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7월2일부터 진행 중인 국가정보원에 대한 국정조사는 정보 기관을 본격적으로 겨냥한 첫 국정조사다. 1961년 중앙정보부가 창 설된 이후 50여 년 역사 동안 각종 견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국 정원에, 국회는 이번엔 제대로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까.
감사받으러 온 중정부장한테…민주주의에선 ‘민’(民)이 권력을 가진다는 이치상, 모든 권력기관은 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선거에서 이겨 다수의 ‘민의’로 얻어진 권력은, 선거를 거치지 않고 형성된 권력보다 우선해야 한다. 그래서 민을 대표하는 의회는 국정에 대한 감독 권한을 갖는다. 우리 헌법 제 61조가 정하는 국회의 국정감사권과 국정조사권의 의미다.
1948년 제정된 제헌 헌법은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기 위하여 필요 한 서류를 제출케 하며 증인의 출석과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 할 수 있다”(제43조)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보장했다. 국정감사는 다른 나라에서 유사한 예를 발견하기 힘든 독특한 제도다. 시기와 기간, 횟수를 정해서 입법부가 행정부 업무 전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 도록 해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의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제도로 보장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도 국정감사는 해마다 받 았다. 그러나 서슬 퍼런 권위주의 정권의 실세였던 정보기관장들을 상대로, 국회의 감사 활동은 효과를 거두기 힘들었다. 김형욱이 중 정 부장 시절(1963~69) 국정감사를 위해 국회에 나타나면, 감사 시 작 전 여당(공화당) 의원들이 그가 있는 위원장실을 찾아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당시 소관 상임위원회인 내무위원회의 오치성 위 원장부터가 김 부장과 1살 차이 나는 고향(황해도) 후배라 그를 ‘형님’ 으로 깍듯이 대했다. 심지어 어떤 국회의원은 술집에서 김 부장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목격당하기도 했다.( 1990년 9월21일, ‘남산의 부장들 7-의원 약점 잡고 안하무인 행패 김형욱’)
야당 쪽에선 각종 시국사건을 둘러싼 고문 의혹이나 증거인멸, 간 첩사건 조작 의혹 등을 규명하기 위해 중정을 추궁했다. 그러나 당시 중정도 지금 국정원과 마찬가지로 ‘보안’ ‘기밀’ 등을 이유로 자료 제 출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사실 1960년대 국감에서 야당은 원체 이렇다 할 성과를 내기 힘든 구조였다. 정부 공무원들이 야당의 집권 가능성을 낮게 점치면서 정보를 좀처럼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물며 권력의 핵심으로 군림하던 중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무렵부터 야권에선 이미 중정 폐지론을 거론했다. ‘대공 분야 집중’이나 ‘수사 업무 축소’ ‘직권남용시 처벌 강화’ ‘국회 보고 거부 제한’ 등 지금 까지도 숙제로 남아 있는 개선책이 대두한 것도 이때부터다.
안기부장이 왜곡된 활동 인정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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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권은 1972년 유신헌법에서 폐지됐다. 국회의 견제를 없애 놓고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뒤를 이은 그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물이던 ‘직선제 개헌’ 때 국정감사권도 부활했다. 앞서 1975년과 1980년, 국 회법과 헌법에 각각 명문화된 국정조사권도 같은 조항에 묶였다. 국회의 국정조사권은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제도다.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로 본회의를 통과하면 실시할 수 있고, 국감과 달리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1988년 총선으로 구성된 13대 국회 때부터 안기부에 대한 정기 국감이 재개됐다. 각종 국정조사에서 안기부가 조사 대상 기관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1993년 열린 ‘평화의댐 의혹 국정조사’에서, 김덕 안기부장은 평화의댐 건설에 대해 “안기부의 활동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왜곡됐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올림픽 안전을 위한 대응책이었으며, 국내 정치와는 무관했다”는 전직 원장 장세동과 는 입장이 달랐다. 야당 의원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평화의댐을 정권 안보에 이용했음을 안기부가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 부·여당의 비협조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97년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이 부도를 냈다. 특혜 비리로 부실 대출된 금액이 5조7천억원에 이르렀다. 관심의 초점은 배후로 지목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연루 의혹이었다. 각종 권력 기관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며 개입한다는 의혹을 받던 현철씨 가 안기부 작성 보고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현철씨는 청 문회 증인으로 채택돼 증언대에 세워졌고, 대부분 의혹을 부인했다. 국정조사는 현철씨의 이권 개입 및 국정 개입 의혹 일부를 입증해냈 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궁극적인 진상 규명에는 실패했다. 이후 검찰 은 김현철씨와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을 잇따라 구속 수감했다.
권영해 자해사건·언론 대책 문건…정보기관을 상대로 한 국정조사는 시작도 못하고 접은 사례가 많 다. 1998년 3월 한나라당은 대선 무렵의 ‘북풍 공작’에 대한 검찰 수사가 야당을 음해하려는 목적으로 진행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야당 탄압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권은 반대했다.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자해 사건 탓 에 정국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이를 계 기로 안기부는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후 발표된 검찰 수사 결과, 북풍 사건은 안기부가 특정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벌인 전형적인 정치공작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1999년 10월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원내총무 이부영 의원은 국내 주요 인사 및 해외동포들에 대한 국정원의 도·감청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원은 자세한 감청 방식과 감청요원들의 근무 방식을 거론했다. 한나라당은 국정조사를 요구했지만 여당과 합의를 보지 못했 다. 당시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는 이른바 ‘언론 대책 문건’이 터져나오면서 국정원 감청에 대한 국정조사 계획은 유야무야 묻혔다.
국정조사는 1987년 이후 모두 80여 건이 발의됐지만, 실제 여야 합의로 실시된 것은 21차례에 불과하다. 그나마 보고서 채택까지 이어진 것은 8차례뿐이다. 많은 경우 준비 및 조사 과정에서 여야 간 이견이 불거져 파행으로 마무리됐고, 조사를 끝낸 뒤에도 보고서 채택을 놓고 마찰을 빚으며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국정조사가 야당의 칼과 여당의 방패가 맞붙는 정치공방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탓이다.
야당의 칼날은 무디기만중정은 5·16 때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안기부는 12·12 때 국가보 위입법회의를 통해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태생부터 민주적이지 않은 조직이 비공개를 고수하는 국정조사는 애초부터 한계가 뚜렷하다. 특히 지금처럼 여야 정치공방 속에서 진행되는 국정조사라면, 기대할 게 그리 많지 않다는 우려가 나온다. 야당의 칼날이 무디기만 해서 언론 보도와 기존 수사 결과를 재탕 삼탕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더욱 그렇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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