제가 있다. 특히 폐지되어야 할 국가보안법이 또다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통합진보신당 심상정(왼쪽부터), 이정희, 유시민 공동대표가 16일 오전 국회에서 새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통합진보신당 심상정(왼쪽부터), 이정희, 유시민 공동대표가 16일 오전 국회에서 새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김종철 전 노동당 부대표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모임”이라며 “어떻게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녹취록에 드러난 그들의 인식에 대한 견해도 덧붙였다. “사실 미국이 선제타격을 하지 않으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기 어렵다. 선제적 공격보다는 만약에 전쟁이 닥치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이어 그는 “차라리 탱크 앞에 눕는 것을 결의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리고 갈팡질팡하는 통합진보당의 해명도 비판했다. 그는 “차라리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분노로 과격한 말들이 나왔다고 했으면 어땠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실력으로 밀려나지 않았다면 저들이 진보를 대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상황을 이렇게 만든 진보 진영 전체가 고해성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홍세화 발행인

명망가들이 떠난 진보신당의 대표를 맡아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던 그는 진보 진영의 성찰을 강조했다. 그는 “내란 음모니 국가보안법이니 하는 처벌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진보 진영 안의 문화지체는 극복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주파가 진보정치, 노동운동 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진보 진영 다수도 자신의 실리를 위해 이들의 낡은 면모를 알면서도 은근히 활용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미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등을 통해 충분히 알려진 것에도 귀를 닫았단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면서 여전히 성찰하지 않는 건 진보 진영의 기회주의”라고 비판했다.

#성명2 ‘마녀사냥을 중단하라’

지난 9월4일 인권운동사랑방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을 중단하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 논평은 “통합진보당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은 넘쳐나지만 공안탄압을 중단하라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논평은 “진보의 이름으로 주장되는 입장들”에 대해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는 편향된 사회에서 결과적으로 마녀재판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진보의 이름으로 주장되는 입장들이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는 편향된 사회에서 결과적으로 마녀재판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
-9월4일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논평은 이른바 ‘내란 음모’ 사건이 낳을 효과에 대해 “국정원은 이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임계치를 설정하면서 우리 모두를 그 안에 가두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석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그는 “녹취록에 담긴 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당시의 전쟁 위기를 생각하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만은 아니다”라며 “이런 견해를 운동사회에서 추방해버리고 이상한 집단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고민이 성명에 담겼다”고 말했다. 그러면, 아무리 국가보안법이 있다고 치더라도 이들이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종북이라면 치를 떠는 사회에서 과연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만이 좋은 전략일까”라며 “예컨대 가족 모두가 기독교 근본주의 신자로 호모포비아에 젖어 있는데,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라고 답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2000년대 국가보안법 탄압은 이른바 주사파를 향해 있었다.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시작했다 고무·찬양죄만 인정되는 용두사미로 끝난 재판이 많았다. 결국은 과장이 강한 것으로 드러난 국가보안법 사건 피의자 곁에 있었던 대표적 인물을 꼽자면, 박래군씨다. 그도 이번 사건에 대해 “2000년대 국가보안법 사건에 비해 공당의 의원, 내란 음모 같은 새로운 면이 많다”며 곤혹스러워했다. 국가보안법 사건을 오랫동안 경험해온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국정원의 국내 파트 수사가 많이 위축됐던 것은 사실”이라며 “벌써 전방위 사찰이 김대중 정권 말기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2일 오후 정기국회 본회의 개원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이석기 의원이 국민의례, 애국가제창, 묵념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일 오후 정기국회 본회의 개원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이석기 의원이 국민의례, 애국가제창, 묵념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그는 “이런 때일수록 원칙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같은 한국 사회가 쌓아온 인권의 원칙이 이른바 내란 음모 사건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130명이 회합하고 모의하면 무너지는 체제인가”라며 “현존하는 위협인 척하면서 마녀사냥을 조장하는 국정원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현존하는 위험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에 대한 금긋기에 열중하는 일부 진보 진영에 대해 “그들과 완전히 다르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고백과 성찰이 앞서야 한다”며 “구시대와 단절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지적했다.

#박정근 국가보안법 피해자

농담으로 물었다. “같은 종북으로 느끼는 바는?” 그가 웃으며 답했다. “복잡하고 애매하다.” 그는 트위터로 북한을 조롱했지만, 검찰은 북한을 고무·찬양했다고 기소했다.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사이트 계정글을 리트윗한 혐의였다. “김정일 카섹스” 같은 농담도 있었지만 그는 구속됐다. 1심에서 유죄를 받았지만, 지난 8월 2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폐지 여론이 흔들려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녹취록의 일부 발언에 대해 “농담이었다”고 했다. 진짜로 농담을 하다 구속까지 됐던 그는 “많이 심란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트위터를 가지고 압수수색을 했던 것처럼, 의원실이 압수수색 당하고 의원이 체포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공현 병역거부자

이석기 의원의 애국가 제창이 논란을 낳기도 했다.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둔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이다. 총을 들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청소년활동가로 애국가 제창에 문제를 제기해왔던 공현씨는 “일단 안쓰럽다”고 말했다. 그는 “그만큼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돌려세우려는 강력한 압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하고 나서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라고 덧붙였다.

1969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브랜던버그 대 오하이오’(Brandenburg vs Ohio) 판결이 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가 2007년 에 기고한 글에 바탕하면, 당시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인 KKK단의 리더 브랜던버그는 TV에 방영된 연설을 통해 “우리는 보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이, 연방의회가, 연방대법원이 계속 백인들을 탄압한다면 어떤 보복 조치가 취해져야만 할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오하이오주 법원은 ‘과격단체운동 처벌법’으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연방대법원은 그의 발언이 수정헌법 제1조와 제14조에 의해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의 보호 범위 내에 속한다고 결정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려면 ‘위험의 급박성’이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폭력 선동을 처벌하기 위해 불법적 행동이 의도되고 그 발생이 급박한 것이어야 한다’(intent to incite imminent lawless action)는 원칙이 세워졌다. 헌정질서 바깥의 사고를 쳐내고, 주류가 보기에 이상한 견해가 없는 나라는 과연 좋은 나라일까? 청결한 사회는 파시스트가 원하는 사회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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